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션 뮤지컬은 왜
팩션은 상상력을 입힌 실화다. 이렇게 실제 이야기에 상상력을 더한 뮤지컬이 최근 관객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런데 대체 왜?
순종이 가출했다는 설정으로 출발하는 <라스트 로얄패밀리>
열다섯 살 순종은 왕실 생활이 괴롭다. 언젠가 한 나라를 책임져야 하는 본분 탓이기도 하지만, 늘 자신을 들볶는 어머니 명성황후 때문이다. 궁 안이 답답하기만 한 순종은 유일한 친구인 내시 폴 매카트니가 조선을 떠나려 하자, 그와 함께 몰래 궁을 빠져나갈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일이 꼬여 그의 ‘탈출’ 계획은 ‘가출’이 되어버린다. 애초 궁에서 나와 영국으로 가려던 순종은 우연히 저잣거리의 남사당패 무리에 섞이는가 하면, 아예 그들과 함께 조선 최고의 예인(藝人) 경합에도 참가한다.
<라스트 로얄패밀리>는 실존 인물인 순종을 주인공으로 한 뮤지컬이다. 단,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등 순종이 겪은 역사적 사건을 재연하기보다 ‘조기 교육의 폐해’, ‘위기의 청소년’, ‘기러기 아빠’ 등 현대사회의 문제를 이야기한다. 유약한 왕 고종과 카리스마 넘치는 명성황후, 가정적인 순종이라는 익숙한 캐릭터에 재치 있는 대사와 설정을 입혀 흡입력을 높였다. 지난 1월 충무로의 한 무대에 오른 작품은 ‘익숙하면서도 색다른’ 팩션 뮤지컬이라는 특성을 제대로 살려 많은 관객을 끌어들였다.
최근 공연계의 트렌드는 ‘팩션 뮤지컬’이다. 팩트(사실)와 픽션(허구)의 결합을 뜻하는 팩션 장르는 실화를 재료로 쓰지만, 허구라는 양념으로 버무리거나 맛깔스러운 소스를 뿌려 완전히 새로운 맛을 빚어낸다. 올 한 해 국내 무대에 오르는(혹은 이미 오른) 굵직굵직한 팩션 뮤지컬만 해도 <영웅>, <글루미데이>, <보니 앤 클라이드>, <모차르트!>, <세종과 영실>, <마리 앙투아네트> 등 10편이 넘는다. 이러한 팩션 뮤지컬은 관객에게 일정 수준의 설득력을 부여하는 한편, 허구적 호기심을 더해 극적인 재미를 제공한다.
올해 상반기 무대에 오른 팩션 뮤지컬 중 가장 눈에 띈 건 <글루미데이>였다. 1926년 8월 4일 김우진과 윤심덕이 대한해협에서 동반 투신한 사건을 재구성한 작품이다. 최고의 극작가로 평가받던 김우진과 조선 최초의 소프라노 윤심덕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이야기에 ‘사내’라는 가상의 인물을 투입해 팽팽한 긴장감을 만들어냈다. 연출가 성종환은 한 인터뷰에서 “두 주인공의 삶과 로맨스를 더 극적으로 포장하기 위해 실화엔 없는 가상의 인물을 만들었다”고 밝혔다. ‘사내’는 허구의 캐릭터지만 작품 속 공간을 촘촘히 채워가는가 하면, 심지어 극에서 없어선 안 될 중요한 키를 가진 인물로도 여러 번 등장한다.
한편 지난해 국내에서 초연해 화제를 모은 뮤지컬 <보니 앤 클라이드>도 팩션 뮤지컬 열풍을 타고 4월 중순부터 다시 한 번 관객을 찾는다. <보니 앤 클라이드>는 1930년대 미국에서 실제 강도 행각으로 이름을 날린 ‘보니와 클라이드 사건’을 토대로 만든 작품이다. 우리에겐 영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1967년)로 더 알려졌다. 단, 영화가 둘의 범죄 행각과 그 폭력성의 극단을 보여주는 데 초점을 맞춘 것에 비해, 뮤지컬은 이 시대의 대중이 공감할 수 있도록 보니와 클라이드의 ‘격정적 사랑’에 비중을 뒀다. 영화에선 ‘여성과 사랑을 나누지 않고 범죄에만 몰입하는’ 클라이드와 그런 그를 진심으로 사랑한 보니의 관계를 특별하게 묘사하지만, 뮤지컬 속 보니와 클라이드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정열적인 키스와 뜨거운 사랑을 나눈다.
