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클래식발레를 묻다
익숙한 고전발레가 새로운 스타일로 찾아오는 것이 그리 드물지 않은 일이 되었다. 세계적 발레 안무가들이 고전을 재해석하는 시도는 미래의 발레 신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안무가 그램 머피가 유니버설발레단과 함께 세계 초연하는 <그램 머피의 지젤>은 기존의 <지젤>을 완전히 새롭게 해석한 작품이다.
‘클래식발레와 모던발레, 둘 중 어느 것을 선호하는가?’ 발레를 즐겨 보는 이들 사이에서 흔히 오가는 질문 중 하나다. 그 대답에 따라 발레 애호가로서 공연을 봐온 경력(?)을 판단하는 건 무리지만 취향을 가늠해볼 수는 있다. 클래식발레를 좋아하는 이들이 고전의 드라마틱한 스토리와 올곧은 선이 살아 있는 무용수들의 우아한 동작을 사랑한다면, 모던발레를 좋아하는 이들은 드라마를 그리 중시하지 않고 안무에서도 기품보다는 역동성에 끌리는 취향일 것이다. 클래식발레를 통해 발레에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지만, 다양한 작품을 접할수록 모던발레의 자유로움에 빠져드는 관객도 많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제3의 장르라 칭해야 할 것 같은 발레 공연을 종종 만나게 된다. 기존에 알던 클래식발레를 새로운 안무로 재해석하고 스토리와 캐릭터에 변화를 준 작품. 이런 시도는 현재 거장의 자리에 오른 몇몇 안무가에 의해 시작됐다.
호주 안무가 그램 머피(Graeme Murphy)는 고전에 현대성을 더하는 안무가 중 한 명이다. 그가 호주 발레단을 위해 안무한 <백조의 호수>는 기존 이야기에 영국의 다이애나 비와 찰스 왕세자, 카밀라의 삼각관계 이야기를 입히고 주인공 오데트가 정신병원에 입원한다는 이야기를 더한 파격적인 설정이었다. 그는 클래식발레 중 특히 다양한 버전이 존재하는 <호두까기 인형>에서도 클라라가 발레리나로 성장하는 이야기에 집중해 남다른 시선을 보여주었다. 그램 머피가 이번에는 낭만 발레의 대표작 <지젤>을 완전히 새롭게 해석한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유니버설발레단이 6월 13일부터 17일까지 예술의전당에서 세계 초연하는 <그램 머피의 지젤>은 기본 스토리 라인을 제외하고는 음악을 비롯해 모든 것이 바뀔 예정이다. 모던 발레의 동작을 많이 가미하고, 2막의 영적 분위기를 위해 1막에서는 토슈즈를 신지 않고 현실 세계 속 인간의 모습을 그린다고 하니 클래식과 모던의 경계에 세울 만한 발레 작품이 탄생하리란 기대가 크다.
국립발레단이 공연한 장 크리스토프마요 버전의 <로미오와 줄리엣>
안무가 장 크리스토프 마요가 몬테카를로발레단과 함께 선보인 <신데렐라>의 한 장면
한국 무대에서 신선한 방식으로 클래식발레에 접근해 대중적 관심을 끌어내며 성공한 첫 번째 케이스는 2003년 첫 내한 공연 이후 지금까지 네 차례 모두 매진 기록을 세운 매슈 본(Matthew Bourne)의 <백조의 호수>라 할 수 있다. 매슈 본은 차이콥스키의 음악을 그대로 사용하되, 백조를 남성으로 표현하고 고전발레의 엄격한 형식을 전복시키며 거친 춤사위를 선보였다. 이런 도발적인 시도는 대중성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고, 남성 앙상블에 대한 열렬한 호응으로 돌아왔다. 한국 무대에서 ‘고전 비틀기’를 시도한 또 다른 안무가로 몬테카를로발레단의 장 크리스토프 마요(Jean Christophe Maillot)를 들 수 있다. 2000년 국립발레단이 한국 초연한 마요 버전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이후 몇 차례 재공연을 했다. 그중에서도 2011년 공연은 정명훈과 서울시향이 연주한 프로코피예프의 발레 음악까지 호평을 받으며 국립발레단의 고정 레퍼토리로 자리 잡게 한 성공적 무대였다. 이 작품에서 마요는 줄리엣을 강인하고 주체적인 여성으로 그려 원작의 캐릭터와 차별화하며 극을 이끄는 중심 인물로 설정했다. 무대 디자인과 의상은 차가운 느낌이 들정도로 미니멀해 클래식발레의 장식적이고 화려한 요소를 배제하고도 충분히 멋진 무대를 연출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마요는 그 외에도 몬테카를로발레단을 이끌고 한국 무대를 찾아 유리 구두 없는 <신데렐라>와 <잠자는 숲 속의 미녀>를 재해석한 <라 벨르>를 공연하기도 했다.
