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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가 남긴 숙제

LIFESTYLE

야구 팬들에겐 이 겨울이 추운 날씨만큼 지리하고 기나긴 인고의 시간이다. ‘한국시리즈’가 막을 내린 10월 말부터 새 시즌이 시작하는 3월 말까지 선수들이 열심히 담금질을 할 때 팬들은 ‘하이라이트 다시 보기’로 추억팔이를 하며 오매불망 새 시즌을 기다리기 때문. 물론 그사이 10명의 한국프로야구 감독은 올해도 자신에게 주어진 숙제를 푸느라 여념이 없다. 창원 마산야구장에서 만난 NC 다이노스의 김경문 감독도 그렇다.

NC 다이노스와 LG 트윈스의 정규 시즌 마지막 대결이 펼쳐진 9월 24일 창원 마산야구장. 1 대 3으로 뒤지던 9회 말 NC의 마지막 공격이 시작됐다. 야구라는 것이 본래 9회 말 투아웃부터라고는 하나 이미 9회 초 LG에 역전을 당한 터라 분위기 반전은 쉽지 않아 보였다. 그러나 첫 타석에서 박민우가 안타를 치고 나가자 관중의 엉덩이가 조금씩 들썩이기 시작했다. 이어 용병 스트럭스가 볼넷을 골라 출루하자 눈 깜짝할 사이 그라운드는 무사 1·3루. 그런데 이어진 김준완 타석에서 김경문 감독은 놀랄 만한 작전을 펼쳤다. 바로 최고참 이호준 선수를 대타 카드로 꺼내 든 것. 사실 이호준은 이번 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한 참이었다. 감독이 준비한 깜짝 선물에 이호준은 상대편 투수 정찬헌이 던진 커브볼을 받아쳐 좌중간 담장을 넘겼고, 공은 스탠드 상단에 그대로 꽂혔다. 말로만 듣던 ‘9회 말 대타 역전 끝내기 홈런’이 되어버린 이 진기록을 두고 야구 팬들은 “감독의 믿음에 선수가 화답한 아름다운 장면”이라고 말한다. 이 명장면은 12월 8일 열린 야구인 시상식 ‘2017 카스포인트 어워즈’에서 2017년 시즌 중 가장 인상적인 순간을 꼽는 ‘올해의 카스모멘트’ 후보에 오르며 팬들에게 그때의 감동을 상기시켰다.
공주고등학교와 고려대학교를 졸업한 김경문 감독은 1982년 두산의 전신 OB의 원년 멤버로 활약, 한국시리즈에서 박철순과 함께 팀의 첫 우승을 일군 불굴의 선수였다. 그러나 거듭된 부상으로 선수 생활은 길지 않았고 1991년을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선수로서 본인의 기량을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수용한 그는 바로 지도자 과정을 밟기 시작했고, 1994년 삼성 라이온즈에서 1군 배터리 코치를 맡으며 선수 육성 세계에 발을 들였다. 이어 두산 베어스 1군 배터리 코치를 거친 그는 2003년 말 김인식 감독이 사퇴하면서 그 이듬해인 2004년 두산 감독의 자리에 올랐고 2010년까지 7년간 여섯 차례나 팀을 플레이오프(2·3위전)에 진출시키며 감독으로서 능력을 인정받았다. 2011년 두산 감독직을 그만둘 때까지 구단 프런트는 김경문 감독에게 절대적 신뢰를 보냈으며 그 또한 젊은 선수들을 키워나가며 두산이 ‘화수분 야구’의 대명사로 불리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그의 진가는 2008년에 열린 제29회 베이징 올림픽의 야구 국가 대표팀 감독을 맡으며 확연히 드러났다. 김경문 감독은 “마음 가는 대로, 결과에 대한 두려움 없이 제 맘껏 작전을 펼쳤습니다. 나중에 재방송을 보는데, 내가 무슨 정신으로 저렇게 했나 싶은 게 많았어요. 만약 다시 하라고 하면 절대 못할 것 같습니다”라고 당시를 회상하지만 당시 그가 이끈 국가 대표 야구팀은 본선에서 9전 전승으로 한국 남자 구기종목 사상 최초로 금메달을 따내 국민에게 뜨거운 감격을 선사했다.
대한민국의 유일무이한 ‘전승 올림픽 우승 감독’이란 타이틀을 달면서 일명 ‘국민 감독’이 된 그는 2011년 8월, 3년간 14억 원의 계약 조건으로 NC 다이노스의 초대 감독에 취임했다. 그는 1군 진입 3년 만에 무서운 기세로 NC 다이노스를 포스트 시즌에 진출시켰고, 특히 2016년에는 창단 5년 만에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는 기염을 토하며 한국 야구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창원 마산야구장에서 마무리 훈련 중인 NC 다이노스 선수들. 김경문 감독은 시즌 중 자세히 들여다보지 못했던 2군 선수들을 마무리 캠프로 불러 훈련하는 모습을 관찰하며 2018년 스프링 캠프를 준비한다.

