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임 밖의 영화
무성 흑백필름에서 시작한 영화는 이제 360도 3D 영상을 구현하는 VR 영화로 진화했다. 2D 스크린으로 구현할 수 없는 새로운 기술의 출현과 더불어 우린 무한한 가능성과 함께 영화를 감상하는 시설의 한계를 마주하고 있다. 아직 갈 길이 먼 미래, 과연 역동적인 신세계를 만날 수 있을까?

단순한 감상이 아닌 감각적 체험이 가능한 VR 영화.
때론 홀로 혹은 친구와 함께 심심풀이로 즐기는 영화. 우린 언제부터 영화를 일상 속에서 향유하게 된 걸까? 세계 최초의 영화는 프랑스 뤼미에르 형제가 1895년 선보인 <열차의 도착>으로, 50초 내외의 짧은 분량이지만 당시에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이렇듯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무성 흑백필름으로 시작한 영화는 컬러 필름과 사운드를 입는 발전을 거듭해 지금은 360도 3D 영상을 구현하는 VR(Virtual Reality)로 진화했다. 전 세계적으로 2012년 8600만 달러(약 962억 원) 수준이던 AR/VR 투자는 2016년 18억3500만 달러(2조 529억 원)로 20배 이상 증가했으며 2020년까지 꾸준히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게임이나 어트랙션 시설에서 주로 활용하던 VR 기술을 영화에 적용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작년부터 삼성의 기어 VR, 오큘러스 VR의 오큘러스 리프트, HTC의 바이브 등 가상현실을 체험할 수 있는 HMD(Head Mounted Display) 기기가 대중화되면서 VR 영화가 하나둘 등장하기 시작하더니 칸, 베니스 등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서도 만날 수 있게 됐다. 특히 올해 칸 영화제에서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 감독이 에마누엘 루베스키 촬영감독과 협업해 선보인 6분 30초 분량의 VR 단편영화 <육체와 모래(Carne y Arena)>는 파격 중의 파격이라 일컬어지며 화제를 모았다. 멕시코와 미국 국경 지대를 넘나드는 난민들이 체포되는 과정을 담은 이 영화는 “통제된 밀실에서 VR 헤드셋을 쓴 후 서 있으면 마치 그 현장에 있는 듯한 착각이 느껴져 무서웠다”는 감상평이 줄을 이었다.

공포 영화 < Fear the Wheelchair >.
베니스 영화제는 올해 세계 3대 영화제 중 최초로 VR 경쟁 부문을 신설했으며, 지난 10월 막을 내린 부산국제영화제는 ‘VR cinema in BIFF’를 열어 다큐멘터리, 애니메이션에 이르는 전 세계 화제작 36편을 선보였다. 올해 베니스 영화제에서 VR스토리상을 수상한 김진아 감독의 영화 <동두천>은 미군에게 피살된 술집 종업원의 이야기를 그린 다큐멘터리 작품으로, 가상현실 경쟁 부문 심사위원장을 맡은 존 랜디스 감독은 “사회적 이슈를 감각의 영역으로 가져온 수작”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앞으로 영화제에서 선보일 VR 영화의 편수는 지금보다 많아질 것으로 기대된다. 해외에서는 그동안 공포 영화 <컨저링 2>, 제롬 블랑케 감독의 <얼터레이션> 등 다양한 VR 영화를 선보였으며, <스타워즈>의 제작사 루커스 필름은 다스베이더와 관련한 VR 영화를 준비중이라고 밝혔다. 국내에서도 덱스터스튜디오 등 VR 콘텐츠 제작사에서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제작 중이다. 덱스터스튜디오는 올해 부천판타스틱영화제에서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모티브로 만든 10분 분량의 어드벤처 영화 <화이트 래빗>을 선보였다. 사춘기 여고생인 주인공 앨리스가 어릴 적 잃어버린 열쇠를 찾아 동화 속 하얀 토끼와 함께 이상한 나라로 떠나는 내용으로 신촌 현대백화점 유플렉스 내에서 정해진 기간 없이 상시 체험이 가능하다.
곧 관객과의 만남을 앞둔 영화도 있다. 565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청년경찰>을 연출한 김주환 감독은 반전 있는 VR 공포 영화 <지박령>을 제작 중이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가족 간의 사랑을 주제로 한 장형윤 감독의 <전파망원경(가제)>도 내년에 선보일 예정이다. 특히 <전파망원경>은 광활한 우주 공간과 하늘, 바다를 한번에 체험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숲속에 울려 퍼지는 풀벌레 소리를 입체적으로 감상할 수 있다. 한편 VR 콘텐츠 제작사 두리번은 공포 영화 < Fear the Wheelchair >에 이어 연애 시트콤 <신드룸>, 키즈 애니메이션 <까미의 모험>도 추가 제작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렇듯 다양한 장르의 VR 영화가 활발하게 제작되고 있지만 아직 한계는 존재한다. 그중 하나가 바로 영화를 보면서 느끼는 육체적 피로감이다. 나 역시 8분짜리 VR 영화를 보는데도 어지럼증을 느껴 끝까지 집중하기 어려웠다. 두리번 관계자는 “VR 영화는 4K 이상의 화질을 바탕으로 해야 하는데 현재 HMD 기기 대부분은 HD 화질에 그쳐 콘텐츠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현실과 가상의 간극이 존재하니 당연히 어지러울 수밖에 없죠. 어지럼증은 기술적 발전 외에 의학적 발전을 접목해야 하는데, 단기간에 완벽한 해소는 어렵지만 사용자의 움직임을 자연스럽게 구현한 모션 시뮬레이터를 설치해 어지럼증을 최대한 약화시킬 예정입니다”라고 답했다.

