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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감독 열전

LIFESTYLE

한국인 스포츠 감독들이 해외에서 활약하고 있다. 단, 이것이 저절로 이뤄지는 게 아님을 우리는 반드시 알아야 한다.

1,2 올해로 16년째 태국 태권도를 책임지고 있는 최영석 감독.
3 전이경 감독 덕분에 싱가포르 역사상 처음으로 평창 동계 올림픽에 출전한 샤이엔 고.

싱가포르엔 눈이 내리지 않는다. 냉동실이 아니면 시내 어디에서도 얼음이나 눈 비슷한 걸 찾아볼 수 없다. 그 탓에 싱가포르에서 동계 올림픽이란 강 건너 불구경 같은 딴 세상 얘기다. 어려서부터 스키를 접해 ‘노르웨이 사람은 스키를 신고 태어난다’는 말까지 있는 노르웨이와는 정반대다.
얼마 전 평창 동계 올림픽 개막식 중계를 보다 놀란 것도 이 때문이다. 누군가 싱가포르 대표팀 자격으로 평창에 온 것이다. 해설자는 싱가포르가 역사상 처음으로 동계 올림픽에 출전했다고 말했다. 여자 쇼트트랙 선수 샤이엔 고는 싱가포르 유일의 대표팀 선수였다. 한데 그녀 옆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전이경이다. 1994년 릴레함메르 동계 올림픽과 1998년 나가노 동계 올림픽에서 도합 5개의 메달을 딴 한국 쇼트트랙의 전설.
전이경은 이번 올림픽에 싱가포르 여자 쇼트트랙 대표팀 감독으로 출전했다. 2015년 자녀 교육을 위해 찾은 싱가포르에서 쇼트트랙 대표팀 감독 제안을 받았다. 물론 수락은 했지만 그 과정이 쉽진 않았다. 올림픽 규격에 맞는 아이스링크가 달랑 하나, 그마저 시간당 이용 가격이 우리 돈으로 약 80만 원이나 해 자유로이 선수를 훈련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가 지도한 샤이엔 고는 결국 평창에 왔다. 비결은 지독한 훈련. 전이경은 일주일에 이틀만 해도 된다는 싱가포르 빙상연맹의 훈련 지침을 주 6회 훈련으로 바꿔 선수의 몸을 만들었다. 초등학교 고학년 수준이던 싱가포르 쇼트트랙 선수들의 실력을 불과 2년 만에 국제급으로 키웠다.
전이경처럼 현재 해외에서 활약하는 한국인 스포츠 감독은 수십 명에 달한다. 그들 중 한두 명만 콕 집어 소개하기란 ‘서울에서 김 서방 찾기’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심지어 그 역사도 ‘어제오늘’ 할 만큼 짧지 않고 ‘동계’나 ‘하계’ 할 것 없이 다양한 스포츠 종목과 수많은 나라의 대표팀에 포진해 있다.
우선 태권도엔 최영석 감독이 있다. 2014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 태국 남자 대표팀을 이끌어 태국이 사상 첫 은메달을 따게 한 인물. 특히 남자 58kg급에 출전한 태국의 타윈 한프랍이 16강전에서 한국의 메달 기대주 김태훈을 꺾은 사건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경기가 끝나고 “(나도) 한국 사람이라 마음이 좀 그렇다”고 한 당시 최 감독의 인터뷰에 얼마나 많은 이가 복잡미묘한 감정을 토로했나. 최영석 감독은 2002년부터 태국 대표팀을 맡고 있다. 그가 좋은 성적을 내는 비결은 ‘강한’ 리더십이다. 그는 선수가 나태해지는 걸 막기 위해 물 한 모금 마시거나 화장실 가는 것도 허락을 받게 한다. 최영석 감독은 지금도 태국에서 선수들을 지도하며 2020년 도쿄 올림픽을 준비하고 있다.
태권도에 최영석이 있다면 배드민턴엔 박주봉이 있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남자 복식 금메달,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혼합복식 은메달 등을 수확해 ‘배드민턴 천재’로 통한 인물. 2004년부터 일본 남녀 대표팀을 통합해 맡은 박주봉 감독은 국제 무대에서 늘 동네북 취급을 당하던 일본 배드민턴의 체질 개선을 10여 년 만에 완벽히 이뤄냈다. 승부욕 강화와 과학적 분석을 결합한 훈련이 무기. 그 덕에 일본 배드민턴은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 사상 첫 금메달(여자복식)을 따냈다. 박주봉 감독도 현재 2020년 도쿄 올림픽을 준비하며 일본 선수들과 함께 호흡하고 있다.
베트남 사격 대표팀의 박충건 감독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2014년부터 베트남 대표팀을 맡고 있다.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 베트남 역사상 첫 금메달이 그의 지도 아래 나왔다. 현역 군인 신분으로 대회에 출전한 호앙쑤안빈은 10m 공기권총 종목에서 시상대 맨 위에 섰고, 50m 권총 종목에서도 은메달을 땄다. 전자 표적이 없을 정도로 훈련 환경이 열악한 베트남 대신 한국을 훈련지로 택한 것과 주도면밀한 한국식 사격 교육을 베트남 선수에게 적용한 것이 감독으로서 그의 성공 비결이다.