NC 다이노스는 2017년에도 3위 롯데와 0.5게임 차로 정규 시즌 4위를 기록하며 포스트 시즌에 진출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5위와의 와일드카드전, 3위 롯데와의 준플레이오프전을 거치며 투수를 많이 소모한 탓에 플레이오프에서 맞붙은 두산과의 경기에서 최종 3 대 1로 패하며 아쉬움을 남겼다. 플레이오프 경기를 보며 ‘NC 다이노스가 만약 정규 시즌을 3위로 장식했다면 5위와의 와일드카드전은 피할 수 있었고, 그렇다면 투수를 아낄 수 있었으니 두산과의 경기 내용도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가정은 비단 한두 명의 생각은 아닐 터.
“아무래도 선수들이 피로도를 덜 느끼고 경기에 임할 수 있었겠죠. 와일드카드와 준플레이오프 총 6경기를 치르면서 투수와 야수들이 많이 지쳤을 거예요. 포스트 시즌 경기와 페넌트 레이스(정규 시즌 경기) 때 펼치는 144경기의 에너지 소모는 완전히 다릅니다. 선수들이 시합에 임하는 집중력도 엄청난 차이가 있어요. 두산과의 경기에선 불펜이 많이 지친 상태였지만 그래도 한편으로는 젊은 선수들이 포스트 시즌에서 새로운 경험을 했다는 것에 만족합니다.”
NC 다이노스가 이제는 어떤 팀도 만만히 볼 수 없는 상대 팀이 되었다는 것이 솔직한 야구계의 총평. 이번 포스트 시즌에서 두산 베어스에 패하고도 야구 팬들에게 박수와 격려를 받은 건 김경문 감독의 말처럼 2017년 시즌 경기를 통해 새해의 가능성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승패를 겨루는 스포츠다 보니 시즌을 끝내는 마지막 장면은 늘 승리 아니면 패배예요. 마지막 경기에서 지는 팀은 그 시즌의 마지막을 패배의 장면으로 기억하기 때문에 감독 입장에서도 오랫동안 가슴이 짠합니다. 그렇지만 이번 시즌 역시 성과가 있었다고 보는 건 우리 팀이 아직 햇수가 짧은 어린 팀인데도 2014년부터 4년 연속 포스트 시즌에 진출했기 때문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헛된 한 해는 아니었다고 생각하고요. 선수들이 이런 경험과 커리어를 쌓다 보면 조만간 정상 싸움에서도 밀리지 않을 거라고 봅니다.”
한국시리즈까지 모든 경기가 끝나고 각 구단이 마무리 캠프를 진행하던 지난 11월 중순, 야구계에는 또 다른 이슈가 있었다. 일본 도쿄돔에서 열린 ‘아시아 프로야구 챔피언십 2017’에 선동열 감독이 장현식, 구창모, 임기영, 박세웅, 이정후, 구자욱 등의 신진 국가 대표를 이끌고 참가한 것. 한국은 이 경기에서 대만을 상대로 잘 싸웠지만 일본과의 경기에서는 7 대 8, 0 대 7로 참패를 면치 못했다. 선동열 감독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인정했듯 투수의 제구력이 승패를 갈랐다. 그간 국내 투수들이 제구보다 스피드를 앞세워 타자와 승부하려 한 패턴이 국제 경기에서 정작 우리 팀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이번 한일전을 보면 단순히 ‘일본에 졌다’로 마무리하기에는 좀 문제가 있어요. 경기 내용을 보니 그동안 야구 지도자들이 선수를 가르치면서 디테일이 얼마나 부족했는지 확연히 느낄 수 있었거든요. 선동열 감독이 고작 며칠 동안 국가 대표 선수들을 가르쳐 경기에 나간다? 절대 불가능해요. 평소 각 구단의 감독과 코치들이 공부하고 노력해서 자기 팀 선수들을 잘 가르쳐놓아야 합니다. 그래서 저도 이번 경기 후 스태프와 제가 해야 할 숙제에 대해 좀 더 깊이 생각 중이에요.”
선동열 감독이 이끈 이번 국가 대표팀은 젊은 선수를 주축으로 해 그들이 국제 무대 경험을 쌓았다는 의미가 크기 때문에 언론에서도 다행히 한일전 결과에 대한 질책 기사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국민 정서상 한일전은 어떤 감독을 막론하고 심적으로 큰 부담과 압박감을 느끼는 것이 사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준비하던 김경문 감독도 다르지 않았다.
“1차 예선에서 일본에 지고 돌아오는데, 당시 두산 감독으로 있을 때 받던 스트레스는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싶었어요. 예선 한일전을 저는 가볍게 생각하고 갔는데, 막상 경기장에 도착해 분위기를 보니 장난이 아니더라고요. 특히 일장기와 태극기가 나란히 올라가는 순간, 분위기가 180도 달라졌어요. 본선 때는 압박감이 더했어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는 뭘 믿고 그런 대담한 작전을 펼쳤는지… 저는 불교도지만 기도를 자주 하는데, 베이징 올림픽 때 많이한 기도가 ‘제 순간적 판단 미스로 우리 선수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게 해달라’였어요. 다들 중요한 시기였기에 선수들 모두 경기 하나하나에 최대한 집중했고, 제 느낌이 옳다고 판단되면 밀어붙였죠. ‘혹시 결과가 나쁘면 어떡하나, 대타를 내보냈는데 못 치면 어쩌나’ 그런 걱정은 일절 하지 않고 직관적으로 경기를 운영했어요. 지금하라고 하면 절대 못합니다.(웃음)”

