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쉐는 배신하지 않는다
스웨덴 말뫼에서 718 카이맨을 만났다. 바꿔 단 4기통 엔진을 걱정했지만 기우였다. 포르쉐는 여전히 포르쉐였다.
718 카이맨의 시그너처 컬러는 스카이 블루다. 사진보다 실물이 백배 더 멋스럽다.
스웨덴 남단의 소도시 말뫼는 25만 명 정도가 거주하는 작고 아담한 도시다. 한산한 도시였지만 이 작은 도시의 이름을 기억하는 한국인이 꽤 될 것이다. 맞다. ‘말뫼의 눈물’로 기억하는 바로 그 도시다. 지난 2002년 말뫼의 조선업체 코쿰스(Kockums)가 경영 악화로 높이 128m에 달하는 거대한 크레인을 매물로 내놨고, 현대중공업이 막대한 해체 비용을 부담하는 조건으로 단돈 1달러에 이 크레인을 사들였다. 한때 조선업 강국이던 스웨덴인들이 이 모습을 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해서 ‘말뫼의 눈물’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15년 전 말뫼가 겪은 일을 지금 한국이 똑같이 겪고 있는 것이 착잡했지만, 기자단 눈앞에는 신형 718 카이맨이 아름답게 도열해 있었다. 공교롭게도 말뫼 공항에 도착한 건 한국 시각으로 7월 18일이었다.


718 카이맨은 페이스리프트 버전이지만 생각보다 변화의 폭이 크다. 전면부의 LED 램프는 LED 4개를 추가해 선명함을 더하고, 테일램프 사이는 블랙 바로 연결해 718만의 개성을 추구했다. 주행 모드 변경 다이얼은 911처럼 스티어링 휠 옆에 붙어 있다.

718 라벨을 단 카이맨은 포르쉐에도 여러모로 의미가 있는 모델이다. 포르쉐의 상징과도 같은 6기통 박서 엔진을 버리고 4기통 터보 엔진을 달아서다. 포르쉐와 4기통은 어쩐지 어색한 조합이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배기가스와 연비 개선이 모든 브랜드의 공통 화두로 떠오른 지금, 포르쉐라고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포르쉐가 4기통 엔진을 장착했다는 것이 아니라, 포르쉐는 여전히 포르쉐인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포르쉐는 이번에도 우리를 배신하지 않았다. 718 카이맨은 몇 달 앞서 출시한 718 박스터와 마찬가지로 풀 체인지 모델이 아니라 페이스리프트 모델이다. 전체적인 구성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다만 앞뒤 램프와 범퍼에 가벼운 외과 수술을 진행했다. 전면부의 헤드램프는 LED 4개로 아이라인을 선명하게 살렸다. 프런트 범퍼의 흡기구를 좀 더 키웠고 LED 방향지시등에도 가벼운 변화를 줬다. 엉덩이의 테일램프 역시 디자인 변화로 입체감을 강조했고, 테일램프 사이는 블랙 컬러 바로 연결했다. 따지고 보면 한눈에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꽤 큰 변화다. 외관과 달리 실내는 거의 바뀌지 않았다. 다만 (911에 적용한 바 있는) 주행 모드를 바꿀 수 있는 버튼을 탑재한 스티어링 휠과 새로운 인포테인먼트 시스템을 적용한 것 등이 차이점이다.

718 카이맨은 트랙과 공도에서 그 성격이 극적으로 변한다. 트랙에서는 완벽에 가까운 드라이빙 머신으로, 공도를 달릴 때는 경쾌한 데일리 스포츠카로 변신한다. 이 완벽한 이중생활이 718 시리즈의 가장 큰 특징이다.
이튿날 우리는 말뫼에서 약 1시간 거리에 있는 스투루프 레이스웨이(Sturup Raceway)라는 트랙으로 향했다. 큰 트랙은 아니지만 상하좌우의 굴곡이 심해 카이맨의 운동 성능을 체감하기에는 제격이었다. 이곳에서 우리는 카이맨 기본형과 카이맨 S를 모두 타볼 수 있었다. 카이맨 기본형은 2리터 4기통 수평대향 엔진으로 최대출력 300마력을 발휘한다.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km까지 도달하는 시간은 4.7초. 고급형인 카이맨 S는 325마력, 4.2초의 수치를 기록한다. 다운사이징에도 불구하고 두 모델 모두 이전 모델 대비 25마력 더 강한 힘을 낸다. 포르쉐의 기술력이 빚어낸 결과다.뒤통수 가까이서 들려오는 배기음을 뒤로하고 힘차게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며 트랙을 달렸다. 포르쉐를 타고 트랙을 달리면 늘 약간의 패배감을 느끼게 된다. ‘내가 정말 이 차를 100% 활용하고 있는 게 맞나?’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4기통 터보 엔진이라는 걸 체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파워와 이상적인 몸놀림이었지만 여전히 이 차를 한계까지 밀어붙였다는 확신은 들지 않았다. 최고의 레이싱 머신이라는 걸 새삼 확인했을 뿐이다.


