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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씁니다

LIFESTYLE

편지를 쓰는 것은 세상만사가 쉴 새 없이 돌아갈 때, 잠시 나와 당신의 쉴 자리를 마련하는 일 아닐까?

계절의 변화란 소름 끼치도록 정확하다. 그 불가항력에 이끌려 본능적으로 어떤 일을 하나 둘 하는 나를 확인하는 순간이 있다. 그럴 때면 ‘인간은 동물이다’라는 차가운 문장이 새삼 뜨겁게 느껴지곤 한다. 9월, 가을의 문턱에 서서 손때 묻은 오래된 책을 만지작거리거나 흰 종이에 수취인이 불분명한 잡글을 끄적이는 일이 잦아졌다. 문구점에 들러 맘에 드는 편지지를 고르고 누군가를 향해 손으로 한 자 한 자 정성껏 편지를 써본 것이 언제가 마지막이더라 생각해보니, 블랙홀을 헤매는 듯 까마득하다. 물론 일상이 된 이메일과 SNS 메시지도 ‘안부, 소식, 용무 따위를 적어 보내는 글’이라는 편지의 사전적 의미로 본다면 편지가 맞다. 그러나 ‘편지’라는 단어에는 단순한 정의로 담을 수 없는 삶의 낭만과 희로애락이 응축돼 있다. 그것은 개인과 개인의 가장 내밀하고 에로틱한 의사소통이자, 먼 훗날 역사가 될 일을 기록한 타임캡슐형 사료이기도 하다. 장충식 . 신동순 부부가 60년간 해로하며 주고받은 편지를 모은 <다시 태어나도 오늘처럼>은 가슴 뭉클한 순애보의 연대기다. 1950년대에 대학에서 처음 만난 두 사람이 연애를 시작해 가정을 꾸리고, 세월이 흘러 손자손녀가 태어나기까지 30여 년의 시간을 담았다. 특히 결혼 후 남편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생이별을 하고 서로의 마음을 어루만지며 건네는 말이 절절하다. “바다보다도, 하늘보다도 더 넓은 인간의 마음을 토막진 말과 제한된 글로써 어이 표현할 것이며, 또한 아름다운 삶을 찾았으니 환희에 미어질 듯한 이 심정을 작은 종이 위에다 펜을 빌려 어이 형용하리까!”라는 글귀로 시작한 남편의 연애편지는 세월이 흘러 “당신과 우리 가족의 건강에 신경을 많이 써야 할 것 같아요. 안녕”이라는 부인의 담담한 인사로 끝을 맺는다. 앨런 맥팔레인의 <릴리에게, 할아버지가>는 제목처럼 할아버지가 손녀에게 보내는 편지다. 손녀 릴리가 성인이 된 후 세상사의 모진 풍파를 잘 헤쳐나가길 바라는 마음에 펜을 잡았다. 그의 편지는 인류학자로서 성찰한 인간에 관한 보고이기도 하다. 손녀를 다독이는 말에 아직도 미지의 존재인 인간을 향한 무한한 사랑이 깔려 있다. 그래서 첫 편지에서 던진 ‘나는 누구일까?’라는 실존적 질문은 ‘우리의 미래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라는 마지막 질문과 뫼비우스의 띠처럼 만난다. “릴리야, 할아버지는 너 자신의 역사와 문화로부터 충분히 거리를 두었으면 좋겠구나. 릴리 너는 세계시민이며 지구 상의 다른 모든 사람과 같은 뿌리를 가졌단다.” 앨런 맥팔레인의 글에서 잘 드러나듯 편지란 늘 자기 고백의 형식을 띠게 마련. 피아니스트 손열음의 <하노버에서 온 음악 편지>는 ‘편지’ 형식을 빌린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 가깝다. 그녀가 5년여 동안 국내 매체에 기고한 글을 모은 음악 에세이에는 ‘천재 소녀’라는 수식에 가려 있던 한 청춘의 민낯과 음악을 향한 깊은 열정이 고스란히 담겼다. 책 없이는 살 수 없던 아이가 자라 자신의 책으로 누군가 마음의 위로를 얻거나 가슴 뜀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괜찮다고 말하는 대목은 퍽 감동적이다. 만약 당신이 이 세 권의 책을 읽는다면, 아주 오랜만에 펜을 들고 편지를 쓰게 될지 모른다.

에디터 김재석 (jskim@noblesse.com)
사진 김흥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