창원 마산야구장에서 마무리 훈련 중인 NC 다이노스 선수들. 김경문 감독은 시즌 중 자세히 들여다보지 못했던 2군 선수들을 마무리 캠프로 불러 훈련하는 모습을 관찰하며 2018년 스프링 캠프를 준비한다.

애초 목표인 동메달을 넘어 금메달이라는 기적을 퍼 올린 베이징 올림픽에서 김경문 감독이 맘껏 작전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이승엽, 김동주, 권혁, 이대호, 정근우 같은 베테랑 선수와 류현진, 김광현, 윤석민, 김현수, 이용규 등 20대 초·중반의 젊은 선수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모두 제 역할을 해준 덕분일 것이다. 특히 마지막 쿠바와의 결승전에서 9회 말, 투수 정대현이 병살로 경기를 끝낸 것처럼 큰 경기일수록 투수의 아웃카운트 능력은 경기 전체를 지배하는 법. 그런 의미에서 한국프로야구 2017년 우승팀 기아에 20승 투수가 2명이나 있다는 건 다른 팀에는 부러움의 대상이자 ‘언터처블’ 그 자체가 아닐까? “좋은 투수의 볼을 쳐서 우승하는 건 하늘의 별 따기입니다. 대부분의 우승팀을 보면 좋은 투수가 좋은 타자를 잡아 승리하잖아요. 그만큼 투수가 중요하다는 것이고, 팀 내에 20승 투수가 있다는 건 그만큼 한국시리즈에 갈 확률이 높다는 이야기입니다.”
창단부터 함께한 용병 에릭 해커와 2017년을 마지막으로 이별한 것도 그 연장선이다. 에릭 해커는 2013년부터 NC 다이노스에서 1선발을 맡아온 투수로 2013년 4승, 2014년 8승, 그리고 2015년에는 19승이라는 커리어 하이를 찍으며 팀 성장을 위한 발판을 놨다. 물론 2017년에도 12승, 평균 자책점 3.42로 좋은 활약을 보여주었고, 팀이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데 큰 역할을 했지만 김경문 감독은 2018년에는 새 판을 짜기로 결정했다. “감독은 보통 한 시즌이 끝나면 경기 복기를 하는데, 올해 좀 아쉽다고 느낀 점이 로테이션 부분이었어요. 1선발은 여느 선발(5일 로테이션)과 달리 화요일에 던지고 4일간 휴식 후 일요일에 던지는 4일 로테이션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조금씩 부담스러워하는 게 느껴졌어요. 해커가 4년 동안 팀에서 정말 좋은 성적을 냈고, 우리 선수들도 해커에게 배운 점이 많습니다. 그래서 이번 결정이 더욱 쉽지 않았죠.”
김경문 감독은 내년 시즌을 위해 구단에 이닝이터(선발로 나와 가능한 한 많은 이닝을 막아주는 투수)를 요청했고, 구단은 기존 용병인 에릭 해커와 제프 맨십과의 재개약을 포기하고 새 용병 로건 베렛을 영입했다. 다른 한 명의 용병도 현재 부지런히 물색 중. “시즌을 마치면서 아쉬운 부분도 있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기쁨도 있어요. 구창모 선수가 선발투수로 잘해주었고 장현식 선수도 선발 가능성을 봤기 때문에 내년 시즌이 무척 기대돼요. 이제 2명의 용병 투수가 이닝이터만 해주면 될 것 같습니다.”
