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원형을 빚는 구도자
이탈리아 모노크롬 작가 투리 시메티는 타원형의 나무조각을 이용해 평평한 단색의 캔버스에 입체감을 불어넣는다. 타원형 곡선에 머무는 빛과 그림자에는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담았다.

이탈리아 모노크롬 회화의 대가 투리 시메티
노란 캔버스 뒷면으로 타원형의 나무조각을 든 한 남자의 손이 다가간다. 그가 뒷면에 조각을 붙이기 시작하자 캔버스는 점점 밖으로 불룩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이내 캔버스의 화면엔 빛의 방향에 따라 그림자가 드리워지며 색의 변주가 시작된다. 타원형을 트레이드마크 삼아 실존에 대한 고민을 던지는 이탈리아 모노크롬 회화의 대가 투리 시메티(Turi Simeti)의 작품에 관한 이야기다. 1929년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에서 태어난 투리 시메티는 89세의 나이에도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현역 작가다. 그의 작품은 밀라노 프라다 재단, 덴마크 현대미술관, 네덜란드 볼린덴 미술관 등에 소장되어 있으며 지난 3월 15일부터 4월 29일까지 리안갤러리에서 국내 첫 개인전을 열어 그만의 철학적 사유를 유감없이 드러냈다. 그의 예술 이력은 다소 독특한데, 정규 미술 교육을 받지 않고 미술가들과의 교류를 통해 독학으로 그만의 화풍을 구축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아티스트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수의사와 변호사가 되고 싶어 수의학과 법을 공부한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평생 하고 싶은 일은 예술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1958년 예술적 기운이 생동하는 로마로 이주한 그는 삼베, 나무 등을 활용한 콜라주 작업으로 유명한 앙포르멜의 대가 알베르토 부리(Alberto Burri)와 교류하며 본격적인 예술가의 길로 들어섰다. 그가 지금의 독자적 화풍을 형성하기 시작한 건 1960년 밀라노로 예술적 터전을 옮긴 후다. 루치오 폰타나(Lucio Fontana), 피에로 만초니(Piero Manzoni) 등을 만나 제로 아방가르드 그룹(Zero Avant-garde Group)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캔버스 화면에 도전적 실험을 거듭했다. “1960년대 초창기에는 종이의 가장자리를 태워 붙이는 콜라주 작업을 했습니다. 소재도 처음엔 오렌지색 봉투만 사용하다 판지와 고무 등을 활용했고, 1~2개에서 캔버스를 뒤덮을 정도로 많은 수의 원형 콜라주를 시도했습니다.”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타원은 1960년 이후 지속적으로 나타나는데, 우연과 의도가 결합된 결과다. “촛불을 가지고 놀다 우연찮게 종이를 태웠는데 그게 타원 모양이었어요. 제 예술적 발견의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우연이 필연적 결과를 만든 데에는 타원형에 대한 강한 애정도 한몫했다. “정사각형과 직사각형을 사용한 작업을 하기도 했지만 저는 항상 타원형으로 돌아왔어요. 특히 동그라미보다 타원형이 캔버스 안에서 움직임을 표현하기 쉽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제 마음은 더욱 확고해졌습니다. 타원형의 장점은 많지만 캔버스 밖으로 부드럽게 압력을 가할 수 있고 비대칭의 느낌을 연출할 수 있어 흥미롭습니다. 이렇게 친절한 타원형과 사랑에 빠지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그는 타원형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때마다 열띤 어조로 말했는데, 어쩌면 타원형은 형태의 종류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1960년 초부터 시작한 콜라주 작업을 통해 완벽함에 대한 열망이 커진 그는 1960년대 중반부터 타원형 나무조각을 사용해 입체적 회화를 제작하는 테크닉의 변화를 꾀한다. “최소한의 개입만으로 표면의 형태를 변화시키고, 캔버스와 빛의 관계를 강조하는 것은 제가 생각하는 완벽함의 표현이었습니다.”

1Cinque ovali rosso arancio, Acrylic on Shaped Canvas, 120 x 120 cm, 2015
2Nove ovali gialli, Acrylic on Shaped Canvas, 120 x 120 cm, 2015
먼저 캔버스에 들어갈 타원의 수와 구성을 정하고 느낌에 따라 색을 고른다. 빛이 닿아 어떤 형태의 그림자를 만들어낼지 계산하는 것도 중요한 작업 과정이다. 비물질적 특성의 빛과 그림자의 위치를 조정하는 것은 곧 수많은 가능성과 싸우는 작업일 텐데 과연 어떻게 대처하는 걸까? “저는 작업을 할 때마다 제 의도를 그대로 표현하기 위해 발생할 수 있는 모든 변수를 고려하려고 노력합니다. 때로 1mm의 오차가 구성의 기능을 무력화시키기도 하거든요. 타원은 표면을 자극하는 역할을 하고 빛과 그림자는 작품에 생동감을 부여하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그가 그림을 통해 나타내고자 하는 존재는 과연 무엇일까? “글쎄요. 당연히 보는 이의 생각에 따라 존재에 대한 정의는 달라질 겁니다. 다만 빛과 형태의 무한한 경쟁 관계를 통해 우리가 달성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그의 말을 듣고 있으니 많은 것을 소유하고 이루려 하지만 결국 완전한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채 삶을 마감하는 우리네 인생이 떠오른다. 마지막으로 향후 계획을 묻자 그는 “많은 나라에서 제 작품을 인정해주는 것은 아주 기쁜 일입니다. 아직 제 작품이 잘 알려지지 않은 나라를 찾아 꾸준히 전시를 여는 것이 목표입니다. 전시 포스터, 편지 등의 미공개 문서와 작품 등을 수록한 카탈로그 레조네
곧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투리 시메티는 여전히 젊은 작가의 열정을 지니고 있는 듯 보였다. 그에게 에너지의 원천은 특별한 데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저는 제 작업을 믿습니다. 그 이유만으로 제가 앞으로 나아갈 이유가 되죠”라는 짧은 대답으로 창작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잠시 그에겐 예술이 곧 종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는 캔버스 속에서 수행을 이어나가는 경건한 구도자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에디터 최윤정(amych@noblesse.com)
사진 제공 리안갤러리 서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