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 베번의 내면 풍경
“어제 막 도착했어요. 한국은 첫 방문이지만, 언젠가 다시 오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어요.” 주 활동 무대인 유럽에 비해 국내엔 상대적으로 이름이 덜 알려졌지만, 토니 베번은 영국에서는 국민 작가라는 타이틀로 불리는 대작가. 리안갤러리 서울에서 그와 실제로 만난 순간은 첫사랑만큼 떨리는 경험이었고, 젠틀한 미소와 함께 악수를 청하는 중년 신사에게선 강렬하지만 부드러운 내면이 느껴졌다. 마치 그의 작품처럼.

런던에는 보기 드문 특별한 미술관이 있다. 위대한 초상화 작품을 가득 모은 국립 초상화 갤러리(The National Portrait Gallery)다. 토니 베번(Tony Bevan)의 자화상 역시 어김없이 그곳에 자리해 있다. 저명한 국립 미술관도 그에게 항상 러브콜을 보내지만, 동시에 화랑에서도 높은 인기를 구가하는 그는 미술사적으로도, 상업적으로도 인정받는 작가다. 한국 첫 전시를 앞둔 그를 만난 곳은 리안갤러리 서울. 창으로 햇살이 환하게 들어오는 가을 오후, 인터뷰 촬영을 위한 사진작가의 요청에 따라 작품 앞에서 자연스럽게 포즈를 취하는 작가를 보며 문득 이 노련한 화가의 어린 시절이 궁금해졌다.
“외조모가 화가였어요. 전업 화가는 아니었지만 많은 그림을 그렸죠. 그래서 집 안에 항상 미술 재료가 있었어요. 또 외조부는 아프리카에 자주 오갔는데, 그만큼 아프리카 장식품이 많았습니다. 저는 수줍음이 많은 아이였기에 밖에서 친구들과 어울리기보다는 집 안에서 미술 재료를 갖고 놀거나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어요. 아프리카 조각품과 대화하고 드로잉과 이야기를 나누었죠.”
여전히 수줍은 성격이냐는 질문에 그는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집에서 홀로 조용히 물감을 만지작거리던 소년은 자라서 핏빛을 연상시키는 회화를 통해 목소리를 내는 아티스트가 됐다. 예술을 자연스레 접할 수 있었던 집안 환경처럼 대대로 흐르는 예술가의 피는 그의 딸에게 이어진 듯하다.
“어느 날 어린 딸이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더군요. 집 안 벽에 걸어둔 제 그림 한 점을 미술관 전시에 출품했는데, 그다음 날 딸아이가 그 자리가 비어 있다며 눈물을 흘리는 거예요. 남몰래 그 그림에 애착을 갖고 있었나봐요. 항상 같은 곳에 있던 그림의 부재가 어린 딸에게는 큰 상실감을 안겨준 거죠.”

1Tree 18(PC153), Acrylic and Charcoal on Canvas, 167.6×213.4cm, 2015
2Head (PC0417), Acrylic and Charcoal on Canvas, 271.78×242.57cm, 2004
3Tower (PC084), Acrylic and Charcoal on Canvas, 170x140cm, 2008
그에게는 꽤 신선했을 이 사건 말고도 얼마 전 다시 한 번 특별한 경험을 했다. 세계 최대 규모의 아트 페어인 런던 프리즈 ‘프리즈 마스터스(Frieze Masters)’에 출품하는 영광을 안은 것. “보통 아트 페어는 페어 참가 작가에게 아티스트 패스를 발급해줘요. 하지만 프리즈 마스터스에 선정된 작품은 대부분 이미 세상을 떠난 거장의 손에서 탄생한 작품이죠. 그 때문에 아티스트 패스 자체가 존재하지 않아요. 그런데 저는 생존해 있으니 어떡해요. 아티스트 패스 대신 갤러리 스태프 패스를 걸고 페어장에 드나들었죠.” 남들보다 빠르게 거장 반열에 오른 그에게는 특별한 에피소드로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일이다.
