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단어로 담은 미식
‘미쉐린 가이드 서울 & 부산 2025’에서 별을 품은 7명의 셰프에게 자신의 미식 철학을 하나의 키워드로 정의해달라고 청했다. 짧은 단어로 시작된 답변은 곧 레스토랑의 정체성과 요리에 담긴 시대적 감각으로 이어졌다. 이들이 선택한 단어와 접시에 담긴 이야기까지, 키워드에서 시작된 미식의 풍경을 함께 맛본다.
종합예술
레스토랑 알렌 – 서현민
미식은 단순히 배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오감에 깊은 여운을 남기는 경험이라 믿는다. 그래서 미식을 ‘종합예술’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음식은 물론 식기와 잔, 음악, 인테리어, 서비스까지 손님이 식당에 들어와 머무는 동안 오감을 만족시킬 수 있는 모든 요소에 나와 팀의 영혼을 불어넣는다. 요리에 대한 철학, 코스의 흐름, 맛의 균형, 지루하지 않도록 연출하는 테이블 위 퍼포먼스까지 치밀하게 고민한다. 이런 철학은 여름 시즌에 선보인 장어 코스에서도 잘 드러난다. 세심하게 구운 장어 위에 사바용 소스를 곁들인 요리로, 마지막엔 훈연해 향을 입힌 뒤 박스에 담고 손님 앞에서 열어 스모크 향을 전한다. 한 접시 안에서 시각과 미각, 후각이 동시에 깨어나는 순간을 만들고 싶었다. 〈흑백요리사〉 이후 최근 레스토랑을 찾는 손님의 폭이 넓어졌다. 예전엔 미쉐린 레스토랑 하면 비싼 곳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다면, 지금은 한 번쯤 꼭 가보고 싶은 곳으로 인식이 바뀌고 있는 걸 실감한다. 다양한 손님과 만나고, 그들에게 기억에 남을 경험을 선사할 수 있다는 사실이 반갑고 감사하다.
문화
기가스 – 정하완
손님이 레스토랑에 들어와 나갈 때까지 경험하는 모든 것, 공간과 향기, 분위기 그리고 요리까지 모든 것이 어우러져 하나의 ‘문화’를 완성한다고 믿는다. 그 문화가 뿌리내릴 수 있도록 기가스는 요리의 시작점부터 직접 책임진다. 좋은 요리는 결국 좋은 재료에서 시작된다는 철학 아래 팜투테이블(farm-to-table)을 실천하며 직접 농사를 짓는다. 제철 채소를 키우고 그 계절의 감각과 땅의 향기를 요리에 고스란히 담는다. 그래서 기가스의 메뉴는 자연의 흐름에 따른다. 날씨와 땅의 상태를 살피고, 지금 이 시기에 가장 맛있는 재료가 무엇일지 늘 고민하며 메뉴를 구성한다. 요리는 무언가를 새롭게 창조하는 일이라기보다는 내가 살아온 시간과 경험을 자연스럽게 전달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어릴 적 자연과 함께한 기억, 유럽 다이닝 문화 속에서 쌓아온 시간, 그리고 지금 농장에서 마주하는 재료까지. 그 모든 것이 요리에 스며 있고, 손님은 그 경험을 통해 기가스만의 문화를 만나게 된다고 생각한다.
자연
에빗 – 조셉 리저우드
늘 ‘자연’을 중심에 두고 요리를 고민한다. 계절마다 자연이 허락한 가장 좋은 것을 어떻게 고르고, 어떻게 정직하게 담아낼지 끊임없이 고민한다. 그 철학을 가장 잘 보여주는 요리는 바로 나무 디시. 에빗에서 가장 먼저 내는 이 작은 요리는 산에서 직접 채집한 재료에 대한 애정을 담아 만든 스낵이다. 실제로 나뭇가지에 매달린 음식을 손님이 직접 따서 먹는 방식은 단순한 요리를 넘어 특별한 경험이 된다. 요리에 직접 참여하며 자연을 향유하고, 하나의 장면으로 완성된다. 에빗이 지향하는 다이닝의 본질이 이 한 접시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우리는 유행이나 형식보다는 꾸준함을 믿는다. 시간 속에서 쌓인 우리만의 방식과 흐름을 지켜내고, 하루하루 서비스가 어제보다 조금 더 나아지기를 바라며 주방에 선다. 에빗이 지금의 자리에 오기까지 이끌어준 것도 결국 그런 꾸준함과 진심이었고, 앞으로도 그 태도를 지키며 계속 나아가고자 한다.
