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옥에서 찾은 어른들의 쓸모
어른들이 생각하는 ‘쓸모’란 어떤 걸까? 한옥을 1년 넘게 개조해서 자투리 공간 하나도 쓸모 있게 바꾼 중국 남자 빈센트 리와 한국 여자 우노 초이의 삶의 방식은 이 한마디로 압축할 수 있다.
“In serving each other, we become free!”

우노 초이가 입은 우아한 홀터넥 드레스는 Escada, 세르펜티 뱅글은 Bvlgari, 진주 장식 스트랩 슈즈는 Stuart Weitzman.빈센트 리가 입은 프린팅이 돋보이는 저지 톱은 Prada, 팬츠는 본인 소장품, 화이트 로퍼는 Jimmy Choo.
300세 플랜을 세운 부부가 있다. 40대 중반 남자보다 더 에너제틱한 67세의 빈센트와 여자의 아름다움은 50대부터임을 실감하게 해줄 모델이자 디자이너 우노 초이 이야기다. 한국인 어머니와 중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하와이에서 성장한 빈센트 리는 코넬대학교 토목공학과를 졸업하고 로스앤젤레스에서 에너지 관련 사업체를 운영하다 지난해 은퇴하고 모델 일을 하던 우노 초이와 함께 한국에 들어왔다.
미국에서 한국으로 거처를 옮기며 그들은 건강한 삶을 위해 새로운 둥지부터 정성스레 만들었다. 가회동의 한옥 한 채를 1년에 걸쳐 수리했고, 오래 지낼 공간이라 세세한 부분까지 직접 만졌다. “어디에서 그런 에너지가 나올까요?”라고 물으면 그들은 쿨하게 이렇게 대답한다. “Just do it! 그냥 하는 거죠. 막상 해보면 별거 아닌 게 많아요. 단지 시도하는 게 어려울 뿐이죠.” 삶에 핑계를 대며 살고 싶지 않았던 그들은 은퇴 후의 삶에서도 자신들의 ‘쓸모’를 찾고 있다. 빈센트와 우노 초이의 저녁 식사 자리에 한번 초대를 받는다면, 바로 그들의 철학에 빠져들게 된다. 남자와 여자의 역할이 따로 없다고 생각하는 빈센트는 4시간 꼬박 넘게 부엌에서 나오질 않는다. 요리를 하고, 접시를 닦고, 손님을 접대하는 게 그의 일이다. 우노 초이는 딱딱한 의자에 몇 시간이고 앉아서 손님들과 함께 ‘재미있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함께 있다 보면 두 사람의 에너지가 정말 대단하게 느껴진다.