이렇듯 거장의 타이틀을 얻기까지 오랜 세월 그가 차곡차곡 구축한 화면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뭐니 뭐니 해도 붉은색의 활용이다. 특히 주황과 빨강 등 피를 떠올리게 하는 색감이 인상적이다. “강렬한 컬러와 색감을 워낙 좋아해요. 특히 레드에 매력을 느끼죠. 매우 진하고 밝은 색이지만 저는 무거운 컬러라고 부릅니다”라며 붉은 컬러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드러냈다. “제가 붉은색으로 표현하는 건 몸과 그것을 이루는 요소예요. 붉은색으로 연결한 선은 이 그림처럼 팔꿈치나 무릎, 발목에, 또는 뇌나 혈관을 나타나는 데 사용하기도 하죠.” 강한 컬러만큼 그의 작품에서 유독 두드러지는 또 하나의 특징은 구조적이면서도 제각각 방향성을 지닌 선과 그로 인해 만들어진 건축적 구조다. “제 작품에서 라인은 하나의 주제를 제2의 다른 장소로 연결하는 통로입니다. 다른 장소나 공간으로 통하는 입구라고 할 수 있죠. 선은 모든 것을 연결해요.”
이 연결성을 바탕으로 그가 작품에서 지속적으로 탐구하는 주제는 ‘내면’이다. 그는 ‘내면의 풍경’이라는 한마디로 자신의 예술 세계를 정의했다. “저 자신을 이미지 소스로 많이 활용하는 편입니다. 겉모습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외모와는 관계없는 이야기죠. 스스로 내면을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니까.” 그렇다면 모든 작품이 그 자신을 모델로 한 것일까? “네. 항상 저를 그린다고 보면 돼요. 그런데 관람객은 저를 통해 또 다른 형태를 보기도 하더라고요.” 그는 작품 활동 초기에 구상에 전념했지만 많은 변화 과정을 거쳤다. 구상화 같다가도 추상화처럼 보이고, 그 둘이 오버랩되거나 경계에 놓인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것도 바로 이 때문. “구상과 추상 어느 것도 아니에요. 동시에 둘 다이기도 하죠. 하나로 규정하지 않고 그 둘이 밸런스를 유지하길 원합니다.” 그는 어시스턴트를 쓰지 않기로도 유명하다. “모든 그림은 직접 그려요. 제작 기간은 작품에 따라 다르지만, 때로는 순식간에 완성하기도 하죠. 이틀 안에 끝낸 적도 있어요. 보통은 6개월에서 길게는 1년 정도 걸려요. 한 번에 하나만 그리지만, 2~3점을 동시에 제작할 때도 물론 있습니다. 규칙을 정해두진 않아요.”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방식을 추구하면서도 자신의 신념을 지켜온 그가 생각하는 예술가의 역할이 궁금했다. “제가 경험하는 것, 세상을 보는 어떤 방식이 제 작품에 나타난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잖아요. 사실 그것이 예술이죠.” 이처럼 고유의 표현 방식과 시선을 담은 그의 작품은 실제로 눈앞에 직면해야 감동이 배가된다.
“작품은 직접 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 작품도 물론이고요. 한국 첫 개인전에 많은 분이 오셨으면 좋겠어요. 작품을 마주하면 온전히 느낄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10여 년에 걸쳐 제작한 4시리즈 중 대표작만 골라 한국의 미술 애호가를 만나러 온 그는 대구와 홍콩 전시를 앞두고 있다. 그렇지만 먼저 우리는 서울에서 토니 베번의 작품을 직접 만나는 환희의 순간을 경험해야 할 것이다.
토니 베번의 첫 한국 전시
런던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구상과 추상을 넘나드는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한 토니 베번. 현재 로스앤젤레스 현대미술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테이트 미술관 등 세계 굴지의 기관이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그의 한국 첫 전시가 리안갤러리 서울에서 11월 10일부터 12월 24일까지 열리고 있으며, 내년 1월 12일부터 2월 말까지는 리안갤러리 대구로 옮겨 선보일 예정이다.
문의 02-730-2243(서울), 053-424-2203(대구),www.leeahngallery.com
에디터 김이신(christmas@noblesse.com)
글 백아영(프리랜서) 사진 김제원(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