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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춘섭

ARTNOW

케이씨피의 최춘섭 회장은 지난 45년간 의료 기기 기업을 경영하며 한국 보건 산업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런데 최근엔 경영 일선에서 잠시 물러나 미술 세계에 빠져들었다. 지금 가장 뜨거운 이슈를 만드는 단색화 작가들의 작품은 물론 유럽과 미국의 이름난 작가들 작품에 매혹돼 수준급 컬렉션을 이룩했고, 지난해부터는 회사 사옥 1층을 보수하고 그 자리에 대안 공간 챕터투(ChapterII)를 열어 전시 공간과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젊은 작가들에게 힘을 보태고 있다. 올해 76세, 미술 세계를 향유하는 데 나이가 중요할까? ‘산수(傘壽)’에 가까워져서야 오히려 먹구름 걷힌 듯 깨끗이 반짝이는 그의 눈에서 진정한 미술 애호가의 열정을 보았다.

젊은 작가들을 지원함으로써 미술계의 힘을 키우는 최춘섭 회장.

최춘섭 회장은 현재 4개의 회사를 경영하고 있다. 한데 그중 한 곳은 오직 그가 만든 대안 공간의 운영을 위해서만 존재한다. 그야말로 물심양면. 그를 국내 대표 컬렉터라고 부를 순 없을 것이다. 단, 미술에 대한 애정만큼은 국가대표라 칭할 만하다. 젊고 실험성 있는 작가들을 지속적으로 지원하며 작지만 단단한 ‘미술의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기 때문. 서울 한남동 그의 자택에서, 미술계에서 컬렉터의 역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지난해에 연남동에 갔다가 우연히 챕터투의 전시를 봤습니다. 그 후 한참 지나 그곳이 대안 공간이라는 걸 알았고요. 미술에 대한 ‘열정’만으로 대안 공간을 운영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닐 듯한데, 어떻게 그 공간을 마련하게 됐나요?
기업 이윤의 사회적 환원이라는 측면에서 열게 됐습니다. 다행히 제가 경영하는 회사의 직원들도 예술에 관심이 많아 일사천리로 진행됐죠. 챕터투는 대학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사회로 나가고자 하는 젊은 작가들에게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고 전시도 할 수 있게 해주는 공간입니다. 지금도 3명의 젊은 작가가 입주해 작품 활동을 하고 있죠. 그들이 예술가로서 자신의 꿈을 실현하길 바랄 뿐입니다.

현재 4개의 회사를 경영하고 계신 것으로 압니다. 경영자로써 바쁜 일정 속에서 미술에 대한 관심을 이어가기가 쉽진 않을 듯한데, 어떻게 미술에 빠지게 됐나요?
오래전 외국 출장길에 갤러리에 들러 보낸 시간이 조금씩 발전한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1970년대, 30대의 나이에 해외 출장이 잦았는데, 도시와 도시를 이동하며 여유가 생길 때마다 늘 현지 담당자에게 그 동네 갤러리에 데려가달라고 부탁했죠. 당시엔 어떤 작품이 좋다 하는 특별한 취향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냥 미술 작품을 보는게 좋았죠. 그렇게 좋든 싫든 작품을 보면서 조금씩 눈을 뜬 게 아닐까 싶습니다.

본격적으로 미술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언제부터인가요?
회사 경영 일선에서 조금씩 손을 떼면서입니다. 시간 여유가 있을 때마다 미술관이나 갤러리에 들르며 관심을 키웠죠. 그러다 보니 젊을 때처럼 그림이, 미술이 좋아지더라고요. 그러면서 인상적인 전시를 보거나 관심 있는 작가가 나타나면 자료를 찾아 스스로 공부했습니다. 그러다 그걸로는 부족함을 느끼고 서울의 한 대학 미술 최고위과정에 등록해 본격적으로 미술 공부에 매진했죠.

학교에 가셨다고요?
네. 7년쯤 전엔가 홍익대학교 현대미술 최고위과정에 등록해 미술 공부를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겁도 없었던 것 같아요. 가서 보니 집중이 정말 안 됐거든요. 인상파가 뭔지, 입체파가 뭔지, 시대사조를 공부하는 건 예상보다 어려웠어요. 생각을 해보세요. 올해 제 나이가 76세입니다.(웃음). 어쨌든 남들보다 미술 공부가 부족하다는 생각에 그때부터 혼자 틈틈이 책을 찾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공부하다 보니 자연스레 작품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게 됐고요. 이후 작품을 한 점 두 점 구입하게 된 거죠.

