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의 완벽한 마무리
연말을 실감하게 하는 클래식 공연.

유니버설발레단의 〈호두까기 인형〉. ©유니버설발레단
수많은 약속과 모임으로 분주한 연말이지만, 매년 이맘때면 어김없이 돌아오는 클래식 무대와 함께 이 시기를 보낸다면 그 여운은 더 오래갈 것이다. 좋아하는 사람과 설레는 마음을 안고 공연장을 찾아 시간을 보내거나 막이 내리고 손뼉을 치느라 상기된 볼에 겨울밤 찬 공기가 닿을 때의 또렷한 느낌은 송년 공연의 추억을 생생하게 남겨줄 테니 말이다. 거리에서 들려오는 캐럴 멜로디를 통해 연말을 상기하게 되듯 공연장에도 이맘때면 으레 울려 퍼지는 음악이 있다. 동화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발레 왈츠, 천상을 꿈꾸는 듯 성스럽게 울리는 합창 같은 곡 말이다. 파리의 가난한 예술가들이 어울리던 다락방에서 펼쳐지는 사랑 이야기를 다룬 오페라 〈라 보엠〉이나 클라라와 용감한 호두까기 인형의 꿈같은 하루를 그린 발레 〈호두까기 인형〉, 인류의 화합과 우정을 찬양하는 ‘환희의 송가’로 유명한 베토벤 교향곡 9번 등이 그 주인공이다.
매년 12월은 〈호두까기 인형〉 시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거의 모든 발레단이 〈호두까기 인형〉을 공연하기 때문이다. 세대와 계층을 막론한 모든 관객을 위한 이 발레는 크리스마스가 배경인 만큼 어린이에게는 희망과 사랑을, 어른에게는 동심을 상기시킨다. 흥겨운 파티가 열리는 거실엔 대형 크리스마스트리가 자리하고, 흰 눈이 흩날리는 크리스마스 랜드로 관객을 안내한다.
1막 크리스마스이브를 맞아 파티가 열리는 장면. 초대받은 손님과 아이들이 어우러져 춤추고, 주인공 클라라는 대부 드로셀마이어에게 호두까기 인형을 선물 받는다. 그러나 이를 시샘한 동생 프리츠와 인형 쟁탈전을 벌이는데, 손님이 모두 돌아간 늦은 밤에도 클라라는 선물 받은 인형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한다. 호두까기 인형을 보기 위해 응접실로 간 클라라는 그곳에서 인형 군대와 생쥐들의 전쟁을 목격하게 된다. 클라라는 호두까기 인형을 도와 싸움에서 승리하고, 인형은 왕자로 변신해 클라라를 크리스마스 랜드(버전에 따라 과자나라로 불리기도 한다)로 안내한다. 두 사람이 도착한 환상의 나라에서 2막이 시작된다. 여러 나라 인형이 반겨주는 이곳에서 멋진 시간을 보낸 클라라는 이내 꿈에서 깨고, 호두까기 인형을 품에 안은 채 크리스마스 아침을 맞는다.
러시아를 대표하는 작곡가이자 발레 음악의 대부인 차이콥스키가 이 아름다운 음악을 완성했다. 〈백조의 호수〉, 〈잠자는 숲속의 미녀〉 등 서사성과 서정성을 한껏 끌어올리는 음악을 창조한 그는 첼레스타를 도입해 신비한 음색을 표현했으며, 발랄한 행진곡 리듬을 작품 곳곳에 넣고 여성과 어린이의 성악을 편성하는 등 독특한 시도로 대중에게 〈호두까기 인형〉을 각인시켰다. 안무가 마리우스 페티파는 호프만의 동화 〈호두까기 인형과 생쥐 왕〉을 바탕으로 새 서사를 덧붙였다. 비록 작품을 완성하지 못하고 쓰러지는 바람에 제자 레프 이바노프가 남은 안무를 고안했으나, 두 사람이 합심한 덕분에 화려함과 다채로움을 갖춘 작품으로 거듭났다.
명작인 만큼 그 버전도 다양하다. 12월 들어 예술의전당과 세종문화회관에서 〈호두까기 인형〉을 공연하는 국립발레단과 유니버설발레단은 각각 유리 그리고로비치(Yury Grigorovich, 볼쇼이 발레단) 재안무, 올레크 비노그라도프(Oleg Vinogradov, 마린스키 발레단) 연출 버전을 택했다. 두 버전은 몇몇 장면과 등장인물이 서로 다른데, 국립발레단에선 할리퀸과 콜롬비나의 춤, 유니버설발레단에선 어린이가 직접 연기하는 호두까기 인형을 만날 수 있다. 사람만 한 크기의 쥐 인형 탈을 쓰고 연기하는 장면도 이색적이다. 관객을 환상의 세계로 초대하는 눈송이 왈츠는 어느 발레단이든 명장면으로 꼽힌다. 순백의 튀튀를 입은 여성 무용수 24명이 펼치는 군무는 한 해를 치열하게 보낸 이들에게 주어지는 선물 같은 순간으로 남는다.

