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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보다 아름답고, 신화보다 매혹적인

LIFESTYLE

왜 그리스 와인이냐고 묻는다면, 이제 명쾌한 답을 내놓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리스 북부와 크레타 섬의 와인 산지를 돌아보며 온전히 새로운 그리스 와인의 빛나는 매력을 발견했으므로.

나우사 지역에 자리한 키르야니 빈야드 풍경

그리스로 떠나는 짐을 꾸리기 전, 처음 와인을 공부하던 시절 읽은 몇 권의 개론서를 다시 들춰봤다. 역시 그리스 와인을 소개한 지면을 찾기 위해서는 책장을 한참 넘겨야 했다. 주로 분류는 ‘기타 유럽 와인’ 혹은 ‘기타 생산지’였다. 관련 정보가 방대한 프랑스나 이탈리아와는 당연히 비할 바 아니고, 신세계 와인 산지인 호주나 뉴질랜드보다도 정보가 한참 부족하다. 그리스 와인이 세계 무대에 등장한 것이 불과 25년 전이라는 점을 상기하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사실 그리스는 그 어느 곳보다 와인 문화가 오래됐다. 그 유명한 <와인 바이블>의 저자 캐빈 즈랠리조차 역사를 전공하던 시절 고대 그리스의 주신(酒神) 디오니소스에 대해 배운 것이 와인을 공부하기로 결심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고 고백했을 정도니까.
그리스는 술의 신이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은, 와인 숭배의 정신이 살아 있는 나라다. 이곳에서 포도 재배를 시작한 것은 기원전 3500~2900년경. 그리스인이 로마인에게 포도 재배법을 전수했고, 로마인이 이를 유럽에 퍼뜨렸다는 기록이다. 역사적으로 다른 와인 생산국보다 앞서지만 명성이 그에 미치지 못하는 건 생산량이 많지 않아 수출보다는 자국 시장 의존도가 높았기 때문. 그리스는 1981년 EU에 가입한 이후 세계시장에 진출하기 위해 포도원에 막대한 예산을 투자하며 와인 산업을 현대화했다. 곧이어 프랑스의 원산지 통제 명칭 AOC와 같은 원산지 명칭 보호인 PDO(Protected Designation of Origin)와 지리적 보호인 PGI(Protected Geographical Indication)를 체계적으로 분류하며 원산지 제도도 시행하기 시작했다.
세계 곳곳에서 뛰어난 와인을 생산하며 점차 ‘테루아’라는 개념의 중요도가 낮아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국가 전역의 다양한 토양에서 포도를 재배하는 그리스는 진정으로 테루아를 논할 수 있는 생산국일지도 모른다. 최근 와인 애호가들이 그리스 와인의 개성 있는 토착 품종과 뛰어난 퀄리티를 주목하며 숨은 보물 같은 와인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그리스로 향하고 있다. 와인에 관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나라가 미지의 탐험지로 떠오른 것이다. 과연 어떤 땅에서 어떤 생산자들이 어떤 철학으로 와인을 빚고 있을까? 이번 와인 투어 역시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은 그리스 와인을 현지에서 가까이 만나는 시간이었다.

알파 이스테이트에서 생산하는 와인. 일부는 한국에서도 수입한다.

토착 품종의 천국을 밟다
그리스 제2의 도시이자 북부의 항만도시 테살로니키에 도착한 것은 4월 첫날 아침, 잠시나마 맑은 공기와 찬란한 햇살을 만끽하기 위해 해변가로 나섰다. 바다를 마주한 레스토랑에서 주말 브런치를 즐기는 사람들, 따뜻한 햇살 아래 조깅을 하는 사람들 사이를 걷다 수십개의 우산이 하늘을 향해 날아가는 듯한 거대한 설치 작품과 마주쳤다. 그리스 조각가 게오르게 종골로풀로스(George Zongolopoulos)의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 출품작 ‘Umbrellas’는 테살로니키 해안거리에 설치한 후 이곳을 대표하는 풍경이 됐다. 그리고 해변 끝에 다다르자 나타난 현대미술관에서는 지난 1월 작고한 존 버거의 회고전이 열리고 있었다. 해안 거리를 걷는 짧은 시간 동안 느낀 그리스의 첫인상은 고대 유적지와 현대 예술이 조화를 이룬 곳이라는 점. 유구한 와인 역사를 배경으로 최신 양조 기술을 통해 생산하는 그리스 와인 또한 마찬가지리란 기대감이 들었다.

