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뮤지엄 시대
미술관의 영역을 넘어 복합 문화 공간으로 변신한 새로운 미술관 시대가 도래했다.
경기도미술관이 건물 내벽을 활용해 설치한 이상남 작가의 ‘풍경의 알고리즘’. 매끄러운 바탕 위에 원과 직선을 변형한 각종 기하학적 형상이 공간을 리드미컬하게 한다.
지난여름, 서울 중구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에서 열린 <피스마이너스원: 무대를 넘어서>전 기자간담회는 문화 예술계에서 작지 않은 이슈였다. 전시를 통해 빅뱅 지드래곤의 음악 세계에 국내외 아티스트 10여 팀이 참여한 현대미술 작품을 접목해 팝 뮤직과 시각예술의 창의적 키워드를 제시하겠다는 내용. “‘포스트-뮤지엄’이라는 비전에 따라 관행적이고 제도적이던 미술관 전시의 한계를 극복하고, 누구든 향유할 수 있는 낮은 문턱의 전시장이 되기를 바랍니다.” 서울시립미술관 김홍희 관장의 이 발언은 “대형 기획사 소속의 아이돌 스타가 공공 미술관과 벌인 상업적 기획으로 미술관이 기업 홍보관으로 전락한 경우”라며 일부 언론사로부터 비난의 화살을 맞기도 했다. 그러나 미술관의 애초 목적과 마찬가지로 시민과 현대미술 사이의 간극을 좁히려는 파격적인 실험을 공공 미술관에서 해왔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반응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포스트-뮤지엄’은 어떤 방향을 바라봐야 하는 것일까? 먼저 포스트-뮤지엄이란 ‘미술을 넘어 다양한 매체와 장르를 예술로 수용하는 미술관’을 의미한다. 교육이나 계몽 등의 1차원적인 기능뿐 아니라 지역 주민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역할도 맡는다. 지난 10월 수원 화성행궁 옆자리에 개관한 수원시 첫 시립 미술관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이 내세운 주요 과제도 그것. 어린이, 60세 이상 장년층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과 시민 참여 특별전, 지역 미술 작가전 등의 전시는 상대적으로 문화 약자에 속하던 이들에게 소통의 장을 열어준다. 그뿐 아니라 개방형 정원과 미술관 앞 부지는 수원 시민의 새로운 문화 쉼터가 되었다는 점에서 포스트-뮤지엄의 전형적 개념을 제시한다고 할 수 있다.
미술관이 복합 문화 공간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동시대의 예술 경향에 따라 전시, 퍼포먼스, 필름, 강연 등 다채로운 매체를 소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미술관 설계 단계부터 계획적인 움직임이 필요하다. 내년 4월 논현동에 개관하는 플랫폼-엘 컨템포러리 아트센터는 루이까또즈(㈜태진인터내셔널)의 문화 예술 후원 사업 기반의 아트 센터다. 196석의 객석을 갖춘 라이브홀과 2개 층의 화이트 큐브 형태 전시장은 각각 공연과 전시 중심으로 활용되지만 기획에 따라 공간의 용도를 바꿀 수 있는 가변성이 있다. 두 공간 사이에 마련한 열린 공간은 대화의 장을 열거나 필름 상영관, 이벤트 존으로 활용할 예정. 여러 프로그램을 수용할 수 있는 덕에 국내외 작가의 개인전은 물론 디자인과 건축을 결합한 기획전, 큐레이팅의 실험적 성격을 강조한 대규모 전시, 시각예술과 퍼포먼스 협업 전시와 페스티벌 등을 개최할 수 있다. 이는 관람객뿐 아니라 창작 인프라가 취약한 예술계에도 반가운 공간이다. 미술관에 새바람을 불어넣는 것이 최근의 일만은 아니다. 1960년대에 박물관 연구가 후퍼 그린힐은 포스트-뮤지엄 이론을 설명하면서 “미술관은 전시에서 교육으로, 일방적 교육에서 쌍방향적 교류로 소통 범위를 확대해갈 때 더욱 큰 성과가 있다”며 일찌감치 변화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특히 공공 미술관의 경우 공공 기금을 지원받는 공적 기관으로 예술성, 공공성, 대중성이 만나는 문화의 장이라는 점에 어느 정도 책임을 부여받는다. 내년 개관 10주년을 맞는 경기도미술관은 개관 초기부터 미술관의 새 역할에 주목했다. 예술 감상과 학습에 이어 예술 행위에 동참하길 원하는 관람객의 욕구를 파악해 전문적이고 대중적인 동시에 새로운 경험을 제공하는 미술관을 지향했다. <경기 아트 프로젝트>, <크로스 장르>, <가족 체험>전 등의 기획전과 민화 강좌, 명사 초청 특강, 공공 미술 아카데미는 미술관이 자랑스럽게 내놓은 프로그램이다. 미술관의 역할 중 하나인 교육 활동을 충실히 수행한 결과 관람객은 이곳에서 더욱 적극적으로 문화 예술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럼 우리보다 먼저 미술관의 형태와 기능을 고민해온 해외에서는 어떤 일이 발생했을까?