아직 한 번도 내한한 적이 없지만 고전을 토대로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축한 안무가로 함부르크발레단의 존 노이마이어(John Neumeier)도 빼놓을 수 없다. 고전을 왜곡하지 않고 새로운 예술성을 더하는 그의 작업은 수많은 발레 작품에서 빛난다. 특히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에서 사이버틱한 의상을 입고 등장하는 무용수들의 안무와 무대 연출은 고전을 SF물로 둔갑시킨 것 같은 충격을 안겨준다. 그럼에도 여전히 고전미를 유지하며 가슴이 두근거릴 만큼 아름다운 작품이라는 점에서 탐미적인 것에 끌리는 발레 팬들을 만족시킨다. 그에게 세련미와 기품을 모두 갖춘 천재 안무가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 이유다.
안무가들이 클래식발레를 자신만의 버전으로 재탄생시키는 작업을 시작한 지 수십 년이 되었지만 그런 공연을 한국에 소개한 역사는 짧고,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근래의 일이다. 클래식발레를 변주하는 안무가들의 작업은 이 시대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고전 작품은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호소하는 정서와 공감할 수 있는 주제를 담고 있지만 스토리나 캐릭터는 현시대와 모순되는 부분이 적지 않다. 각색을 통해 고전을 현대인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로 바꾸고 캐릭터를 다층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포스트 클래식발레’의 주요 작업이다. 그 결과, 발레 팬이 그리 많지 않은 현실에서 발레를 단순히 지루하고 경직된 예술로 여기는 관객에게 색다른 재미를 선사하기도 한다. 예기치 못한 설정과 전개를 통해 발레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런 작업은 발레 공연의 레퍼토리를 다양하게 넓혀간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안무가들이 고전에서 영감을 받아 그것을 토대로 고전과 현대를 오가며 자신만의 무대를 창조하는 일은 발레라는 장르를 더욱 풍성하게 할 뿐 아니라 공연계를 한층 성장시킨다. 안무가 그램 머피에게 2년 전 직접 <지젤>을 재해석한 작품을 의뢰한 유니버설발레단의 문훈숙 단장은 “예술은 멈추는 순간 생명력을 잃기 때문에 끊임없이 발전하기 위해 새로움을 추구해야 한다. 그러므로 발레를 재해석하는 작업이 고전발레의 가치를 더욱 드높일 것이라 생각한다”며 포스트 클래식발레를 향한 폭넓은 실험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했다. 문화계 전반에서 일고 있는 도전적 융.복합 시도는 발레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오늘날 모두에게 익숙한 명작은 하루아침에 탄생했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명작으로 인정받기까지 짧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다. 클래식의 콘텐츠를 현시대로 끌어내는 창의적 작업이 미래에 길이 남을 명작으로 인정받을지는 지금 단언하기 어렵다. 하지만 동시대를 살고 있는 거장 안무가들의 창작 활동이 발레의 지평을 넓혀가고 있고, 보다 풍성한 공연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관객 입장에선 예상을 뒤엎는 무대를 통해 발레 예술의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며 짜릿함과 희열을 느낄 반가운 기회가 늘어난다는 것은 물론이다.
에디터 안미영 (myahn@noblesse.com)
사진 제공 유니버설발레단, 국립발레단, 몬테카를로발레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