1 유럽 신표현주의의 발흥을 이끈 필리프 판덴베르흐(Philippe Vandenberg) ‘Grande Noir’.
2 국내 미술계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 중 한 명인 김환기의 ‘봄의 소리’.

현재 소장한 컬렉션을 큰 카테고리로 나누면 어떻게 분류할 수 있나요?
한국 추상화와 해외 작가의 페인팅 및 조각으로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의도한 건 아니고, 한 점 두 점 모으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추상화 중엔 단색화가 유독 많습니다.

단색화의 경우 본격적인 붐이 일기 전부터 조금씩 소장하기 시작한 걸로 압니다. 그런데 이후 그것이 국내외에서 주목받으며 감회가 새로우셨을 것 같은데, 실제론 어떠셨나요?
사실 동아시아에서 추상미술이 발달한 나라는 한국과 중국, 일본 세 나라뿐입니다. 특히 한국은 조선백자에서 알 수 있듯 추상이나 비구상이라는 개념의 문화적 배경이 오래전부터 존재했죠. 그러니 단색화의 출현도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졌다고 볼 순 없을 겁니다. 오래전엔 상업적으로 성공하지 못했지만,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켜온 이들이 지금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인정받는 것이니까요.

여러모로 기분이 참 좋으실 것 같습니다.
과거엔 국내 미술가들이 일정 군을 이루며 지금처럼 해외에서 주목 받은 적이 없습니다. 지금이야 단색화로 큰 주목을 받고 있지만요. 하지만 전 사실 아직 부족하다고 봅니다. 글로벌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작품의 객관적 가치가 메이저 옥션 경매 기록에 의해 상당 부분 규정된다는 가정하에, 어떤 단색화 작가의 작품도 아직100억 원 대에 거래되진 못하니까요. 얼마 전, 앤디 워홀이 그린 마오쩌둥 초상화가 140억 원에 팔리지 않았습니까. 우리 민족 고유의 추상성에 기반한 단색화 거장들의 평생의 역작들도 그처럼 큰 사랑을 받아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아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트 바젤 홍콩 관련 뉴스를 접할 때마다 해외 미술가와 그들의 작품에 국내 컬렉터들의 관심이 증가하는 걸 느낍니다. 한데 저는 국내 컬렉터들이 해외 작가보다는 한국 작가의 작품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봅니다. 더 좋은 작품을 컬렉션하기 위해 한국 작가의 작품에 더 치열한 경쟁을 펼쳐야 한다고 생각하죠.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한국에도 100억 원의 가치를 상회하는 작품이 나올 테고요. 국가적으로도 그것은 양질의 문화자산이 증가하는 일인 것 같습니다. 한데 현재 단색화의 가치를 미리 간파하고 해외에서 그것을 비싸게 사는 건 대부분 중국 컬렉터들입니다. 좋은 작품이 국내에 머무르며 다음 세대에까지 이어지길 바라는 입장에서 아쉽습니다.

단색화 1세대 작가들과 연배가 비슷하신데, 그들과 곧잘 소통도 하시는지요?
몇몇 작가와 이따금 교류하고 있습니다. 처음 정상화 작가의 작업실에 가서 눈물을 흘린 게 기억나네요. 그가 돈과 명예에 대한 욕심 없이 평생 빛도 못 보고 수행하듯 그림을 그려온 걸 알고 초면에 눈물을 보였죠.(웃음)

컬렉터들은 대부분 작가를 직접 만나 이야기하는 걸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작가를 만나는 건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 가장 빠른 방법이기도 하니까요. 혹시 국내 작가들 외에 해외 작가와 관련된 에피소드도 있는지요?
벨기에 출신 작가 쿤 판덴브룩(Koen van den Broek, 1973년~)과의 인연을 들 수 있겠네요. 그를 처음 만났는데, 심한 어깨 통증으로 고생하고 있더군요. 대형 페인팅 작업을 하는 이기에 그 이상 심각한 문제도 없었죠. 안타까운 마음에 의료계 네트워크를 활용해 그가 한국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도왔어요. 다행히 증세가 호전됐고, 당시의 인연으로 그의 대표작 ‘Floating Flower’를 소장할 수 있게 됐죠. 이후 그가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교류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그 작품을 볼 때마다 그와의 인연을 생각합니다.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게 참 좋아요.

