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에 ‘배틀’을 붙였더니
장르와 형식을 파괴한 새로운 클래식 공연이 늘고 있다. 새로운 관객 발굴에 초점을 맞추니 거짓말처럼 정말 관객이 따라왔다.
‘피아노 배틀’의 두 피아니스트 안드레아스 컨과 폴 시비스
“저희가 연주하면, 누가 더 나은지 여러분이 결정하는 겁니다.” 지난 5월 2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2명의 피아니스트가 두 대의 피아노 앞에 각각 섰다. 안드레아스 컨(Andreas Kern)의 연주는 공격적이었고, 폴 시비스(Paul Cibis)의 연주는 우아했다. 첫 라운드에서 둘은 쇼팽과 스크랴빈의 곡을 차례로 연주했다. 관객은 둘의 연주가 끝나자마자 입장할 때 받은 검은색과 흰색 종이를 각각 한 장씩 들어 승자를 정했다. 첫 라운드의 승자는 좀 더 역동적인 연주를 선보인 컨이었다. 이날의 피아노 대결은 총 7라운드. 관객은 연주를 즐기고 승자를 가리는 데 몰두하는 사이 자신도 모르게 클래식을 즐기는 방법을 터득해나갔다. 배틀 연주회의 결과는 4개의 라운드를 거머쥔 안드레아스 컨의 승리. 하지만 패자는 따로 없었다. 연주가 끝난 공연장 밖에서 진작부터 걸 그룹 인기에 버금가는 두 사람의 사인회가 벌어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렇게 두 대의 피아노를 두고 연주하는 ‘피아노 배틀’ 하면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이 떠오른다. 사실 이 영화에서 피아노 배틀은 낭만적이다. 첫 번째로 연주하는 곡은 ‘흑건’으로 쇼팽의 연습곡 중 하나다. 오른손의 모든 음표가 단 하나를 제외하고 검은 건반만 연주하기 때문에 이렇게 불린다. 영화에선 흑건으로 치다 흰 건반을 주로 연주하는, 일명 ‘백건’으로 불리는 편곡을 추가한다. 주인공 저우제룬은 상대가 연주하는 곡을 듣고 바로 그대로 쳐낸다. 두 번째로 연주하는 곡 ‘왈츠’는 쇼팽의 왈츠 중 가장 유명한 곡. 이 곡도 저우제룬은 상대방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연주한다. 심지어 세 번째 곡은 아예 한 손으로 친다. 가능하지 않을 것 같은 연주를 가능하게 소화한다. 연주가 끝나자 저우제룬을 에워싸고 있던 학생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한다. 이 영화는 최근 더 업그레이드된 영상과 풍성한 음향의 디지털 리마스터링 버전으로 국내에서 재개봉해 예전과 다름없는 인기를 끌었다.
피아노 한두 대를 놓고 2명 이상의 피아니스트가 실력을 겨루는 ‘피아노 배틀’은 독일 출신 피아니스트 안드레아스 컨과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 폴 시비스가 2009년부터 선보인 고유의 연주 프로그램명이기도 하지만 수려한 피아노 연주 솜씨와 즉흥곡을 만들어내는 능력 등으로 서로의 실력을 가늠하는, 이미 대중화된 피아노 연주의 새 장르이기도 하다. 연주자들은 악보도 보지 않고 다양한 스타일의 곡을 섭렵하고 경쟁해 관객에게 쾌감을 선사한다.
세계적으로 피아노 배틀 열풍을 일으킨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
피아노 배틀은 이렇게 준비된 투표 용지를 들어 승자를 가린다.
흔히 클래식이라고 하면 엄숙한 분위기에서 숨죽여 들어야 하는 고상한 음악이라는 편견이 있는데, 최근의 이 같은 피아노 배틀 공연은 결코 얌전을 떨지 않는다. 대형 연주회를 제외하곤 늘 소수의 고정 클래식 팬만으로 겨우 무대를 이어간 클래식 음악계에 과감한 ‘틈새 전략’을 선보인 것. 국내에 처음 안드레아스 컨과 폴 시비스의 피아노 배틀을 소개한 스톰프뮤직의 김민경 팀장은 “기존 클래식 팬뿐 아니라 좀 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공연을 소개하기 위해 피아노 배틀 무대를 준비했다”고 전했다.