루이 비통 재단 미술관에서 열린 알바니아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 테디 파파브라미의 연주회

브로드 뮤지엄의 멀티미디어 갤러리

내년 4월 개관을 앞둔 플랫폼-엘 컨템포러리 아트센터의 외관도
해외에서는 지난 9월 세계 10대 컬렉터이자 기부 사업가인 엘리 브로드가 LA에 개관한 브로드 미술관이 핫이슈다. 먼저 현대미술의 대명사로 꼽히는 작가의 작품을 한데 모은 것만으로도 입이 벌어진다. 게다가 1400㎡의 3층 규모 전시장은 엄청난 넓이에도 기둥 하나 없이 설계한 모습. 규모나 형태가 예측 불허인 현대미술품의 전시 효과를 높이고 싶었기 때문이다. 전시장, 강의실, 멀티미디어 갤러리 외에도 퍼블릭 로비에 갖춘 미술품 연구실과 스토어, 커피숍 등 다양한 문화 공간은 몇 주 전부터 예약하지 않고는 입장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LA 시민과 관람객을 끌어들일 수 있는 원동력이다. 또한 뉴욕 현대미술관(MoMA)의 분관인 MoMA PS1은 매년 50회 이상의 실험적이고 파격적인 전시, 음악 공연을 개최한다. 오래전 세운 초등학교를 개조해 옛 모습을 간직한 이색적인 공간과 MoMA 스토어, 오픈 스페이스 등 즐길 거리에서는 전시만큼이나 흥미로운 기운이 맴돈다. 파리의 대표적 현대미술관 퐁피두 센터는 어떤가. 최고층에 파리 시내의 전경을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와 수많은 거리 예술가들이 공연을 펼치는 대중적인 야외 공간 ‘조르주 퐁피두 광장’을 갖추어 1년에 700만 명에 육박하는 방문객이 다녀가는 문화 명소가 되었다.
이처럼 포스트-뮤지엄을 향한 걸음은 전 세계 도시의 미술관에서 만날 수 있다. 하지만 미술관의 장벽을 낮추려는 시도인 만큼 대중성을 좇아 상업성 짙은 주제를 기획하거나 다수의 입맛에 맞춘 프로그램을 선정해 작품의 질이 하향화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미술관의 기본적 역할은 예술가와 관람객 모두를 위한 창작의 플랫폼이자 영감을 공유하는 창구가 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선 심도 있는 연구를 토대로 콘텐츠를 기획하고 예술 환경 변화를 주도하기 위해 끝없이 사유하고 바른 길을 모색해야 합니다.” 플랫폼-엘 컨템포러리 아트센터 박만우 관장의 말처럼 현시대 새로운 전시 공간을 개관하고, 포스트-뮤지엄의 비전을 갖추는 건 많은 가능성과 부담을 동시에 떠안는 일인지 모른다. 그러나 미술관의 역할이 확장될 때 관람자는 다양한 장르의 예술을 경험할 수 있고, 예술가는 영감의 제약 없이 보다 폭넓은 주제로 작업하고, 그 결과물을 다양한 장소에서 선보일 수 있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새로운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며 연구, 작가 발굴, 보급 등 미술관의 순기능을 지켜나가는 동시에 대중의 눈높이를 고려한 예술 영역의 확장이 균형 있게 이루어질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모색하려는 노력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에디터 임해경 (hklim@nobless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