균형
Légume – 성시우
미식을 단 하나의 단어로 표현하라면 ‘균형’이라고 말하고 싶다. 식사의 시작부터 끝까지 그 안에는 재료 선택, 조리법, 플레이팅, 영양, 감각적 경험, 지속 가능성 등 수많은 요소가 겹겹이 얽혀 있다. 그 모든 요소가 균형 있게 어우러질 때 비로소 완성된 미식에 가까워진다고 생각한다. Légume의 대표 메뉴 ‘아위버섯 디시’는그 철학을 가장 잘 담고 있다. 영양이 풍부한 아위버섯을 표고 리덕션 소스와 함께 구워낸 뒤 충분히 휴지시켜 고유한 식감과 풍미를 살린다. 여기에 채소나 과일 껍질 등을 활용한 제로 웨이스트 소스를 곁들여 지속 가능성이라는 가치를 자연스럽게 녹여낸다. 요즘 들어 락토오보 채식이나 저속 노화 식단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채식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더라도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이를 실천하려는 사람이 늘고 있다. 미식 역시 건강과 환경 그리고 취향 사이의 균형 속에서 진화하고 있다고 느낀다.
전달
이스트 – 조영동
요리는 단순히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것을 넘어 그 안에 담긴 철학과 감각을 손님에게 ‘전달’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스트는 동아시아 음식 문화를 우리만의 방식으로 해석해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새로운 다이닝 경험을 선사하고자 한다. 그 철학을 잘 보여주는 메뉴가 바로 ‘갈비스톤’. 전통 갈비찜에 블루치즈를 더해 익숙함과 낯섦 사이의 긴장을 만들어낸 이 요리는 이스트만의 감각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입에 익은 재료에 전혀 예상치 못한 풍미가 어우러지며 손님에게 갈비찜이 새로운 얼굴로 다가간다. 중국식 에그 누들에서 영감을 받은 ‘누들디시’ 역시 이스트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대표 메뉴로, 생면에 향신료와 사바용 소스를 더해 동아시아적 상상력을 입체적으로 표현한다. 최근 미식의 흐름이 확실히 다양성과 실험을 향해 가고 있는 걸 실감한다. 비건, 멕시칸, 아시안 퀴진 등 여러 장르가 주목받으며 이제는 명확한 정체성과 새로움에 대한 시도가 더 큰 가치를 인정받는 시대가 됐다. 그런 흐름 속에서 이스트 역시 우리만의 언어로 계속 요리를 말하고 감각을 전하고 싶다.
식습관
스와니예 – 이준
미식은 단순히 좋은 재료를 소비하는 행위나 화려한 요리를 의미하지 않는다. 나에게 미식은 세련되게 완성된 ‘식습관’에 가깝다. 그 사람의 삶과 경험이 고스란히 녹아든 식사, 그리고 그 음식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취향과 기억이 자연스럽게 겹쳐지는 지점에서 비로소 미식은 진짜 의미를 갖게 된다. 정성과 공감이 담긴 음식부터 편안한 집밥까지 모두 미식의 범주에 포함된다고 믿는다. 우리가 오랜 시간 살며 몸에 익힌 식습관 위에 새로운 재료와 감각을 덧입힐 때, 가장 세련된 형태의 요리가 탄생한다고 생각한다. 스와니예의 시그너처 디시 ‘서래달팽이’는 2013년 오픈 이래 단 한 번도 빠뜨리지 않고 이어온 메뉴다. 트러플 향을 더한 부드러운 계란 커스터드에 쫄깃하게 조리한 국내산 달팽이와 볶은 시금치를 올려,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계란찜’을 완전히 새로운 감각으로 재해석했다. 주요리와 함께 제공하는 ‘반찬’도 하나의 예다. 많은 이들이 한국 음식을 특정 요리로 단정하지만, 실제 한국의 식탁은 다양한 반찬의 조합을 통해 완성된다. 이 전통적 식문화 구조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손님 스스로 맛의 균형을 조합해보는 경험을 제안하고 있다. 그 과정을 통해 한국적 식습관의 깊이와 유연함을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
조화
온지음 – 조은희, 박성배
온지음이 지향하는 미식의 키워드는 ‘조화’다.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는 말처럼 절제와 품위를 지닌 한식의 본질을 오늘의 감각으로 풀어내고자 한다. 백제 시대부터 내려온 이 철학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믿는다. 그 철학이 가장 아름답게 담긴 요리는 ‘백화반’이다. 흰색 재료만으로 구성한 비빔밥으로, 무나물, 도라지, 더덕, 청포묵, 숙주 등이 따뜻한 흰빛부터 차분한 백색까지 다채로운 결을 조화롭게 이루며 한 그릇에 담긴다. 온갖 재료가 넘쳐나는 오늘날, 검소한 맛이 더 깊은 감동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식은 본래 조화를 중시하는 요리다. 특정 재료나 맛에 치우치지 않고 사계절의 풍요로움을 담는다. 봄엔 나물, 여름엔 시원한 채소, 가을엔 버섯과 곡물, 겨울엔 말리거나 발효시킨 식재료를 자연스럽게 차려낸다. 밥과 국 그리고 다양한 반찬이 어우러진 상차림은 건강에도 이롭고, 다양한 맛을 조화롭게 즐길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최근 온지음은 ‘장’에 집중하고 있다. 된장, 간장, 고추장은 물론 조청과 녹말가루까지 직접 만들어 사용한다. 단순히 전통을 복원하는 데 그치지 않고 대중이 새롭게 느낄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에디터 조인정(ijcho@nobless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