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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끝이 짜르르할 때

LIFESTYLE

100세의 노화백은 2시간 넘게 이어진 인터뷰 내내 기자에게 몇 번이고 당부했다. “실례지만 짝퉁이 되지 않길 바랍니다.” 김병기 화백은 남을 베끼는 것보다 더 무서운 짝퉁이 바로 자기 자신을 모방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가 이번 개인전 <백세청풍: 바람이 일어나다>에서 과거의 그림이 아닌, 오늘의 그림을 내보인 이유다.

한국 추상미술의 문을 연 김병기 화백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그간 그의 이름은 이중섭, 김환기, 유영국 작가의 이름에 어떤 의미로든 가려져 있었다. 특히 같은 해에 태어난 동갑내기 이중섭과는 의도치 않게 사람들의 입에 늘 같이 오르내렸다. 지금껏 수차례 개인전과 회고전을 하면서 만난 기자들의 질문에는 늘 이중섭이 있었고, 그 일화에 얽힌 추억과 단상을 묻는 질문이 빠지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린 개인전 기자회견장에서는 그가 직접 나서서 “내 건강에 관한 질문, 그리고 이중섭에 관한 질문은 안 받겠다”며 “내 작품에 집중해달라”고 부탁하기까지 했다.
사실 김병기와 이중섭은 같은 평양 출신에, 도쿄 유학 시절 문화학원과 아방가르드양화연구소 등에서 함께 진취적인 미술 운동을 한 미술 동지였다. 둘은 매우 절친했고, 이중섭이 40세의 나이로 요절했을 때 “6·25를 대변하는 작가는 파리나 일본에서 활동하는 한국 작가가 아니다. 큰 캔버스에 큰 붓으로 그리는 작가가 아니다. 바로 이중섭이다. 재료를 살 돈이 없어 담배 은박지에 그림을 그린 그야말로 당시 한국을 대변하는 리얼리티의 중심 인물이다”라고 높이 평가한 이가 김병기 작가였다. 이중섭만큼 가깝게 지낸 김환기 작가에 대한 리뷰를 쓰면서는 “김환기의 대표작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우주’ 등 단색 톤의 점으로 가득 채운 전면점화의 점은 죽은 친구들을 생각하며 찍은 것이다. 그는 마치 목탁을 두드리는 기분으로 하나씩 점을 찍어나갔다”며 고향과 가족, 친구를 향한 그리움을 숭고한 문장으로 그려낸 이도 김병기 작가였다.
이중섭, 김환기와 누구보다 가까이 지냈고, 그들의 공적을 알리기 위해 친구들의 이야기를 자주 해온 그였으니 유명을 달리한 작가들에 대해 질문 공세를 퍼붓는 기자들의 행동도 조금은 이해가 간다. 그러나 김병기 작가는 이번만큼은 자신의 개인전에 집중된 질문을 원했다. 그것은 ‘오늘의 그림을 그리는 나’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강한 욕구의 다른 표현이었다.
“이중섭은 1956년에 죽었어요. 마흔 살의 나이였습니다. 시기적으로 볼 때 이중섭은 추상으로 들어가기 전의 사람이에요. 나는 그보다 60년을 더 살았어요. 60년에 해당하는 가혹한 현실이 나에겐 있다고. 그동안 나는 추상을 지나 다시 형상을 찾는 중요한 과정을 겪었어요. 다시 말하면 나는 오늘의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에요.” 이중섭이 이중섭대로 가치가, 김환기가 김환기대로 가치가 있듯, 김병기의 작품에도 그만의 가치가 있다는 말이다.

