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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디의 선물

FASHION

작년 여름, 설립 90주년을 기념해 트레비 분수를 런웨이로 변신시키며 브랜드의 본고장 로마에 대한 패셔너블한 오마주를 전한 펜디가 이번에는 이 ‘영원한 도시’의 중심부에 모던아트 작품을 세웠다. 지난 5월 22일, 이탈리아의 거장 현대미술가 주세페 페노네의 ‘폴리에 디 피에트라(Foglie di Pietra, 돌의 잎사귀)’를 소개하며 다시 한번 감각적인 예술 행보를 과시한 그날의 현장을 전한다.

로마 팔라초 펜디 건물 앞에 설치한 현대미술가 주세페 페노네의 폴리에 디 피에트라.

로마는 그 자체로 하나의 뮤지엄이다. 바티칸 시티부터 콜로세움 같은 유적지, 수많은 박물관과 아무렇게나 찍은 사진도 엽서로 변신시키는 거리 풍경까지. 상점 간판과 자동차만 없으면 과거로 돌아간 듯한 착각을 일으키는 로마 특유의 낭만은 아무리 눈에 담아도 결코 질리지 않을 것처럼 매력적이다. 이 고풍스러운 시내에는 매끈하게 디자인한 신축 건물이나 모던한 조형물을 위한 자리는 존재하지 않을 것 같다. 건축 당시에는 그 시대의 첨단 기술을 축약해 완성한 ‘혁신의 상징’이었을 것이 분명한 그 오래된 건축물들이 마치 처음부터 예스러움을 표방해 만든 듯 보이는 것처럼.
트레비 분수의 레노베이션을 포함한 다양한 문화 사업을 통해 90여 년 전 메종이 태어난 본고장에 애정 어린 경의를 표해온 펜디. 우아함과 위트, 전통과 혁신을 넘나드는 특유의 스타일을 제안해온 이 로만 패션 하우스가 이번에는 로마의 공공장소에 영구적으로 설치하는 최초의 현대미술 작품을 소개한다고 했을 때, 반가움보다 의구심이 먼저 든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매 시즌 과거에 대한 존중, 현실에 대한 충실함 그리고 미래를 향한 비전이라는 세 가지 화두를 어디 하나 아쉬운 구석 없이 충족시킨 컬렉션을 소개해온 브랜드의 접근 방식은 역시 남달랐다. 펜디가 도시 로마와 이곳을 찾을 모든 이들에게 헌정한 작품은 동시대인에게는 걸출한 모던아트 조형물로, 미래 세대에게는 로마의 찬란한 과거를 반추하는 매개체로 기억될 것이 분명한 또 하나의 마스터피스였으니까.

폴리에 디 피에트라 설치 과정과 주세페 페노네.

로마의 가장 럭셔리한 쇼핑 스폿 비아콘도티(Via Condotti)를 사이에 두고 스페인 계단과 마주한 라르고골도니(Largo Goldoni)에 위치한 펜디의 유서 깊은 플래그십 팔라초 펜디(Palazzo Fendi). 메종의 DNA가 서린 이 유서 깊은 부티크 앞에 설치할 조형물을 완성하는 무거운 임무는 이탈리아 출신 거장 주세페 페노네에게 주어졌다. 1960년대 말, 극도로 상업화되어가는 예술에 반기를 들고 값싼 재료로 완성한 작품으로 ‘아르테포베라(arte povera, 빈곤한 예술)’ 운동을 이끈 주역이자 베르사유 궁에서 최초로 개인전을 연 이탈리아인으로 알려진 작가는 오랫동안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탐구해왔다. 펜디의 현 회장이자 CEO 피에트로 베카리가 페노네의 작품 세계에 매료되면서 시작된 메종과 아티스트의 만남. 이 특별한 동행이 어떤 결과물로 이어질지에 대한 해답은 이미 공개된 바있다. 지난 1월부터 로마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 <매트리스(Matrice)>는 페노네의 대표 작품 15여 점을 무솔리니 시절이라는 이탈리아 현대사의 격동기에 완성한 유서 깊은 건물이자 현재 펜디의 본사로 쓰이는 ‘팔라초 델라 치빌타 이탈리아나(Palazzo della Civilta Italiana)’에서 감상할 수 있는 특권을 제공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1 폴리에 디 피에트라 제작 과정과 완성작.   2 폴리에 디 피에트라 설치 장면.

5월 22일 오전, 팔라초 델라 치빌타 이탈리아나. 펜디 CEO 피에트로 베카리, 주세페 페노네와 2013년 베니스 비엔날레 총감독으로 <매트리스(Matrice)>전을 기획한 저명한 큐레이터 마시밀리아노 조니 그리고 로마 시, 이탈리아 문화부 관계자가 전 세계에서 몰려온 프레스 앞에 섰다. 로마에 최초로 영구적으로 설치할 모던아트 조형물 공개를 불과 몇 시간 앞둔 이들은 설렘을 감추지 못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세계적 작가의 작품 세계에 담긴 독창적 창의력과 숭고한 장인정신 그리고 전통과 혁신의 절묘한 이중주는 펜디가 추구하는 핵심 가치와 닮았다고 말한 피에트로 베카리. 아티스트 특유의 예민함 대신 시종일관 겸손함과 사람 좋은 미소를 보여준 작가가 들려준 로마의 역사, 현재와 미래에 대한 성찰, 그리고 전문 심사위원단을 구성해 프로젝트를 검증하고 승인한 로마 시청까지. 이들의 열정은 기존 로마 풍경의 하모니를 결코 깨뜨리지 않으면서 독특한 존재감을 발산하는 조각품 ‘폴리에 디 피에트라(Foglie di Pietra)’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그날 저녁, 라르고골도니에서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페노네의 새로운 작품은 여러 의미에서 펜디의 컬렉션만큼이나 대담하고 독창적이었다. 얼핏 보면 각각 18m, 9m에 달하는 두 가로수의 나뭇가지 사이에 거대한 돌덩이를 올린 듯한 기묘한 형상의 작품. 실은 진짜 나무가 아니라 황동을 이용해 나무를 재현한 것으로 그 덕분에 무려 11톤에 달하는 대리석 조각을 지탱할 수 있다. 로마의 과거를 대변하는 ‘유적의 파편’인 대리석 덩어리에 담긴 고고학, 역사 그리고 잃어버린 문명에 대한 그리움은 이를 받들고 있는 가녀리지만 땅속에 단단히 뿌리내린 나무를 통해 현재와 미래로 연결되고 있음을 상징한다고.
펜디 덕분에 로마는 영구적으로 설치한 최초의 모던아트 조형물을 부여받았다. 앞으로도 전 세계 관광객의 마음을 설레게 할 이 영원한 도시가 펜디와 함께 써 내려갈 새로운 역사가 기대된다.

 

에디터 서재희(jay@noblesse.com)
현지 취재 배우리(파리 통신원)  사진 제공 펜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