1, 2 빈센트는 오래 쓸 물건을 쇼핑하는 네 가지 기준을 갖고 있다. 좋은 디자인과 정직한 가격, 그리고 오래 쓸 수 있으며 사람을 귀찮게 하지 않을 것. 그는 철제 의자 하나도 다시 칠하고 의자를 고정하는 부품까지 교체한다. 나무 테이블에 자리 잡은 의자는 등받이를 잘라 테이블 밑으로 쏙 들어가게 했다. 등받이가 낮으면 긴장해 바른 자세로 앉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외국에서나 여기에서나 라이프스타일은 비슷하게 흘러가는데, 한국에 와서 집이 좀 더 복잡하게 됐어요. 우리는 이 집을 아지트로 삼고 많은 사람을 초대해요. 어느 때는 한 사람이 오기도 하고 어느 때는 저희 집 옆에 있는 수녀원의 수녀님들이 오시기도 하죠.” 빈센트와 우노 초이는 개조한 한옥에 ‘아폴로니아’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알바니아 피에르 지역의 항구도시 아폴로니아를 여행하듯 많은 이들이 이곳을 여행하길 바라는 심정일까. 두 사람에겐 나이가 들수록 반가운 친구들이 들락거려 활기가 있는, 그런 공간이 필요했다. 그 공간에는 이런 규칙이 필요하다. ‘격식과 서열을 따지지 않을 것, 소박할 것, 수다가 가능할 것, 출입이 자유로울 것, 그리고 음식이 있을 것.’ 미국의 사회학자 레이 올든버그가 처음 제시한 행복의 조건에 종종 등장하는 이론인데, 우리에겐 제3의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나이 들수록 모여서 시시덕거릴 수 있는 아지트가 필요해요. 누군가의 집에 편하게 모일 수 없으니 다들 카페에서 만남을 갖는 거겠죠. 좋아하는 사람들과 집에서 자주 모이려면 공간 레이아웃이 좀 달라야 해요.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커다란 테이블과 요가를 할 수 있는 오픈 형태의 거실, 영화 감상용 프로젝터, 청소하기 쉬운 바닥 재질 등….”
요즘 전 세계 라이프스타일 트렌드가 ‘의식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저마다의 도덕적 기준으로 사회와 자신을 운명 공동체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모두가 오거닉 라이프를 살고 싶다고 하지만, 더 중요한 건 ‘백 투 베이식’이 아닐까요. 오거닉하다고 말할 수 있는 집은 활력 있으면서도 우리를 서브해야 하는 구조죠. 하지만 마지막은 아름다워야 해요. 그런데 그런 기능을 갖추다 보면 아름다워질 수 밖에 없어요. 기능이 좋으면 자동적으로 디자인이 완성되는 거죠. 집도 우리에게 커스텀 테일러가 되어야 해요.” 새로 고친 한옥에서 100년을 살고 싶은 빈센트와 우노 초이는 처음 손볼 때부터 가능한 한 완벽하게 하고 싶었다. 변명과 핑계를 대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자투리 공간까지 내버려두지 않았다. 모든 공간에 질문을 하고, 그런 질문을 통해 ‘쓸모’를 부여했다.
두 사람이 한옥에 살면서 가장 자주 하는 이야기는 무얼까? “오늘은 어떤 요리를 할까?”, “무슨 케이크를 만들까?”, “어떤 준비를 할까?”란다. 밖에서 먹는 음식이 싫어져서 요리를 하게 됐다고. 빈센트의 요리는 정말 창의적이다. 손님에 따라 음식이 달라지는데, 손님들은 그의 요리를 잊지 못한다. 보통 식사가 시작되면 6시간 스탠딩 요리는 기본이다. 예를 들면 그는 소박한 빵 한 덩어리를 만드는 것도 1900년 식이 기준이다. 그만큼 정직한 레시피. 어느 날부터 그는 다른 사람이 만든 음식을 믿지 않게 됐고, 그래서 직접 요리를 하기로 했다. ‘간단하면서도 소박하고 정직하면서도 건강할 것.’ 빈센트의 요리 철학이다. 정직한 재료를 찾고, 건강한 음식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먹는 것. 다만 그의 식탁에서는 서둘러서는 안 된다. 아주 천천히, 몸을 곧게 세우고 앉아 오랫동안 이야기를 해야 하니까.
동양계 미국인 빈센트와 한국 여자 우노 초이는 24년을 함께 살았다. 미국에서 윗집, 아랫집 사는 이웃으로 만나 함께 살게 됐다. 키 작은 남자와 키 큰 여자의 만남은 충분히 로맨틱했다. 은퇴 후의 삶을 한국에서 보내고 싶었던 그들은 하던 일을 정리하고 지난해 서울에 자리를 잡았다. 서로에게 위기를 느껴본 적은 없다. 그럴 때마다 서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각자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빈센트가 공항으로 가는 순간 ‘허전하다’는 생각이 드는 걸 보면 기본적으로 우린 믿음과 애정이 깔려 있는 것 같아요.”
무엇이든 비평하길 좋아하는 빈센트의 말에 조용히 수긍하며 대화하는 우노 초이를 보면 이들이 노년으로 가고 있다고 믿을 수 없다. 나이 자체를 의식하지 않는 사람들이랄까. 서울이라는 환경 안에서 가까운 사람들과 ‘일상’을 함께하며 서로를 쓸모 있게 하는 것. 즐거운 황혼의 인생은 자꾸 흐르는 세월을 탓하는 어떤 이들에게 조금이라도 용기를 줄 수 있을 것이다.
권위에서 벗어나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개척해나가는 것, 불가능한 것은 없다는 마음가짐으로 뛰어다니는 것,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자세. ‘젊음은 젊은이들에게 주기 아깝다’는 말이 문득 생각난다. 나약한 청춘들보다 더 바쁜 노년들이 있으니 말이다.

3 스트라이프 패턴 롱 드레스는 Loro Piana, 볼드한 골드 뱅글은 Uno Choi.
에디터 김수진(suze@noblesse.com)
사진 어상선 패션 스타일링 조윤희 헤어 이혜영 메이크업 김지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