바람이 일어나다, 2016, Oil on Canvas, 162 x 112.1cm
ⓒ 가나아트센터

1916년 평양에서 태어난 김병기 작가는 고희동, 김관호와 함께 한국에 서양화를 들여온 1세대 작가 김찬영(1893~1960년)의 아들이다. 그는 아버지를 이렇게 기억한다. “고희동, 김관호, 김찬영 세 분은 각각 1915년, 1916년, 1917년에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했어요. 그분들의 초상화 작품을 보면 각각 달라요. 고희동 작가 그림에는 갓 쓴 사람이, 김관호 작가 그림에는 털모자를 쓴 사람이 나와요. 우리 아버지 그림에는 모자를 쓰지 않은 사람이 등장해요. 그걸 보고 미술평론가 김현숙 씨는 우리 아버지를 한국 미술 모더니즘의 첫 인물로 꼽았다고.” 당시 그의 아버지는 서울에 있었고, 그는 평양에 계신 할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그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매우 관능적인 모습인 데 반해 어머니는 기독교의 영향을 많이 받은 분이었다. 그래서 김병기 작가는 자신을 ‘관능주의와 순수주의가 함께 내재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 둘이 싸우는 것이 김병기 작품의 바탕이라고.
할아버지 밑에서 신식 교육을 받은 그는 일본 가와바타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김환기가 다니던 아방가르드양화연구소에 입소, 초현실주의와 추상미술 등 1930년대 신흥 미술을 흡수하고 새로운 미술 사조 운동에 본격적으로 가담했다. 스물세 살이던 1939년 다시 평양으로 귀국해 북조선문화예술총동맹 산하 미술동맹 서기장을 지낼 때, 1945년 프랑스 시인이자 사상가인 폴 발레리가 사망하자 평양 집에서 문인과 화가, 음악가들과 함께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추도식을 열고 그의 시를 낭송하는 자리를 만들며 작가로서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다. 평양에서 해방을 맞고 북한 미술의 중심부에서 시대를 이끌었지만 결국 1947년 월남해 한국문화연구소 선전국장과 종군화가단 부단장을 역임했다.

누드 습작 B, 2015, Oil on Canvas, 130.2 x 97cm
ⓒ 가나아트센터

가나아트센터 맞은편에 자리한 작가의 평창동 작업실 풍경

‘행동하는 예술가’의 표상이던 그가 한국 미술계에 이슈를 터뜨린 건 1953년 부산 피란지 남포동 다방에서 피카소에게 보내는 편지 ‘피카소와의 결별’을 발표하면서. 30명의 문화 예술인이 모인 이 퍼포먼스는 피카소가 한국전쟁을 그린 ‘조선의 학살’에 대한 우리 예술가들의 결의를 적은 비평문 형식의 작품이었다. “내가 피카소를 아주 존경하던 사람이에요. 도쿄에 있는 아방가르드양화연구소에 입소한 것도 피카소와 어울려 전위미술을 하다 귀국한 후지타 쓰구하루 선생이 거기에 있어서였어요. 피카소가 그린 ‘조선의 학살’은 사실과 좀 달라요. 먼저 전쟁을 일으킨 북한이 전세가 불리해지면서 그 책임을 참전 미군에게 전가한 거라고. 그러니 미국의 양민 학살을 그린 ‘조선의 학살’이 내 눈에는 얼마나 뚱딴지 같았겠어요. 그래서 편지를 썼지.” 그것은 제목만 편지였을 뿐 피카소론(論)에 가까운 비평이었다.
“그 글을 읽어보면 내가 얼마나 피카소에 대해 깊이 들어갔는지 알 수 있어요.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피카소가 공산주의자라 공격한 게 아니라고. 정치적 성향은 자유예요. 나는 피카소의 관념을 지적한 거라고. 피카소 같은 대작가가 자기 관념에 따라 그림을 그린 것에 대한 실망, 거기에 대한 결별이었어요.” 김병기 작가는 그때나 지금이나 관념을 직접적으로 작품에 표현하는 것에 큰 거부감을 느낀다. “관념이나 개념을 바탕으로 한 작품은 죽은 작품이에요. 그런데 많은 작가가 그것을 바탕으로 그려요. 전 세계가 다 그래요. 양식화된 것을 가지고 그 안에서 그리고 있다고.”이 일을 계기로 그는 서울대학교에서 “예술론을 대학 강단에서 강의 해달라”는 제안을 받아 교단에 서게 됐고, 1954년 서울예술고등학교 설립 당시 미술과장으로 자리를 옮기며 미술 조기 교육에 앞장섰다. 다시금 그가 인생의 터닝 포인트를 맞은 건 1965년 3대 한국미술협회 이사장으로 일하던 당시 상파울루 비엔날레 심사위원으로 참가했을때다.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내가 박서보, 김창렬, 정창섭 작가를 소개했어요. 그들의 새로운 태도를 세계 미술계에 알리고 싶었거든. 파리에서 활동하던 고암 이응로와 서울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던 조각가 김종영, 그리고 권옥연과 이세득도 같이 데려갔어요. 거기서 이응로가 명예상을 받으면서 좋은 결과를 얻었죠. 문제는 그랑프리였어요.” 그에게는 그랑프리 작가 투표권이 있었는데, 후보에 오른 헝가리 출신 작가 빅토르 바사렐리(Victor Vasarely)를 데리고 온 프랑스 측에서 바사렐리를 뽑아줄 것을 부탁한 것.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전쟁을 겪고 폐허가 된 나라에서 온 심사위원이 기하학적 색면 구상을 그린 바사렐리에게 표를 준다는 건 스스로의 양심에 어긋났다. 오히려 다른 쪽 후보인 알베르토 부리(Alberto Burri)의 작품에 마음이 갔다.
“외과의사였던 부리는 이탈리아 군대 군의관으로 복무하던 중 텍사스에서 전쟁 포로로 수감되었어요. 포로수용소에서 마대 꿰매는 일을 하다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오래된 삼베와 불에 그을린 나무 등을 이용한 콜라주 작품을 선보이며 작가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삼베를 꿰매다 보면 바늘 구멍 자국이 나는데 그것이 전쟁의 상처를 의미했어요.” 그는 결국 알베르토 부리를 뽑았고, 바사렐리와 부리는 공동으로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아내는 내가 그림에 사인하는 걸 무척 좋아했어요. 그림이 완성되었다는 뜻이니까. 돈이 되거든.(웃음) 사인을 하면 “우리 스테이크 먹으러 갈까?” 이래요. 가끔 내가 먼저 랍스터 생각이 나면 그림 그리던 중간이라도 사인을 쓱 해요. 그날은 외식하는 날이에요. 그리고 다음 날 아내 모르게 사인을 쓱 지워요. 그래서 어떤 작품은 사인만 서너 번 한 적도 있어요.