1 올해 베니스 영화제에서 VR스토리상을 수상한 김진아 감독의 <동두천>. 2 VR 단편영화 <육체와 모래>를 체험하는 장면.
이뿐만이 아니다. 기존 영화는 감독이 의도한 장면만 관객이 봤다면 VR 영화는 360도 방향에서 유저가 원하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주제가 모호해질 수 있다는 것. 이에 대해 지난 5월 칸 영화제에 참석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VR 기술의 발전은 기존 영화사와 제작자들을 곤란하게 할 수 있습니다. 기존 영화에서처럼 스토리텔러의 지시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보고 싶은 곳을 볼 수 있는 엄청난 자유를 제공하기 때문이죠”라며 우려를 드러냈다. 하지만 VR 영화는 일반 영화와 다른 새로운 연출 문법이 필요하다는 반대 의견도 존재한다. 덱스터스튜디오 관계자는 “VR 영화의 연출적 한계로 지적하는 시선의 자유로움은 기존 영화의 시각에서 판단했기 때문이에요. 그보다는 VR 연출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할 수 있는 문법을 개발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새로운 의견을 제시했다.
VR 영화가 한계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가상현실 속 인물과 눈을 맞추고, 수동적으로 결과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스토리를 재구성할 수 있다는 것은 VR 영화의 새로운 가능성으로 볼 수 있다. 또 단순히 앉아서 보는 영화가 아니라 영화 속 공기와 냄새까지 완벽히 구현한다면 오감형 영화관으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
VR 영화를 볼 수 있는 공간은 전 세계적으로 많지 않다. 작년에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세계 최초의 VR 영화관이 문을 열었으며, 국내에는 백화점이 운영하는 VR 체험 공간과 영화 배급사에서 운영하는 VR 시네마 카페 정도가 있을 뿐이다. 이렇듯 아직 영화를 감상할 수 있는 공간은 소수지만 머지않아 점차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미국 최대 극장 체인 AMC엔터테인먼트는 내년부터 18개월 동안 일부 극장에 할리우드 VR 스타트업 드림스케이프의 기술과 콘텐츠를 적용하기로 했으며, 국내 멀티플렉스에서도 현재 다각적으로 VR 영화관 설립을 검토 중이다.
여러 영화 관계자가 조언한 것처럼 일반 영화의 문법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VR 영화의 새로운 길을 개척한다면 조만간 우리는 VR 영화라는 신세계를 자유롭게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영화를 보는 관객이 아닌 VR을 체험하는 유저를 지칭하는 새로운 용어도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에디터 최윤정(amych@nobless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