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이 사라진 세상
평론이 기능하지 않는 세상에서 그리는 비평에 대한 단상.

“우리끼리 돌려 읽는 전공 서적 같은 거지. 요새 누가 평론을 읽겠어?” 문학평론가 A가 말했다. 북적거리던 자리에 정적이 흘렀다. 자조 섞인 농담으로 넘기기엔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다. A는 뜨문뜨문 글을 기고하거나 강의로 ‘연명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직업 평론가로 생존해 있다는 자부심을 뭉근히 드러냈다. ‘엄혹한 시대에 무용(無用)한 일로 밥을 먹고 사는 대단찮은 평론가’라고 자신을 칭했다. 지난해에 문학 월간지 <현대문학>은 평론 부문 신인상 당선자를 배출하지 못했다. 문학 계간지 <창작과 비평>과 <문학동네>도 2년 동안 당선자가 없었다. 다른 문학 장르에선 다양한 작품이 꾸준히 생산되는 반면, 평론은 정체되어 있다는 것이 이유다. 평론 부분에 응모한 작품도 20편 남짓, 시와 소설에 비하면 한참 적다. <문학동네> 심사를 맡은 평론가 남진우는 심사평에 “비평의 위기가 운위되는 시대에 좋은 신인 발굴에 대한 목마름은 그 어느 때보다 더하다 할 수 있다. (…) 그러나 섣부른 선택보다 심사숙고의 시간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적었다. 다행히 <현대문학>은 올해 평론 부문 신인상(조대한, ‘낯선 몸으로 속삭이기’)을 선정했다. 무려 5년 만이다. “우리 때와 달라. 전공자가 없어. 담론이 정체될 수밖에 없는 거지. 평론가에 대한 인식도 문제야. 공부깨나 한 꼰대 같은 걸 누가 하고 싶겠어.” A의 말에 자리에 있던 문학 전공자 5명은 술만 축냈다. 비평의 위기, 비평의 실종, 비평의 종말까지 거론되는 시대다. 위기는 꽤 오래전에 시작됐다. 2013년 <문학동네> 가을호엔 ‘지금, 비평이란 무엇인가’라는 광범위한 기획 기사가 실렸다. 기사의 골자는 비평 독자가 줄고 영향력도 전 같지 않은 상황에서 비평이란 행위의 의미를 짚고, 앞으로 비평의 역할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었다. 5년이 지난 지금 문학비평은 여전히 미로 속에 있다. 출간되는 평론집도 현저히 줄었다. 현재의 평론은 평론가나 평론가 지망생, 인텔리만 읽는다.
“비평이 사라졌다기보단 비평 미디어와 직업 평론가의 소멸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다. 비평을 전달하던 매개체(플랫폼)가 대거 체질 개선을 했고, 직업으로서 평론가가 여의치 않은 상황이 온 것이다.” 음악평론가 차우진은 급격히 변한 미디어 구조와 달리 평론은 진화하지 못했다고 진단한다. 21세기 플랫폼에 20세기 소프트웨어가 맞을 리 없다. 과거 평론가는 정보 전달과 작품 분석, 작품의 정치적・사회적 의미를 짚어주는 문화 권력자였다. 대중이 쉽게 접할 수 없는 정보를 독점하고 작품을 샅샅이 해체해 분석하는 정보 전달자이자 지식인이었다. 음악의 경우 정보 전달의 역할이 강했다. 서구 문화에서 시작된 록이나 힙합이 국내에 태동했을 때 언어적 한계나 환경 요인으로 관련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사람은 한정적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평론가들은 < Q Magazine >이나 < AP(Alternative Press) >, < The Source >같은 해외 전문 매거진과 다큐멘터리, 서구 평론가의 글에서 정보를 얻어 국내 미디어로 재생산했다. 그러나 그 역할은 인터넷의 발달로 소멸했다. 