그의 인생을 바꾼 일은 그다음에 벌어졌다. 상파울루에서 일정을 잘 마 무리하고 한국에 귀국하기 전 세계 미술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잠시 뉴욕에 들렀는데, 그게 그만 발목을 잡은 것. “전 세계가 전쟁을 겪으면서 미술계는 뜨거운 추상 작품으로 가득했어요. 1945년부터 20년 넘게 뜨거운 추상이 주를 이루었죠. 그런데 뉴욕에 가보니 그게 아닌 거예요. 세계적 작가들은 이미 전쟁의 상처를 벗어나 옵티컬한 색면 추상, 그중에서도 이브 클랭 같은 작가는 차가운 추상을 선보이고 있더라고요.”
평면을 탈피한 작품, 산업사회와 물질문명을 비판하는 작품, 미술의 본질에 질문을 던지는 이브 클랭의 작품은 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바넷 뉴먼과 프랭크 스텔라 등 동시대 작가들의 변화 또한 직접 확인한 그는 작품 활동에 대한 욕구가 더욱 치솟았다. 이대로 한국에 돌아간다면 예전처럼 감투나 쓰고 펜이나 들 것이 뻔했다. ‘미술을 공부한 건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였지 감투를 쓰기 위해서가 아니었다’라는 결론에 이른 그는 뉴욕 주의 한가한 시골 동네 새러토가에 정착해 본격적인 작업을 시작했다.
한국 추상이 부흥하던 시기에 서울에서 활동을 시작한 그는 추상회화를 선보이며 비형상성에 매달렸지만 미국에선 아니었다. “미국에서도 처음엔 비형상을 그렸어요. 그런데 이렇게 그리면 몬드리안같이 보였다가 저렇게 그리면 칸딘스키같이 보이는 거예요. 작품은 자연에서 소스를 얻어야 하는 건데 마치 학문처럼 과거의 사람에게서 영감을 얻게 되더라고요.” 과학과 수학은 어떤 사람의 학설을 뒤집거나 전진시켜 새로운 학설을 발견해내는 것이 목적이지만 미술은 아니다. 다른 작가를 의식하면 안 된다. 학문은 진화하는 것이고, 미술은 변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뉴욕 미술계에 흡수되어야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찾는 데 집중했다. ‘나는 누구인가’를 탐구하기위해 그가 선택한 방법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의 것을 그리는 것이었다. 뉴욕과 LA, 그리고 인왕산이 너무 그리고 싶을 때는 서울에 머무르며 주변의 풍경과 인물을 그렸다. 각각 장소와 풍경은 달랐지만 ‘내가 처한 환경에서 그림을 그린다’는 점은 같았다. “피카소가 녹음을 산보한 후 그리는 그림은 녹음과 관계가 있다고 했어요. 직접 푸른 녹음을 그릴 수도 있고, 아니면 너무 푸른색만 보고 왔으니 빨간색이 그리워 빨간 물감으로 녹음이란 제목의 작품을 그릴 수도 있겠죠. 그렇지만 그건 모두 녹음과 관계가 있어요. 이렇듯 그림은 모두 다르지만 내가 처한 자리에서 보는 나의 태도는 결국 같은 것입니다.”
새러토가에서 그는 추상과 비형상을 지나 다시 형상을 찾는 작업에 몰입했다. 한국전쟁으로 이데올로기의 혼돈을 겪으며 한국의 근대화와 현대미술의 변화를 체험한 그의 작품에는 면과 선, 현실과 이상, 형상과 비형상이 나란히 등장한다. 서로 다른 이질적인 것이 함께 자리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진다. 이번 개인전에서 선보인 작품도 그렇다. 갈대의 꺾인 잎, 바람의 결, 움직이는 초상 등을 그려낸 선은 어떤 면에선 자유분방하지만 동시에 마치 자로 잰 듯한 반복성과 규칙성이 공존한다. 선과 선이 만들어내는 공간에서 오는 의미를 그리는 김병기 작가는 예술이란 원초적인 선과 면에 대한 탐구가 있어야 한다고, 그러기 위해 “시각예술가들은 무엇보다 많이 보기에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일례로 잠실에 있는 딸의 집을 방문할 때 지하철을 이용하는 것도 비슷한 이유다. 지하철이 자동차보다 빠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 안에서 사람 구경하며 순간순간 다양한 점을 발견하고 그것이 만들어내는 에너지를 느낄 수 있기 때문. “지하철을 타면 사람을 많이 볼 수 있어요. 특히 젊은 사람들. 50년을 미국에 살면서 외국인을 아주 많이 봐왔지만 요새 내가 보는 젊은 한국인들의 표정은 전 세계 어느 민족과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아요. 기가 살아 있다고. 그런 젊은 사람들의 움직임을 보고 있으면 건강한 에너지가 느껴져요. 그것이 내 작품에 들어오면 당당한 선이나 속도감으로 형상화되죠.”
이를 작업에 반영하다 보니 이야기 또한 풍성하다. 대표적 작품이 ‘웨체스터에서의 독백’(1998). 죽은 아내를 생각하며 그린 그림이다. “우리 집은 웨체스터라는 동네에 있었어요. 아내는 오래전부터 당뇨로 고생을 했는데 담낭에 암세포로 보이는 것이 있다고 해 검사를 하고 기다리던 중이었죠. 하루는 동네 고등학교로 아내와 산보를 나갔는데 플라타너스나무가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가만 보니 껍질이 벗겨진 자리가 마치 사람의 피부 같았어요. 검사 결과가 나오고, 아내는 석달 뒤 죽었어요. 그 후에 아내를 생각하며 그림을 그리는데 그때 본 플라타너스가 생각나더라고.”