감독의 능력은 코칭 스태프의 능력과도 직결된다. 신생 팀이던 NC 다이노스가 이제 가을 야구가 당연해진 데에는 김평호 수석 코치 이하 코칭 스태프들, 그리고 프런트와의 단합이 한몫했다. 김경문 감독은 특히 스카우터를 칭찬한다. “NC 다이노스가 어린 팀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팀에서 가볍게 보지 못하게 된 배경에는 능력 있는 스카우터가 있다고 봅니다. 고등학교 야구팀을 따라다니면서 많은 경기를 보는 부지런한 스카우터들이 좋은 선수를 잘 뽑아 데려오거든요. 제가 그 혜택을 많이 받았죠.“ 실제로 김수경 스카우터는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오전 9시부터 밤늦게까지 하루에 4경기씩 보는 날도 있다. 선수별로 기량을 체크하고 특이 사항을 기록하고 영상까지 찍어야 하기 때문에 상당한 집중력을 요구한다”며 “NC 다이노스는 구단 육성 시스템이 잘 갖춰진 팀이다. 무엇보다 김경문 감독님이 선수들에게 적절한 긴장감과 목표의식을 심어주신다”고 설명했다. 올해로 감독 15년 차에 접어든 그는 2월 1일부터 3월 8일까지 미국 남서부의 애리조나주 투손과 서부의 LA에서 스프링 캠프를 진두지휘한다. 캠프에는 약 50명의 선수를 데려간다. 현재 NC 다이노스에는 1군과 2군, 군대에 있는 선수까지 더하면 약 90명의 선수가 합류 중. 그래서 지난 11월에 이어진 마무리 훈련은 매우 중요한 과정이었다. 마무리 훈련을 통해 김경문 감독이 스프링 캠프에 데려갈 선수를 선별하기 때문. “감독이 가장 조심해야 하는 시기가 바로 지금이에요. 1.5군과 2군 선수들은 스프링 캠프에 합류하느냐 아니냐가 선수 생활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거든요. 제 판단 하나에 선수의 운명이 달렸다고 생각하면 명단 선별에 정말 긴 시간 고민할 수 밖에 없습니다.”

현재 KBO 감독 중 가장 연장자임에도 이름의 마지막 글자 ‘문(moon)’을 따 ‘달감독’이라는 ‘달달한’ 별명으로 불리는 김경문 감독. 1년 내내 승부의 세계를 강요받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기장에 애국가가 울리는 순간 그의 가슴은 다시 설렌다. 우승은 하늘이 결정하는 것이고, 더 열심히 노력한 자에게 승리가 돌아가는 거라고 믿기 때문에 그간 쭉 준우승에 머문 것이 더욱 큰 가슴앓이였을 그는 NC 다이노스와 7년을 함께했고 올해 재개약 마지막 해를 맞았다. 6년 전 팀 창단 당시 총각이던 선수들은 대부분 아기 아빠가 되었고, 김경문 감독도 어느새 나이의 앞자리 수가 바뀌었다.
“저로서는 NC 다이노스라는 팀을 맡은 것이 굉장한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2011년에 제가 감독직을 수락하고 만난 자리에서 구단이 “5년 뒤에 꼭 4강에 들자”고 하길래 “왜 5년이냐, 구단과 스태프가 열심히 하면 더 빨리 4강에 들 수 있다”고 했어요. 그 이야기를 듣고 구단에서 열심히 지원해주셨고 코칭 스태프들도 선수 육성에 최선을 다해 정말 창단 3년 만에 4강이라는 기적을 일궈냈죠. 이렇게 한마음으로 가다 보면 성적은 자연히 따라오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제 마지막 목표도 여기서 이루어지지 않을까요?”

 

에디터 김이신(christmas@noblesse.com)
사진 J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