정보의 양으로만 볼 때 이젠 평론가와 마니아의 경계는 희미하다. ‘덕후’라 칭하는 마니아의 지식과 정보 양은 평론가의 그것과 비슷하다. 이젠 평론, 혹은 평론가의 역할이 그 이상의 무엇이 되어야 한다. “과거에 평론가가 바이오그래피(biography) 제공과 게이트키퍼(gate keeper) 역할을 했다면 이젠 안내자의 롤에 주목해야 한다. 그려진 맵에서 대중이 효율적으로 여행할 수 있도록 돕는 취향의 길라잡이, 그게 지금의 평론가가 해야 할 역할 아닐까?” 차우진의 고민처럼 평론(평론가)이 사회적으로 기능하려면 저변을 넓혀야 한다. 일반 대중의 토로보다 높은(혹은 넓은) 담론이 이뤄져야 하며, 일반적 사고로는 접근할 수 없는 영역에 훈련된 안목과 사고로 침투해 심미적 아름다움을 집어내야 한다. 문화가 자칫 상업적으로 치우쳐 지나치게 천박한 상품으로 전락하는 걸 견제하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텍스트에 생명력을 부여해야 한다.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한국 문화 산업은 영화 잡지가 잠식했다. 거기엔 국내외 다양한 영화계 소식은 물론이고 감독과 배우의 인터뷰, 해외 영화제 소식까지 촘촘히 실어 무수한 시네아스트(cineaste)를 낳았다. 그리고 수준 높은 담론과 미학적 아름다움을 갖춘 견고한 영화 평론이 실렸다. 영화평론가 정성일과 김영진, 이후경, 오동진, 김혜리, 박평식 등 기라성 같은 평론가의 글이 없었다면 난 아마도 왕자웨이와 데이비드 핀처, 고레에다 히로카즈, 켄 로치를 만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이후에도 무수히 좋은 작품을 관람했지만 인생 리스트는 아직도 그 시간대에 머물러 있다. 특히 정성일이 애정을 담아 완성한 내밀한 왕자웨이에 대한 찬사가 없었다면 지금처럼 그의 작품을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다. 왕자웨이가 “도시적 이미지를 글래머러스하게 표현하는 이유는 어린 시절 나이트클럽에서 일하는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본 영향”이라든지 <화양연화>에서 량차오웨이가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사원의 기둥에 속삭이던 장면이 비밀을 묻는 것이 아니라 사실 “차우 선생의 그 마지막 제스처는 말이 아니라 입맞춤이다” 같은 여백을 상상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평론가의 해석은 대중이 작품을 받아들이는 폭을 넓힌다. 숨을 불어넣어 생명력이 깃들게 한다. 그런 작품이 독자의 가슴에 오래 살아남는다. 물론 현재 대중문화의 영역에서 평론의 역할이 완전히 소멸한 것은 아니다. 포털 사이트가 제공하는 전문가 평점이나 영화 리뷰 사이트 ‘로튼토마토(Rotten Tomatoes)’의 토마토 미터, 영화 전문 채널에서 제공하는 클립 형태의 영화 리뷰에서 평론가의 코멘트와 평점은 기능한다. 다만 서사가 배제된 단편적이고 피상적인 평론의 부스러기가 비평이 지속될 토양을 해치진 않을까, 독자로서 염려될 뿐이다. 그래서 영화 비평 전문지를 표방하는 <필로(FILO)>의 창간이 반가웠다. 편집장을 맡은 이후경은 “과거에나 현재나 영화 평론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자신의 몸과 마음을 걸고 한 편의 영화와 함께 활동해보도록 한다는 데 있는 것 같다”며 “지면 영화 비평의 필요에 공감하고 지속을 응원하는 사람들이 모여 창간을 도모했다”고 <필로>의 창간 이유를 밝혔다. 그 답에 마음이 울렸다. 비평은 작품을 할퀴어 생채기를 내는 것이 아니라 저변을 넓히고 독자에게 맛과 향을 더하는 일이다. 아마도 그게 그리워서 기억 속 리스트를 끄집어낸 것인지도 모르겠다.