1 나우사 지역의 와인 생산자들과 만나고 그들의 와인을 시음한 시간   2 부타리 와이너리에서 생산하는 프리미엄 와인

그리스 와인과의 첫 만남은 테이스팅 글라스와 지도를 펼쳐둔 자리에서 생소한 포도 품종에 대한 설명을 듣는 것으로 시작됐다. 토착 품종이 강세를 보이는 와인 생산국은 이탈리아만 꼽던 것이 짧은 지식의 산물이었다는 것을 금세 깨달았다. 멸종한 품종까지 되살려 와인을 생산하고 있는 그리스 또한 토착 품종의 천국이라 할 수 있다. 테이스팅을 하며 당장 이름과 특징을 익히기 시작한 몇 가지 포도 품종은 아기오르기티코(Agiorgitiko), 시노마브로(Xinomavro), 말라구지아(Malagousia), 아시르티코(Assyrtiko), 로디티스(Roditis) 등. 국제 품종인 카베르네 소비뇽, 시라, 소비뇽 블랑 등으로 와인을 만드는 생산자도 있지만 대부분은 자국의 토착 품종으로 세계의 프리미엄 와인과 정면 승부하고 있다.
이튿날, 그리스 북부 와인 산지의 첫 투어로 나우사(Naoussa) 지역을 향해 떠났다. 빈야드가 내려다보이는 와이너리 건물에 도착하자마자 탄성을 질렀다. 하늘은 파랗고, 밭은 초록인 당연한 색의 조합이 이렇게 감동적일 줄이야. 선명한 자연의 색 앞에서 잠시 심호흡을 하며 맑은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그리스 전체 와인 산업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북부 와인 산지는 뛰어난 퀄리티의 와인을 생산해 명성을 쌓아가고 있는 고급 와인의 중심지라 할 수 있다. 특히 나우사는 시노마브로 품종으로 유명한 지역. ‘xino’는 ‘시다’는 뜻이고 ‘mavro’는 ‘검다’는 뜻이다. 이 지역의 키르야니(Kir-Yianni)와 부타리(Boutari) 와이너리를 방문해 시음한 와인은 모두 시노마브로 특유의 강건한 구조감이 돋보이며 타닌이 풍부한 와인이었다. 그런데 여러 와인을 시음하며 시노마브로를 조금씩 알아갈 무렵, 이 품종은 놀라운 반전을 선보였다. 묵직한 레드 와인만 생산하는 줄 알았는데 웬걸, 딸기 향과 체리 향을 머금은 아름다운 로제 스파클링이 등장한 것. 토착 품종으로 ‘실험’을 계속하고 있다는 와인메이커의 설명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가족 경영 와이너리 키르야니의 5대째 생산자이자 그리스 북부 와인협회 회장인 스텔리오스 부타리(Stellios Boutaris)는 “현재 유럽에서는 대부분 그리스만의 포도 품종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관광객도 그리스에 오면 일반적 국제 품종보다 그리스 고유의 와인을 추천해달라고 요청한다. 국제 품종에 주력하는 것보다는 토착 품종의 성격을 잘 개발해 보여주는 것이 경쟁력 있다”며 그리스 와인의 방향성과 가능성에 대해 언급했다.
다음 날에는 북부의 또 다른 주요 생산지인 아민데온(Amyndeon)을 방문해 해발 700m에 위치한 키르야니 와이너리의 사마로페트라(Samaropetra) 빈야드에 올랐다. 아민데온은 그리스에서 가장 기온이 낮은 와인 산지. 갑작스레 다시 겨울을 맞은 것 같은 날씨로 인한 당혹감을 달래준 건 빈야드 정상에 마련한 테이스팅 테이블에 놓인 스파클링 와인이었다. 찬 공기와 함께 마신 한잔의 스파클링 와인이 몸과 정신의 감각을 깨웠다. 그리스는 전형적인 지중해성 기후를 보이는 지역이 많지만 아민데온은 대륙성 기후에 속하며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리고 여름에도 비교적 서늘하다. 이런 기후 때문에 이 빈야드에서는 모두 백포도 품종을 재배한다. 아시르티코와 말라구지아가 이곳에서 자라는 토착 품종.