물론 피아노 배틀 같은 클래식 음악계의 고정관념 파괴 공연이 꾸준히 인기를 끌다 보니 한쪽에선 어떻게 예술의 우열을 가리느냐는 반문의 소리도 들려온다. 하지만 거기엔 이런 대답이 효과가 있었다. 이미 목청 좋은 가수들을 한 줄로 세우고 순위를 매겨본 적 있는 우리 관객이 무엇인들 못하겠느냐는 다소 농담 섞인 반문. 사실 국내에서 피아노 배틀이 인기를 끈 데엔 ‘승리자 구도’도 한몫했다. 현장에서 관객의 투표로 승자를 정하는 방식은 지난 몇 년간 이미 많은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국내 관객도 익숙한 시스템. 또한 손에 땀을 쥐게하는 즉흥 연주 대결은 ‘소비자’를 만족시키기 위한 최선의 노력으로 온전히 평가되었다. 그 때문인지 지난 5월 한 달간 서울과 경기도 일대에서 열린 단 세 차례의 피아노 배틀은 수천 명에 달하는 관객이 들어 크게 흥행했고, 공연 주최 측에선 벌써부터 또 다른 형태의 피아노 배틀 공연을 준비 중이다.
물론 그것과 별개로 국내의 크고 작은 공연장에서 국내 피아니스트들의 배틀 공연을 꾸준히 준비할 예정이다. 바로 얼마 전(6월 12일)에도 피아니스트 박진우와 재즈밴드 프렐류드의 리더 고희안이 클래식과 재즈를 재해석하며 서로의 실력을 뽐내는 ‘비트윈 더 피아노’가 관객몰이를 했고, 올여름(8월) 개관 20주년을 맞이하는 인천 서구문화회관에서도 제임스 문·방기수·김지훈·신영주로 이뤄진 젊은 피아니스트 그룹 앙상블 클라비어가 네 대의 피아노로 배틀 무대 ‘4Men 8Hands’를 선보인다. 한마디로 피아노 배틀이란 새로운 형식의 클래식 무대가 이미 대중화되어 관객을 찾고 있는 것.
다양한 연출로 ‘보는 음악’에도 신경쓰는 피아노 가이즈
사실 지금의 피아노 배틀 외에도 클래식 음악계의 고정관념 파괴 공연은 그간 우리 공연계에 꾸준히 존재해왔다. 지난 4월에 내한한 그룹 피아노 가이즈는 영화 <스타워즈>를 패러디해 광선 뿜는 활로 첼로 배틀을 벌이는 ‘첼로 워즈’,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의 ‘렛잇고’와 비발디 사계의 ‘겨울’을 교묘히 섞은 곡 등으로 유명세를 떨치며 국내 첫 내한 공연도 성공적으로 마쳤고, 지난해의 ‘클래식 & 락 심포니’는 순수 클래식과 대중적 록의 컬래버레이션으로 많은 록과 클래식 마니아에게 지지를 받았다. 정리해보면 자칫 딱딱하게 들릴 수 있는 클래식 공연이 점점 나긋나긋한 다양성과 만나 갈수록 관객몰이를 하고 있다는 훈훈한 얘기.
최근 다양한 형태로 이어지는 클래식 음악계의 장르 파괴 트렌드는 무엇보다 새로운 관객 발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특히 20~30대의 청년층과 가족 단위 관객을 흡수해 클래식 시장의 저변을 넓히기 위한 업계의 마케팅 전략과 맞물린 것. 다시 말해 지금 클래식 공연계의 고정관념 파괴 무대는 그저 음악만 소비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관객이 직접 공연을 하나의 문화의 장으로 누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갈수록 음반을 사는 사람은 줄고, 음악회 청중도 노령화되고 있다. 요 근래 선보이는 클래식 음악계의 새로운 시도는 감상 환경을 바꿈으로써 음악 장르 간 벽 허물기 또한 가능하게 한다. 전통과 현대의 결합,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융합, 장르 간의 끈적한 협력이 디지털 시대의 가장 주목받는 아이템으로 떠오른 이때, 장르의 구분이 대체 무슨 소용일까? 클래식 음악계의 고정관념 파괴 공연이 앞으로도 다양한 무대를 실험하는 것은 물론 더 많은 관객을 끌어왔으면한다.
에디터 이영균 (youngkyoon@nobless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