<평론가가 점치는 평론의 미래>
좋은 비평은 문학을 풍요롭게 하는 데 기여하지만, 나쁜 비평은 창작자에게 빌붙어 연명한다. 하지만 오늘날 문학 현장에서 좋은 비평을 찾아 읽기는 매우 힘들다. 1990년 문학평론가 김현의 사후 한국 문학에서 비평은 적막하다. 문학비평은 시종 내리막길이고, 그 쇠락의 기미는 우려할 만하다. 많은 재능 있는 평론가가 문학을 등지고 떠나 ‘문화’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과거에는 김현이나 김우창 같은 걸출한 비평가의 새 비평집이 나올 때마다 사회적 반향이 컸다. 비평을 쓰려는 이들뿐 아니라 문학에 관심을 둔 이들이 너도나도 구해 읽었다. 하지만 지금은 새 비평집이 나와도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이제 비평집은 대학교수 임용을 위한 성과물 중 일부일 따름이다. 과거의 비평에 덧씌워진 찬란한 후광이 사라지고, 문학 엔터테인먼트의 한 곁가지로 전락한 시대에 비평의 쇠락과 죽음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지금이라도 문학평론이 살아남으려면 ‘장르로서의 비평’이라는 위상을 회복하고, 새로운 문학의 부흥에 보탬이 되는 독창성의 길을 되찾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금욕적인 노고와 열정을 갖고 새롭게 쏟아져 나오는 창작품을 부지런히 찾아 읽고 그에 대해 바르고 곧은 정금(正金) 같은 비평을 하는 이가 많이 나와야 한다. 오늘의 비평에 널리 퍼져 있는 아마추어리즘, 그리고 하향 평준화된 비평의 수준을 깨고 도약하는 빼어난 비평가, 더 나아가 분화와 파편화의 시대에 삶과 세계를 전체로서 아우르며 그것을 통찰해낼 수 있는 지혜의 눈을 가진 비평가가 더 많이 나와야 한다. _ 문학평론가 장석주
내게 비평이란 ‘다르게 보고, 맥락을 찾아내는 것’이다. 내게 비평은 지도를 그리거나 사냥을 하는 일과 같다. 눈 속에서 커다란 발자국을 추적하거나 산맥을 따라 그림을 그려가는 사람이야말로 내게는 비평가의 실루엣이다. 근대 이후 자본주의 시장에 편입된 예술은 이전과 다른 ‘먹고사니즘’ 혹은 새로운 수익 모델을 발명해야 했다. 그게 바로 ‘대중’이다. 그런데 그들을 소비자로 바꾸기 위해서는 일종의 계몽(교양)이 필요했으므로 비평은 대중매체와 결착해 중간자 역할을 도맡았다. 현대의 비평이란 사실상 ‘소비자를 위한 구매 가이드’이자 보기 좋은 ‘가정용 장식품’ 같은 것이다(그게 나쁘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그런데 비평이 사라졌다니? 오히려 사라진 건 대중매체거나 직업적 비평가일 것이다. 우리는 대체로 비평을 오해한다. 흔히 현상보다 본질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정작 그게 어딘가 웅크리고 있다는 건 쉽게 잊는다. 결론부터 말하면 내게 비평의 소멸은 사실상 ‘직업적 비평가의 소멸’이고, 비평의 본질은 ‘비평적 관점’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시대에 ‘비평이 사라졌다’고 말하는 건 비평가들이 사라졌다는 뜻이지, 정말로 비평이 사라진 건 아니다. 본질, 그러니까 비평이 아니라 비평적 관점에 주목할 때 이 게임은 달라질 수 있다. _ 음악평론가 차우진
현재 대중문화 산업에서 영화 평론이 나아가야 할 길은 무엇인가? 이 지면에 주어진 질문은 두 가지를 전제하고 있다. 하나는 영화 평론이 대중문화 산업 어딘가에 위치해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영화 평론이 그 위치에서 어딘가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좋은 영화 평론의 장을 꿈꾸는 나에게는 두 가지 전제 모두 문제적으로 느껴진다. 우선, 좋은 영화 평론은 허상과 범주를 경계하기 때문이다. 21세기 들어 ‘대중’, ‘문화’, ‘산업’이란 말 자체의 범위와 실체를 규정하기가 훨씬 까다로워졌다. ‘영화’나 ‘평론’도 다분히 혼종적 작업의 영역이다. 그러니 대중문화 산업과 영화 평론의 관계도 개별 영화 평론이 필요할 때마다 지시 대상을 구체화하고 상호 관계를 검토함으로써 파악될 수 있을 뿐이다. 또한 좋은 영화 평론은 계획과 의무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미지에서 헤매길 마다하지 않고 규범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애쓸 때, 영화 평론은 영화와 함께 최선을 다해 살아 움직이려는 평론이 될 수 있다. 어떤 방향으로 갈지 스스로 정해놓고 따라가는 영화 평론,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고 스스로 믿어 의심치 않는 영화평론은 차라리 이론이나 논설이다. 한 명의 필자이자 독자로서 영화 평론의 미래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좋은 영화 평론이 많아지길 바란다는 정도다. 영화 평론이 대중문화 산업이라는 울타리에 연연하지 않고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한 책무에서 벗어나 마구 활동하는 무언가로 존재한다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_ 영화평론가 이후경
에디터 조재국(jeju@nobless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