3 알파 이스테이트의 와인 숙성실. 대부분 프렌치 오크 배럴을 사용한다.   4 와이너리에서 와인을 병입할 보틀에 문제가 없는지 검사하는 단계

아민데온 지역은 척박한 모래 토양이 많아, 유럽의 포도밭을 황폐화하며 와인 역사의 암흑기를 연 필록세라(포도나무 뿌리를 공격해 죽게 하는 진드기의 일종)의 피해가 없었던 땅이다. 그 덕분에 이곳에 자리한 알파 이스테이트(Alpha Estate)에서는 90년 이상 된 시노마브로 올드바인을 만날 수 있었다. 수령이 많아 수확량은 적지만 그만큼 집중도가 뛰어난 와인이 탄생한다. 와이너리에서 시음한 알파 시노마브로 리저브 비에유 비뉴(Alpha Xinomavro Reserve Vieilles Vignes)가 그런 올드바인의 매력을 내뿜는 와인이었다. 나무를 직접 보고 만진 직후의 시음이라 그랬을까. 온갖 풍파를 겪어내며 90여 년을 살아온 늙은 포도나무의 연륜이 느껴지는 듯했다.

드라마 지역의 도멘 코스타 라자리디. 건물 곳곳에서 대리석 장식이 보인다.

그리스에서, 이런 드라마
드라마(Drama) 지역으로 떠나는 날, 이동하던 차안에서 누군가가 드라마 지역은 분명히 드라마틱할거라는 ‘평범한’ 농담을 했다. 그런데 그 말은 농담이 아니라 잠시 후 눈앞에 펼쳐진 현실이 됐다. 이 지역에서 방문한 세 곳의 와이너리, 도멘 코스타 라자리디(Domaine Costa Lazaridi)와 크티마 파블리디스(Ktima Pavlidis), 그리고 와인 아트 이스테이트(Wine Art Estate)에서 흔히 보이는 것은 다름 아닌 대리석이었다. 이 지역이 본래 그리스에서 대리석 산업으로 유명한 지역이기 때문. 와이너리의 소유주 중에도 대리석 사업으로 재산을 축적했다는 이들이 많았다. 드라마는 최근 급격하게 성장한 신생 와인 산지로, 역사가 짧은 만큼 최신 양조 시설을 갖추고 모던한 스타일의 와인을 생산하고 있다. 특히 와인 아트 이스테이트는 첨단 시스템을 공개하기도 했다. 발효 탱크의 상태를 확인하고 온도를 조절하는 등 모든 모니터링 작업이 컴퓨터뿐 아니라 모바일로도 어디서나 가능한 것. 드라마 지역은 나우사나 아민데온 지역 같은 오랜 전통이나 환경이 없는 대신, 설립자와 와인메이커 등 선구적인 사람의 노력으로 새로운 스타일을 만들어가고 있다.

5 사마로페트라 빈야드의 정상에 올라 시음한 스파클링 와인   6 드라마 지역의 크티마 파블리디스 와이너리 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빈야드

크티마 파블리디스의 와인메이커는 이 지역이 그리스의 다른 지역에 비해 국제 품종의 생산이 많은편이지만 점차 토착 품종으로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크티마 파블리디스에서 생산하는 파블리디스 이스테이스 엠퍼시스 아기오르기티코(Pavlidis Estate Emphasis Agiorgitiko)는 수확량을 극도로 제한해 응축된 포도로 연간 2500병만 생산하고 모두 수출한다. 와이너리의 큰 규모와 시설에 비해 전체 생산량이 매우 적은 이 와이너리의 양조 과정은 현대적 기술력을 사용하되, 땅과 교감한다는 진정한 장인정신이 담긴 듯했다.
크티마 파블리디스 건물 앞에서 만난 풍경은 구름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이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약속이라도 한 듯 모두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내가 여기 왔다는 ‘인증샷’이 아니라 이곳이 이토록 드라마틱하게 아름답다는, 놓칠 수 없는 ‘기록’이었다.

