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이 돈다
그 시절이 특히 그리울 때가 있다. 현재가 서둘러 가는 것 같은 연말에는 특히 그렇다. 그럴 때면 턴테이블을 튼다. LP 음반을 통해 흘러나오는 음악에 지난날이 녹아 있어서다.

줄리언 브림

존 윌리엄스
남자의 계절인 12월. 시간의 흐름에 애써 태연한 척 웃지만 시린 바람이 부는 거리를 보고 있으면 어딘지 모르게 헛헛하다. 특히 그 시작이 언제부터인지는 잘 모르지만 어릴 때부터 들어온 크리스마스캐럴이 울려 퍼지면 귀에 익은 멜로디와 함께 자연스레 회상에 빠진다. 사랑하는 사람들, 누군가에게 건네기 위해 고심해서 마련한 선물과 관련한 많은 기억에 대한 것이다. 오랫동안 음악가로 살아온 나의 모든 추억에는 음악이 함께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턴테이블에서 흘러나오던 LP 음반의 음악이었다. 그래서일까? 지난 2월 베를린 영화제를 방문했을 때 레코드 가게에서 CD를 대신해 비닐에 싸인 LP 음반이 매장을 가득 장식하고 있는 것을 보고 눈이 번쩍 뜨였다. 최근 LP 음반이 다시 제작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익히 들어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LP 음반은 이를 광적으로 수집하던 나에게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 얇은 비닐을 조심히 벗기고 번들번들한 앨범 재킷 디자인을 살짝 감상한 뒤 그 속의 LP판을 지문이 묻지 않게 꺼낼 때의 기분이란! 특히 LP판을 꺼낼 때 묘한 화학약품 같은 냄새가 나는데, 그 순간 그렇게도 가슴이 뛰었다. 재킷에서 꺼내 이를 살그미 턴테이블에 올릴 때에도 음반이 상하지 않게 하려고 무척 신경 썼다. 이후 바늘이 LP판에 닿을 때, ‘치~ 치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시작되는 감동은 여전히 잊을 수 없다. 사실 LP 음악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조심스럽다. 그리고 이런 일련의 과정, 즉 음악을 듣기 전 치르는 정성스러운 의식은 음악에 좀 더 심취하고 실체감을 갖게 하는 매력이 있다. 기타에 파묻혀 살아온 내게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어울려 캐롤 대신 즐겨 듣던 음반이 있다. 줄리언 브림(Julian Bream)과 존 윌리엄스(John Williams)의 기타 듀엣 연주 음반 < Together >. 20세기 손꼽히는 기타리스트로 기타의 황금기를 열었다고 평가받는 대가들의 연주 음반이 턴테이블 위를 돌기 시작하면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숨이 멎을 것 같은 행복감을 느꼈다. 그러곤 앨범이 상할 정도로 듣고 또 들었다. 이들은 르네상스부터 근대에 이르는 명곡들을 기타 두 대로 재해석했고, 기타 구조상 독주로 완성하기 힘든 부분을 서로 나누어 연주하며 세상의 그 어떤 악기보다 아름다운 화음과 멜로디의 음악적 호흡을 연출한다. 첫 곡은 마치 아기 예수의 탄생을 알리는 듯한 고귀한 아름다움을 들려주고 두 번째 곡, 론도 역시 캐럴 ‘징글벨’을 연상시킨다. 이어지는 소르의 왈츠는 크리스마스 축제 분위기를 고조시키다 갑자기 이베리아풍의 적막한 코르도바가 분위기를 변환시킨다. 그후에 이어지는 두 곡은 스페인의 정렬적인 분위기로 힘찬 새해를 다짐하는 듯 화려한 느낌을 준 뒤 겨울밤 두 손을 맞잡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듯한 라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이 긴 여운을 남긴다. 줄리언 브림의 극단적인 음색 변화와 존 윌리엄스의 이성적인 음의 대비는 정말이지 최고다. 클래식 역사에 길이 남을 최고의 명반임이 틀림없다.
LP 음반은 이처럼 오래된 추억을 끄집어내 향수를 자극한다. 더구나 손가락 끝의 터치만으로 음악을 즐길 수 있는 시대에 살면서 이렇듯 조심스러운 과정을 거쳐야하는 LP는 같은 음식이지만 담는 그릇에 따라 분위기가 달라지는, 혹은 슬로푸드같은 특별한 경험을 하게 한다. 다가오는 새해는 모두에게 특별하다. 기타와 같은 자유롭고 평화로운 세상을 기원하며.



에디터 서재희 (jay@noblesse.com)
글 이병우(기타리스트, 작곡가) 사진 GettyImages, Shuttersto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