서울시립교향악단의 베토벤 교향곡 9번. ©서울시립교향악단
오페라하우스를 〈호두까기 인형〉이 채우는 동안 콘서트홀에선 어김없이 베토벤 교향곡 9번이 흘러나온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오케스트라 서울시립교향악단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올해 마지막 정기 공연으로 베토벤 교향곡 9번을 무대에 올린다. 베토벤 교향곡 가운데 마지막이자 전작 작곡 후 12년여 만에 탄생한 교향곡 9번은 그 부제처럼 ‘합창’을 포함한 대서사시다. 관례처럼 이어온 교향곡 구성 방식을 깨고 느린 악장(아다지오)을 3악장으로, 당초 3악장에 배치하던 스케르초를 2악장으로 옮긴 변화가 인상적이다. 1악장의 신비로운 도입으로 시작해 마지막에 이르면 합창과 함께 빠르고 성대하게 음악을 마무리한다. 4성 독창과 혼성 합창이 등장하는 4악장은 독일 시인 프리드리히 실러의 ‘환희의 송가’에서 가사를 따왔다. 1악장과 대칭을 이루고, 또 3악장을 변주하며 등장하는 4악장은 무대의 화려함과 풍성함만큼 지휘하기 쉽지 않은 부분으로 알려졌다. 오케스트라의 서주 이후 베이스 독창으로 “오, 벗이여, 이런 곡조(소리)는 아니오! 더 즐겁고 환희에 찬 곡조를 노래합시다!”라며 시작하는 합창 파트는 단순하면서도 점차 소리를 쌓아가며 거대한 완성을 이룬다. 아름다운 목소리와 교향악이 조화를 이루며 절정에 달할 때면 작곡가의 인류애가 절로 느껴지는 듯하다.
이번 공연의 지휘는 음악감독으로 낙점된 얍 판 츠베덴(Jaap van Zweden)이 맡는다. 서울시립교향악단은 정명훈 음악감독 이후 2020년 오랜 공백 끝에 핀란드 지휘자 오스모 벤스케를 음악감독으로 모셨다. 2024년부터 얍 판 츠베덴이 그 자리를 잇는다. 그는 2018~2019년 시즌 뉴욕 필하모닉 상임지휘자로 시작해 현재까지도 음악감독으로 재임 중이다. 홍콩 필하모닉에서도 2012년 시즌부터 2024년 시즌까지 10여 년간 음악감독을 겸임하며 연을 맺어 그곳의 오케스트라를 성장시켰다는 평을 받았다. 바이올리니스트이기도 한 얍 판 츠베덴은 19세에 로열 콘세르트헤바우 사상 최연소 악장으로 임명되며 이름을 알렸다. 1995년부터 지휘자로 활동하기 시작해 파리 오케스트라, 로열 콘세트르헤바우,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빈 필하모닉 등 유수의 오케스트라와 함께했다. 내년 공식 취임을 앞두고 이미 서울시립교향악단과 협력하고 있는 그는 지난 1월, 부상으로 포디엄에 오르지 못한 오스모 벤스케를 대신해 단원들과 첫 호흡을 맞추기도 했다. 그는 이제 오케스트라의 역사와 전통을 살피고 미래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결정하고 싶다고 했다. 2023년 서울시립교향악단의 마지막 공연이자 클래식 음악의 정통성과 예술성의 정수를 담은 베토벤 교향곡 9번(12월 21일~22일 롯데콘서트홀, 23일 고양아람누리)을 통해 음악감독과 오케스트라의 합을 미리 점쳐보는 시간도 기대된다.
베토벤 교향곡 9번 4악장은 유럽연합을 상징하는 노래(Anthem of Europe)로 지정돼 공식 행사 자리에서 사용할 정도로 음악적 의미뿐 아니라 여러 상징성이 짙은 음악이다. 베토벤이 음악을 통해 전하고자 한 인류 보편의 사랑이야말로, 한 해를 아름답게 마무리하고 싶은 연말이면 이 음악을 떠올리게 되는 이유가 아닐까.
글 김태희(공연 칼럼니스트)
에디터 남미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