게로바실리우가 운영하는 와인 뮤지엄에 전시된 2500여 개의 코르크스크루

기억해야 할 화이트, 그리고 새로운 트렌드
그리스 북부를 떠나기 전 귀한 만남의 기회가 있었다. 크티마 게로바실리우(Ktima Gerovassiliou)에서 와이너리의 설립자 에반겔로스 게로바실리우(Evangelos Gerovassiliou)와 만난 것이다. 테이스팅에 앞서 와이너리에 자리한 와인 뮤지엄을 둘러보며 2500점이 넘는 코르크스크루를 포함한 그의 어마어마한 컬렉션에 감탄했다. 박물관에서도 알 수 있듯, 그는 그리스 와인의 유산을 지키고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리기 위한 일을 하나하나 실행에 옮긴 최초의 인물로 꼽힌다. 그리스 와인의 거장이자 뛰어난 화이트 와인 생산자로 유명한 그는 토착 품종의 가능성을 믿고 거의 멸종되다시피 한 백포도 품종 말라구지아를 되살렸는데, 지금은 이 품종을 그리스 전역에서 재배하고 있다. 그는 “기술이 발전해도 좋은 포도와 그것이 생산되는 자연환경이 더 중요하다. 20년 가까운 연구를 통해 말라구지아를 개량했고, 1992년 다른 사람들에게 가지를 나눠줬다. 잘 팔리는 와인이 아니라 품질 좋은 와인을 만드는 것이 목표다”라고 했다. 말라구지아 50%와 아시르티코 50%를 블렌딩한 게로바실리우의 화이트 와인은 기본급임에도 두 품종의 아로마와 산도, 구조감이 어우러지며 깊은 인상을 남겼다.

7 지금까지 250종의 상을 수상한 와인 아트 이스테이트의 내부   8 크티마 파블리디스의 와인메이커 파나지오티스 키리아키디스(Panagiotis Kyriakidis)가 양조 과정을 설명하는 모습

그리스 와인 산지를 여행하며 매력적인 레드 와인도 많이 만났지만 전체 생산량의 70%에 달하는 화이트 와인의 다채로움은 실로 놀라웠다. 동시에 매력적인 그리스의 로제 와인도 주목할 만했다. 한국에서는 아직 큰 인기를 누리지 못하고 있지만 로제 와인은 현재 전 세계적 트렌드로 떠올랐다. 그리스에서도 점차 대중화되고 있는 추세이며 아기오르기티코, 시노마브로, 모스코필레로, 로디티스 등은 로제 와인으로도 훌륭한 스타일을 보여준다. 그리스에서 만난 여러 양조자는 아름다운 컬러를 뽑아내는 자신만의 방법을 설명하며 로제 와인에 대한 열정을 드러냈다.
또 한 가지 트렌드를 꼽자면 오거닉이 될 것이다. 투어의 마지막 일정으로 방문한 크레타 섬의 도멘 파테리아나키(Domaine Paterianaki)에서는 농약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유기농 와인을 생산하고 있다. 이것이 가능한 가장 큰 이유는 ‘환경’이다. 크레타 섬의 좋은 포도밭은 대부분 고지대에 자리하는데, 도멘 파테리아나키가 소유한 빈야드의 경우 북풍을 마주하는 경사면에 포도밭을 조성해 병충해로부터 자유롭다는 것. 이처럼 질병의 위험이 낮은 환경과 적은 생산량을 수작업으로 관리하는 작업 방식을 고수하는 생산자의 철학이 만나 유기농법을 꾸준히 시도하고 있으며, 일부 생산자는 천체와 계절의 흐름에 따라 포도를 재배하는 바이오다이내믹 농법으로도 나아가고 있다.

9 유기농 와인을 생산하는 도멘 파테리아나키 입구 10 고지대 경사면에 자리한 도멘 파테리아나키 빈야드

오래된 신화의 나라는 이제 와인으로 잔잔한 혁신을 주도하는 중이다. 위대한 테루아의 유산을 간직한 채 다양한 품종으로 고유의 개성을 빚어낸 와인을 생산하는 그리스 와이너리를 둘러보고 나니 “와인메이킹은 곧 예술”이라고 수차례 강조한 여러 생산자의 말에 깊이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하긴, 그것은 그리스로 떠나기 전까지 잠시 잊고 있던 사실이기도 하다. 와인이 문화 예술 그 자체가 아니고 무엇이던가.

11 크레타 섬에 자리한 도멘 파테리아나키의 로제 와인과 화이트 와인   12 그리스 와인의 거장으로 꼽히는 에반겔로스 게로바실리우

 

에디터 안미영(myahn@noblesse.com)
사진 윤동길  취재 협조 엔터프라이즈 그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