새러토가의 호수, 1978, Oil on canvas, 121 x 90cm
ⓒ 가나아트센터

김병기 작가가 이번 전시의 대표작으로 꼽은 건 ‘바람이 일어나다’(2016)와 ‘살아야 한다’(2016)라는 두 작품. 그러나 전시장을 천천히 한 바퀴 돌고 나면 눈에 밟히는 작품은 따로 있다. ‘흰 삼각형 속의 나부’, ‘누드 습작 A’, ‘누드 습작 B’ 등의 누드 시리즈. “누드를 서양식으로 그리는 건 의미가 없어요. 서양 사람들이 수백 년 동안 그려온 누드를 어떻게 내가 더 잘 그릴 수 있겠냐고. 그래서 나는 내 식으로 그렸어요. 그런데 작품이 완성되어가는 것을 보던 가나아트의 이호재 대표가 ‘바탕색을 칠해야 하지 않습니까?’라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이 작품에서 배경을 칠하는 순간 그건 장식이 돼요.”
그는 작품의 마지막은 늘 열어두는 편이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자주 언급하는 음악가가 슈베르트예요. 베토벤, 모차르트, 바흐가 아니라 슈베르트를 좋아하는 이유를 ‘미완성의 매력을 높이 평가하기 때문’이라고 하더라고. 다른 음악가에 비해 유독 미완성 교향곡이 많잖아요. 미술도 마찬가지예요. 똑 떨어지게 완성한 작품은 이미 기성이에요. 생각할 겨를을 안 준다고. 그러니 재미가 없어요. 그래서 하루키처럼 나도 미완성을 좋아해요. 완성도가 떨어지는 미완성이 아니라 이 뒤에 뭔가 더 있을 것 같은 느낌의 미완성 말이에요. 보고 또 보게 되는 그런 거.”
그럼 ‘미완성의 완성’ 시점은 언제일까? “만인이 박수를 쳐도 내가 불만일 때가 있어요. 만인은 안 돌아봐도 내가 좋을 때가 있고. 어느 쪽도 좋다고 할 수는 없어요. 가장 좋을 때는 코끝이 짜르르할 때예요. 여기 있는 작품들은 모두 내 코끝이 짜르르할 때 멈춘 거라고.”

에디터 | 김이신 (christmas@noblesse.com)
사진 | 안지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