1 신라이프치히 화파의 주축인 로자 로이(Rosa Loy)의 ‘Sound of Earth’.
2 동양화의 본질적 특성에 주목해 오랫동안 독자적 화풍을 펼친 권영우의 ‘무제’.

작품을 구입할 땐 주변의 조언을 잘 듣는 편인가요? 아니면 자신의 감각에만 의지하시나요?
최종 결정은 자신의 ‘느낌’에 맡깁니다. 하지만 거기에 도달하기까지 전문가들의 조언을 구하죠. 그들과의 대화에서 생각지 못한 작품에 대한 스토리를 알게 되는 경우도 많으니까요. 그렇게 작가의 성향이나 작업 태도를 파악하기도 합니다. 제 경우엔 갤러리바톤이 컬렉션 방향성을 잡는 데 크게 기여했고, 현장 경험이 풍부한 챕터투의 디렉터에게 도움을 받기도 하죠.

경매에도 이따금 참여하시는 걸로 압니다. 경매장에 가면 종종 현장의 분위기에 ‘업’되어 생각지 못한 작품을 사게 되는 경우도 있는데, 그런 경험은 없으신지요?
‘생각지 못한’ 작품이라기보다는,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이 유찰될 것 같아 사버린 경험은 더러 있습니다. 3년쯤에도 전 국내의 한 미술품 경매에서 단조로운 풍경화로 유명한 한 작가의 작품이 유찰될 뻔한 적이 있었죠. 한데 그 며칠 전, 갤러리에서 그의 전시를 본 터라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그걸 덥석 낙찰받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며칠 뒤 작가의 전시가 열리는 갤러리에 찾아가 제가 얼마나 혼을 냈는지 모릅니다. 당신들의 작가를 그렇게 방치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막 따지기도 했어요.(웃음)

국내 미술 시장이 점점 커지고 있는 지금, ‘컬렉터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이야기도 다양하게 나오고 있습니다. 그들은 대개 “인기 작가들의 가격을 높이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앞으로 그렇게 될 작가를 발굴해 지속적으로 육성하는 게 관건”이라고 말하죠. 당연히 잠재적 발전 가능성이 있는 작가를 키우려면 컬렉터의 역할이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하지만 국내 미술계엔 아직 그런 작가들의 후원자로서 컬렉터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가 적은 게 사실이죠. 여기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주변에서도 부동산이나 주식에 이어 투자 목적으로 컬렉션을 시작하는 이들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미술품에 대한 애정과 지식이 없기에 금방 싫증 내기 십상이죠. 미술에 대한 애정이 전제된 진정한 의미의 컬렉터는 새로운 작가를 발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가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지할 거라고 봅니다. 또 하나, 진정한 의미의 컬렉터를 양산하기 위해선 미술품 컬렉션을 부자들의 재산 은닉이나 탈세 도구로만 여기는 일부 시각도 개선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대안 공간에 대한 질문으로 인터뷰를 마무리할까 합니다. 미술 시장에서 대안 공간의 ‘역할’이라 하면 전시의 ‘실험성’을 중시하는 게 특징입니다. 물론 ‘비영리성’과 ‘독립성’도 함께 추구하지만요. 지금 주목하고 있는, 실험적인 작업을 하는 작가는 누구인가요?
현대미술의 장르는 지금도 다양해지고 있고, 미술가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를 통해 자신의 영역을 확장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이야말로 대안 공간에서 보여줘야 할 현대미술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챕터투에서 작품을 전시하고 있는 최선(<우리 시대의 추상>, 4월 13일~5월 27일) 작가의 경우 캔버스에 폐유를 칠하거나 바닷물에 담가 건진 스펀지를 선보이는 아주 독특한 작업을 합니다. 또 레지던시에 입주한 오유경 작가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천과 의자, 풍선 등을 이용해 보이지 않는 힘과 예술의 관계를 표현하죠. 작품들이 정말 혼을 쏙 빼놓습니다.