4 4 베트남 U-23 축구 대표팀은 박항서 감독의 지도하에 대회 최초로 결승에 진출했다.
5 지난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 우승한 일본 여자복식 배드민턴 대표팀과 박주봉 감독.

그런데 쇼트트랙과 태권도, 배드민턴, 사격까지 나왔는데 왜 축구와 야구는 없느냐고? 그럴 리가. 축구엔 박항서, 야구엔 이만수가 있다. 두 사람은 현재 베트남과 라오스에서 각각 영웅급 대우를 받고 있다. 박항서는 지난 10월부터 베트남 U-23 축구 대표팀 감독을 맡고 있다. 애초에 베트남 언론은 그에 대해 프로 리그에서 밀려나 실업 리그 감독을 하던 축구인을 데려왔다며 부정적이었다. 하지만 박항서 감독이 지도하는 베트남 U-23 축구 대표팀은 지난 10년간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한 태국 대표팀을 원정에서 격파하고, 이어서 사상 처음으로 U-23 대회(아시아축구연맹 주관) 결승까지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그런가 하면 선수 시절 한국 프로야구 1호 안타, 1호 홈런 등 다양한 1호 기록을 보유한 이만수는 2013년 야구 불모지 라오스에 최초의 야구팀 ‘라오 J 브라더스’를 창단, 현재 라오스야구협회 부회장으로 활약하며 야구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끌어내고 있다. 쉽게 말해, 그 옛날 척박한 조선 땅에 ‘황성YMCA야구단’을 만들어 야구 보급에 앞장선 질레트 선교사의 한국인 버전이랄까. 이 밖에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 중국 유도 사상 첫 메달을 따는 쾌거를 이뤄낸 정훈 감독, 2014년부터 필리핀 탁구 대표팀을 지도하는 권미숙 감독, 미국과 스페인, 멕시코, 일본,타이완, 말레이시아, 말라위, 이란 등의 양궁 대표팀을 이끌고 있는 여러 한국인 감독의 활약도 눈부시다.
한데 이쯤에서 이는 궁금증 하나. 한국의 스포츠 지도자 교육 인프라는 해외 무대에서 평판이 좋은 만큼 정말로 그 수준이 높은 걸까? 그렇지 않다. 오랫동안 대형 스포츠 대회 개최 능력과 경기 수준에만 신경 쓴 탓에 여전히 많은 선수가 지도자 교육을 받기 위해 필수로 해외 유학길에 오르며, 그들이 다시 한국에 돌아온다 해도 열악한 국내 스포츠 산업의 현실에 낙오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전 국가 대표 역도 선수로 현재 지도자 교육에 전념하고 있는 장미란은 언젠가 에디터와 만난 자리에서 이에 대해 “(스포츠를) 즐기는 대상으로만 인식하기 때문”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 말처럼 이제 우리도 스포츠를 오락과 건강관리의 수단으로만 보는 시각을 넘어설 때가 되지 않았을까? 좋은 선수에겐 좋은 지도자가 필수고, 좋은 지도자는 좋은 교육에 의해 만들어진다. 한 나라의 스포츠 수준을 높이는 한국인 감독이 꾸준히 등장하는 건 분명 스포츠 마니아로서 흥분되는 일이다. 하지만 그걸 계속 잇는 방법은 스포츠 산업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과 지원일 것이다. 

 

에디터 이영균(youngkyoon@nobless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