킨포크 라이프와 어른의 인생 수업
서울에서 잠시 즐겨본 킨포크 라이프와 진짜 어른의 인생을 배우는 인생 학교 이야기.
수제 도마 사용기 Editor 이영균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오피스텔로 독립해 내가 가장 먼저 한 것은 ‘도마’를 사려 한 일이다. 사실 난 오래전부터 작은 나무 도마 위에 고소한 치즈 몇 조각과 달콤한 달걀 쿠키를 올려놓고 지는 해를 바라보며 맥주를 마시는 꿈을 꾸던 로맨티스트다. 본가에서 가져온 벨기에산 수제 맥주와 아오야마에서 산 근사한 맥주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으니, 이제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은 감동적인 나뭇결과 내추럴한 우드 향이 환상적인 조화를 이룬 원목 도마를 공수해 인테리어를 ‘완성’하는 것이었다.
한데 그런 완벽에 가까운 도마를 찾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어떤 도마는 빛깔은 좋은데 향이 별로고, 어떤 도마는 향과 형태는 좋은데 나뭇결이 방정맞았다. 그러다 결국 도마 구입을 포기하고 ‘내가 쓰는 도마는 내가 직접 만들겠다’는 원대한 꿈을 안고 곧장 그것을 알려줄 클래스를 찾아 나섰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데엔 분명 ‘집방’ 열풍도 한몫했다. 근데 엄밀히 따지면 이런 생각은 내가 수년 전부터 꿈꾼 삶에 더 가까웠다. 가치 소비를 중시해 간단한 도구는 직접 만들어 쓰는 유유자적한 삶.
다음 날 저녁, 나는 서울 문래동의 한 작은 공방에서 어른 팔뚝만 한 크기의 물푸레나무 한 조각을 들고 앉아 있었다. ‘소목장 세미’의 유혜미 대표는 이날 나를 ‘식빵용 나무 도마 만들기’ 클래스의 심오한 세계로 초대한 목공계의 여제다. 그녀가 추천한 물푸레나무는 나뭇결이 곱고 단단한 데다 탄성까지 좋아 집에서 사용하는 원목 도마의 재료로 안성맞춤이었다. 그건 그렇고 결론부터 말하면, 목공소에서 직접 도마를 만드는 일은 생각보다 중노동이었다.
이날 나는 제일 먼저 펜으로 만들고 싶은 도마의 도안을 나무 위에 그렸다. 이후 시간을 들여 직소기(나무판자 등을 자르는 공구)와 조임쇠(작업대에 나무를 고정하는 공구)의 사용법을 익혔다. 미리 표시해둔 펜을 따라 나무를 자르는 일은 꽤 집중력을 요했다. 결국 나무를 도마 모양으로 완벽히 절단하는 데만 30분이 걸렸다. 한데 그즈음 매캐한 톱밥 냄새로 가득 찬 실내 공기가 내 눈과 코에 슬슬 고통을 주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고통이야말로 목공의 진정한 매력이라 믿으며 눈치도 없이 흐르는 콧물을 몇 번이고 앞치마로 닦아냈다. 그러다 최초의 나뭇조각이 어느덧 도마의 모양새로 변신하자 ‘진정한 인고의 시간’이라 불리는 사포질을 시작했다. 사포질을 마치고 도마 위에 직접 짠 호두기름을 바르니 총 3시간 30분이라는 시간이 흘러 있었다. 어찌 됐든 도마는 완성됐고, 나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성취감을 안고 도마를 조심스레 봉투에 담아 조수석에 태워서 집으로 모셔왔다.
그날 밤, 오븐에 갓 구운 치즈 식빵을 아까 만든 도마 위에 올려놓고 맥주를 한 캔 땄다. 뉘엿뉘엿 지는 해를 바라보며 마음의 안정을 찾았지만, 이내 경악하며 고함을 지르고 말았다. 오븐의 뜨거운 열기를 품은 치즈 식빵이 나의 소중한 원목 도마 위에 그만한 크기의 얼룩을 남긴 것이다. 맥주와 황혼, 치즈 식빵까지 모든 것이 완벽했지만, 식빵 자국이 모든 걸 망쳐놨다. 나 자신을 비웃으며 아까 딴 맥주를 꼴깍꼴깍 목으로 넘겼다. 그리고 생각했다. 느린 삶의 기쁨을 재발견하고자 ‘킨포크 라이프’를 즐기는 남자들같이 나무 도마 위에 식빵과 쿠키를 올려놓고 삶을 음미하는 일은 어쩌면 서울 남자에겐 어울리지 않을지 모른다고. 서울 남자에겐 막 만든 도마를 며칠 동안 말린 뒤 사용할 만한 여유가 없다고. 나는 이 시간, 도마 위에 다시 호두기름을 바르며 여전히 킨포크 라이프를 꿈꾼다.