1 1930년대 미국의 커플 강도 사건을 새롭게 해석한 <보니 앤 클라이드>
2 모차르트의 천재성보다, 인간미에 더 초점을 맞춘 <모차르트!>
3 김우진과 윤심덕 자살 사건을 재해석한 <글루미데이>
팩션 뮤지컬이 이렇게 계속 무대에 오르는 이유는 ‘흥행’이 되기 때문이다. 작품은 이미 검증받은 이야기로 관객의 접근성을 높이고, 관객은 ‘이게 진짜일까?’ 하는 호기심으로 극장을 찾는다. 뮤지컬 평론가인 순천향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원종원 교수는 “관객은 시간과 큰돈을 내고 보는 뮤지컬에서 전혀 모르는 이야기로 실험용 쥐가 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며 공연계에 현재 불고 있는 팩션 뮤지컬의 인기 요인을 분석했다.
그러나 팩션 뮤지컬이라고 모두가 흥행에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정의감 강한 독립운동가 안중근이 아닌, 평범하고 인간적인 그의 일면을 부각시켜 지난 몇 년간 사랑받은 뮤지컬 <영웅>은 올해 초 37억 원을 들여 새로 무대에 올렸지만, 흥행에선 큰 재미를 보지 못했다. 평론가들은 상대적으로 젊은 관객을 설득하지 못한 것을 흥행 부진 요인으로 꼽았다. 여기에 뮤지컬 연출가 조용신은 “최근 잘나가는 실화 소재의 뮤지컬은 기존의 이야기를 재해석하거나 고증하기보다 놀이의 대상으로 여긴다”며 “지금 성공하는 팩션 뮤지컬의 특징은 가벼운 이야기를 지향하는 일종의 탈이데올로기적 분위기에 있다”고 평했다.
팩션 뮤지컬의 성패는 얼마나 친숙한 소재에서 숨은 의미를 발견해 독특한 시각으로 재해석하느냐에 달려 있다. 팩션은 역사와 실제라는 단면을 횡단하면서 비어 있거나 부족한 부분을 상상력으로 채운다. 이러한 상상력엔 음모론이 끼어들 수도 있고, 인물과 사건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개입하기도 한다. 연극에선 일찍이 극단 목화의 연출가이자 서울예술대학교 극작과 오태석 교수가 역사적 사실을 새로운 관점에서 재해석한 팩션 연극을 선보여왔다. 하지만 최근 제작하는 팩션 뮤지컬은 그의 작업과는 차이가 있다. 팩션 연극이 역사적 사실에 대한 객관적 평가를 완전히 뒤엎는 경우라면, 팩션 뮤지컬은 역사에서 밝혀지지 않은 빈 곳, 역사적 사실 그 자체에 상상력을 발휘한다.
그런가 하면 누군가는 팩션 뮤지컬의 상상력이 사실로서 이야기를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한다. 잘못된 해석으로 역사를 왜곡하고 혼란을 가져온다는 거다. 하지만 그런 발언은 팩션 뮤지컬에 대한 무지에서 온 것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뮤지컬 평론가 원종원 교수는 “뮤지컬 속 팩션은 단순한 역사의 재연이 아닌 역사적 사실을 통해 현실의 문제를 빗대어 보는 것”이라고 팩션 뮤지컬의 ‘왜곡’에 대한 생각을 밝혔다.
6월, ‘감성 연출’로 유명한 아드리안 오스몬드의 뮤지컬 <모차르트!>가 무대에 오른다. 우리에게 익숙한 모차르트 영화 <아마데우스>가 모차르트의 라이벌이자 그의 재능을 질투하는 살리에르에게 포커스를 맞췄다면, 뮤지컬 작품에선 인간 모차르트의 사랑과 자유에 대한 갈망에 이야기를 집중할 예정이다. 다시 말해 보편성을 띤 현대적 이야기로 모차르트를 만날 수 있다는 것. 이렇게 팩션 뮤지컬로 현실의 문제를 과거에 투사해 보상받으려는 시도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그 안에서 재미를 찾고 있다. 올 한 해 열린 마음으로 팩션 뮤지컬을 즐기다 보면 인간의 상상력이 보여주는, 무릎을 탁 치는 기발함에 당신도 감탄하게 될 것이다.
에디터 이영균 (youngkyoon@nobless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