프런트 범퍼의 흡기구가 꽤 넓어졌고, 테일램프도 디자인에 변화를 줬다. 기어 박스 디자인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718 카이맨의 다른 영역을 느낀 건 트랙을 떠나 스웨덴의 좁은 국도를 운전했을 때다. 말뫼 외곽 지역은 고속으로 빠르게 달릴 수 있는 구간이 아니었다. 도로의 폭이 좁고 아리랑 고개처럼 상하 굴곡도 심했다. 심지어 풍경마저 목가적이었다. 포르쉐가 이런 시승 코스를 준비한 건 718 카이맨이 마냥 사나운 차가 아니라 충분히 안락할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일 것이다. 노멀 모드로 주행할 때 이 차는 출신을 의심할 만큼 굉장히 조용하고 편하다. 일상 주행 시의 스트레스를 없애는 건 요즘 스포츠카들의 공통된 특징이다. 평상시에는 편하게, 달리고 싶을 때는 광폭하게. 마니아들은 아쉬워하지만 브랜드 입장에서는 당연한 선택이다. 21세기의 스포츠카는 소수가 아닌 다수의 만족을 지향한다. 언제든 미친 듯이 달릴 수 있다는 잠재력 자체가 구매 포인트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718 카이맨은 포르쉐의 스포츠카 중에서 주행 모드에 따른 성격 차이가 가장 크게 느껴진다. 노멀 모드에서는 담백한 애인 같지만, 스포트 플러스 모드로 바꾸면 짜릿한 비명을 내지르는 요부로 변한다. 이런 이중성이 718 카이맨의 가장 큰 특징이다.
저녁식사 시간에 한국 기자단의 테이블에 앉은 건 섀시 책임자였다. 718 카이맨은 섀시 구조를 완전히 새롭게 디자인했다. 묻고 싶었다. 우리가 느낀 게 의도한 바인지. “맞아요. 섀시 구조를 새로 디자인하면서 생각한 건 주행의 정교함을 강화하는 거였어요. 고속과 저속 모두에서 말이죠. 실제로 718 카이맨은 도로 상태에 따른 스프링 응답성도 강화했기 때문에 운전자가 더 안락하게 느낄 겁니다. 물론 고속에서는 두말할 것 없죠.” 지금까지 포르쉐는 쿠페형인 카이맨을 컨버터블인 박스터보다 비싼 가격에 팔았다. 하지만 718 시리즈에서는 그 순위가 뒤바뀐다. 718 카이맨이 박스터보다 싼 가격에 팔리게 되며 엔트리 모델로서 역할을 하게 된다. 그건 카이맨이 가장 많이 팔리는 모델이 될 거라는 뜻이다. 포르쉐는 2016년 상반기 차량 판매율이 3%나 늘었다. 카이맨이 본격적으로 고객에게 인도되는 하반기에는 아마 더욱 높은 성장세를 기록할 것이다. 포르쉐의 승승장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식사 시간에 만난 포르쉐의 스태프는 말했다. “포르쉐는 다른 브랜드와 비교하지 않아요. 늘 이전 포르쉐가 비교 대상이죠. 우리가 최고니까요.” 허세가 아니었다. 자부심이었다. 포르쉐가 한 번도 우리를 배신하지 않았던 이유다.
에디터 | 이기원 (lkw@noblesse.com)
사진 제공 | 포르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