2층짜리 주택 건물을 개조한 인생학교 서울
2층짜리 주택 건물을 개조한 인생학교 서울
영국 런던 마치먼트 거리에 위치한 인생학교 1호점
인생을 배웁니다 Editor 임해경
책 <인생 학교>의 저자 중 한 명인 철학가이자 작가 알랭 드 보통은 예술·교육·문화계 전문인과 함께 런던 마치먼트 거리에 프로젝트 학교 ‘The School of Life’를 세웠다. 2008년 오픈 이래 정신, 사랑, 돈 등 균형 잡힌 삶을 위해서라면 한 번쯤 고민해야 할 주제를 바탕으로 강연과 토론, 소규모 커뮤니티 등의 프로그램을 진행해왔다. 어른이 된 뒤 삶에 대한 고민이 더욱 많아진 나는 이 인생 학교에 직접 참여하기 어려운 아쉬움을 책으로 달래야 했다. 지난해 10월 ‘인생학교 서울’이 오픈했을 때 기대감을 감출 수 없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인생은 언제나 어렵고 고달프니까!
인생학교 서울 분교에서는 런던 본교에서 개발한 커리큘럼 중 ‘일에 얽매여 살지 않는 법’, ‘대화 잘하는 법’, ‘죽음,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등 한국 정서와 현실에 맞는 16개 정규 수업을 진행 중이다. 조수용(JOH 대표이사), 하지현(정신건강의학과 교수), 김지윤(좋은연애연구소 대표) 등 문화·예술·사회·교육 등 각 분야의 명사가 강의한다.
여러 수업 중 내게 가장 절실한 건 ‘창의적인 사람이 되는 법’. 디자인 칼럼니스트이자 전 대림미술관 부관장인 김신 선생의 수업이다. 수업 하루 전날 몇 가지 사전 과제가 담긴 이메일 한 통이 왔다. 질문에 따라 내가 언제 창의적이었고, 창의적이지 못했는지 떠올렸다.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뻔한 기획안, 똑같은 레퍼토리의 대화, 늘 거기서 거기인 점심 메뉴까지, 틀에서 벗어나려는 노력 없이 다양한 가능성을 위해 에너지와 시간을 쏟지 않는 일상 속 나를 발견했다.
수업이 있는 금요일 저녁 7시 30분, 이태원의 어느 골목 안쪽에 자리한 인생학교 서울에 도착했다. 집처럼 아늑한 분위기로 단장한 소규모 공간이다. 강의는 명화, 동영상, 사진, 텍스트 등의 시청각 자료를 활용한다.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 ‘통찰력’과 건축가 마르셀 브로이어가 파이프로 만든 의자 ‘바실리 체어’, 재즈 가수 엘라 피츠제럴드가 처음 ‘스캣(scat)’ 창법을 구사한 영상 등을 감상했다. 모든 현상을 당연하게 보지 않고 무엇이든 낯설게 여긴 창조자들이 완성한 명작이다. 일상에 접목할 수 있는 팁은 쏠쏠했다. 평소와 다른 길로 출퇴근하기, 완전히 다른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이나 호기심 많은 어린아이와 대화 나누기, 몰입 상태에서 빠져나와 소소하고 일상적인 일 하기, 목적 없는 글쓰기 등 잠재된 호기심을 이끌어내는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했다. 창의성에 대한 잘못된 통념을 알게 된 뒤에는 안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강의에 따르면 창의력은 제멋대로 하길 좋아하는 사람에게도, 나이가 쉰 살인 사람에게도, 비창의적인 직종에 몸담은 사람에게도 내재돼 있다. 강사가 한 챕터를 설명하면 학생들이 그것을 음미하는 시간에 이어 다음 페이지로 넘어갔다. 설명을 듣고 받아 적고, 고개를 끄덕이면 다음으로 넘어가는 여타 수업 방식과는 거리가 멀다. 수업 중 서너 명씩 짝을 지어 주어진 질문에 대해 탐구하는 시간이 있었다. 무엇보다 인상이 깊었던 것은 창의력에 방해가 되는 익숙한 습관에서 벗어나는 훈련인 ‘임의 단어 실험’ 시간. 우선 각자 주어진 단어 ‘칼’에 대해 떠오르는 것을 마구잡이로 뱉어냈다. 칼국수, 칼싸움, 프리다 칼로, 칼춤 등의 1차원적 의견이 나왔다. 그다음엔 이 단어를 추적해 연상되는 한 문장 만들기. 엉뚱한 답도 나왔지만 정답은 없었다. 극사실주의 화가 척 클로스의 “영감이 떠오를 때를 기다리지 마라”라는 말처럼 영감은 무작정 끄적이고 내뱉으면서 키워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수업은 2시간 30분 동안 이어졌다. 삶의 고민을 해결할 수 있는 실질적 기술을 배우고, 같은 고민을 안고 있는 수강생들과 토론하는 시간을 잘 활용한다면 평소 안고 있던 삶의 문제들이 해결될 것 같았다. 수업을 마치고 나니 다른 강의도 궁금해졌다. 일대일 테라피, 여행 등 다양한 방법을 활용한 수업은 어떨까? 학창 시절엔 배울 수 없던, 돈 주고도 못 살 거라 여긴 인생 공부. 이제부터 시작이다.
에디터 이영균 (youngkyoon@noblesse.com) 임해경 (hklim@nobless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