마지막으로 국내의 한 대안 공간 설립자로서 앞으로 어떤 활동을 하실 계획인지 말씀해주세요. 현재 국내 미술계에 제시하고자 하는 ‘대안’이 무엇인지도 궁금합니다.
개인 컬렉터로서 국내 미술계 전체를 아우르는 화두에 대해 논하는 건 그리 바람직하지 않다고 봅니다. 다만, 우리나라가 예술 강국이 되기 위해선 다양한 형태의 미술이 공존할 수 있는 풍토와 환경을 장기적 청사진으로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챕터투의 구체적 계획을 말하면, 설립 1년 차인 우리의 공간과 레지던시 프로그램이 성공적으로 안착해 연남동의 새로운 문화 공간으로 자리 잡을 수 있게 잘 지원하는 것입니다.

 

David O’Kane
강렬한 색감과 극사실주의 기법으로 꿈의 잔상과 영화에 대한 기억, 머릿속에서 뒤죽박죽 섞인 이야기, 인간의 의식에 단편적으로 존재하는 비현실적 현상을 그려내는 데이비드 오케인. 아일랜드 출신으로 유럽을 무대로 활동하는 그는 눈을 의심하게 하는 사진 같은 그림으로 보는 이를 현혹한다. 2014년 권위 있는 아일랜드 미술상 ‘골든 플리스 어워드’를 수상하며 승승장구하고 있는 그는 그간 두 차례 갤러리바톤을 통해 서울에서도 작품을 소개했다.

유럽을 무대로 활동하며 차세대 작가로 주목받고 있는 데이비드 오케인의 ‘Stage 1’.

사람의 흔적이 사라지고 사물이 주인공이 된 풍경을 그리는 노충현의 ‘Room’.

 

Koen van den Broek
주관적 기억에 의존해 그리는 보통의 추상회화와 달리 인공적 구조물과 공간을 기본으로 반추상에 가까운 작품을 완성하는 쿤 판덴브룩. 건축을 전공한 그는 도로와 교통 구조물 등 기능적 목적으로 창조된 기하학적 공간을 탐구한다. 직접 여행하며 촬영한 사진이 작품의 발원지이며, 이를 캔버스에 옮기는 과정에서 추상성을 부여하는 동시에 이미지의 해체와 강조의 연속 반응이 일어나는 독특한 작품 세계를 펼치고 있다.

쿤 판덴브룩의 ‘Floating Flower’.

 

Rodney Graham
1970년대에 밴쿠버의 개념미술 그룹에서 활동을 시작한 로드니 그레이엄은 작가이자 시인, 프로듀서, 배우, 퍼포머, 때론 뮤지션으로 무대에 오르는 전방위 예술가다. 당연히 작품도 어느 한 장르에 연연하지 않고 회화와 사진, 조각, 설치, 퍼포먼스 등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스타일. 예리한 위트와 독특한 세계관으로 현대미술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로 인정받는 그는 현재 영국 발틱 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열고 있다(3월 17일~6월 11일).

컬러풀한 색조가 돋보이는 로드니 그레이엄의 ‘Cylindro-chromatic Abstraction Construction #29’.

 

Sukone Yoon
윤석원은 평소 끊임없이 기록하고 수집한 사진 및 영상 자료에 기반을 둔 자신의 기억과 감정이 움직이는 순간을 캔버스에 담는다. 지극히 사소하고 개인적인 사건부터 각종 미디어를 통해 전해지는 사회적 이슈까지, 그는 자신의 경험을 반영한 회화 작업을 매개로 사건의 관찰자이자 전달자의 역할을 자처한다. 그간 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와 경기창작센터 입주 작가로 활동했으며 서울시 시민청, 문화역서울284, 예술의전당 등에서 작품을 선보였다.

1 묵직한 붓 터치로 독창적 세계를 완성하는 윤석원의 ‘Landscape’.
2 단색화 1세대 대표 작가 윤형근의 ‘Burnt Umber & Ultramarine’.

 

에디터 이영균(youngkyoon@noblesse.com)
사진 K(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