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로 물든 경주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 불리는 도시 경주에서 APEC 정상회의 개최를 기념해 준비한 현대미술 행사, 그 소식을 전한다.

위 백남준, 나의 파우스트 경제학, Mixed Media, 311×192×107cm, 1992. 사진 제공 우양미술관.
아래 〈신라한향(新羅韓香) – 신라에서 펼쳐지는 한국의 향기〉전 전경. 사진 제공 솔거미술관.
2005년 부산에 이어, 우리나라 경주가 20년 만에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개최지로 선정됐다. 경주는 신라 천년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도시다. 동궁과 월지, 불국사, 석굴암, 첨성대, 황룡사지 등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이곳에서 10월 31일부터 11월 1일까지 열리는 이 특별한 행사는 경주가 글로벌 관광지이자 경제 및 문화 중심지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될 것이라는 기대감을 주고 있다.
전 세계의 시선이 모이는 만큼 이를 기념해 경주 곳곳에서 다양한 문화 예술 행사 소식이 들려온다. 흔히 신라 천년의 고도로 기억하지만, 오늘의 경주는 더 이상 과거에만 머물지 않는다. 전통의 결을 간직한 도시 곳곳에 현대미술의 숨결이 스며들었고,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는 수식어를 넘어 이제 경주는 현대미술의 무대로 확장되고 있다. 우양미술관과 솔거미술관, 그리고 올해 새롭게 문을 연 우아르미술관 등이 그 중심에서 지역성과 현대성을 가로지르며 새로운 미적 경험을 제안하고 있다. 신라의 시간 위에 겹친 현재의 예술은 경주가 단지 역사적 장소가 아니라, 지금 살아 움직이는 도시임을 증명한다.
먼저 약 1년간 전면 리모델링을 거쳐 올해 재개관한 우양미술관은 2025 APEC 정상회의 개최를 기념해 7월 20일부터 〈백남준: Humanity in the Circuits〉전을 선보이고 있다. 이번 정상회의의 핵심 의제는 ‘포용적이고 지속 가능한 미래’로, 미술관은 1990년대 백남준 작가의 소장품을 중심으로 이 주제를 다룬다. 1980~1990년대 백남준의 예술 전환기에 초점을 맞춰, 단순한 표현 수단이나 시청각 실험의 장을 넘어 인류의 정신을 확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테크놀로지에 대한 사유를 탐구한다. 백남준 작가는 TV, 위성, 로봇, 인터넷, 사운드, 퍼포먼스 등 다양한 매체가 한데 어우러질 수 있음을 증명했고, 동양과 서양, 정신과 물질, 예술과 기술 등 상반되는 것들이 분리되지 않고 하나로 얽혀 한 작품 안에서 상호작용하며 공명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 이러한 작가의 실험 정신이 담긴 작품을 통해 APEC 정상회의가 제안하는 포용성, 지속 가능한 미래와 연결, 혁신과 번영이라는 공동의 비전에 주목한다. 이번 전시에서 특히 눈여겨볼 작품은 국내 최초로 공개하는 비디오 설치 연작 ‘나의 파우스트’ 중 ‘나의 파우스트 – 경제학’과 ‘나의 파우스트 – 영원성’. 그 밖에 세 대의 자동차로 구성된 대형 설치 작품으로 2년 6개월에 걸친 복원 작업 끝에 선보이는 ‘전자초고속도로’ 시리즈, 우양미술관의 상징이기도 한 ‘고대 기마인상’, ‘음악 심心’, ‘푸가의 예술’ 등 백남준의 실험 정신이 깃든 작품을 대거 감상할 수 있다. 우양미술관에서는 가나 출신의 세계적 작가 아모아코 보아포(Amoako Boafo)의 아시아 최초 미술관 전시 〈I Have Been Here Before〉도 함께 열린다.
손가락으로 물감을 바르는 핑거페인팅 기법으로 인체를 조각적으로 표현하는 작가는 흑인의 이미지를 넘어 그들의 삶을 기록하고 기념하며 역사적 맥락에서 형성된 정체성과 개인과 사회, 단체의 복합적 경험을 깊이 있게 탐구한다. 전시는 총 4개 섹션으로 구성해 보아포의 작품 세계를 공감각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한편 솔거미술관에서는 현재 우리가 해결해야 할 갈등과 문제점에 대해 짚는 전시 〈신라한향(新羅韓香) – 신라에서 펼쳐지는 한국의 향기〉를 10월 1일부터 내년 4월 26일까지 선보인다. APEC 정상회의의 주요 의제 가운데 하나인 ‘지속 가능한 발전’을 바탕으로 마련한 전시로, 박대성, 송천 스님, 김민, 박선민 작가의 한국화, 불화, 유리공예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선보일 예정이다. 특히 이 전시는 경주의 지역적 특징과 역사적 배경을 현대적 시각으로 재조명하는 자리로, 과거와 현재를 잇는 중요한 시도를 보여준다. 한국화와 불교화, 공예가 어우러져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새로운 미적 경험을 제시하며, 각 작품이 어떻게 상호작용하고 공명할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마지막으로 소개할 전시는 경주예술의전당 알천미술관에서 열리는 〈4인의 거장들; 김환기, 박수근, 이중섭, 장욱진〉이다. APEC 정상회의 개최를 기념해 이른바 ‘이건희 컬렉션’을 포함한 한국 근현대 미술 컬렉션이 경주에서 특별 전시를 마련하는 것.
7월 1일에 막을 올려 10월 12일까지 이어지는 전시는 한국 근현대 미술 1세대 거장 4인의 예술 세계를 조명하며 한국 문화 예술의 정체성과 깊이를 세계에 알리고자 기획했다. 국립현대미술관, 환기미술관, 양구군립박수근미술관, 이중섭미술관,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글로벌세아그룹 등 5개 미술관과 기업 소장품 90여 점을 선보인다.
이 밖에도 경주에서는 9월부터 다양한 역사 포럼과 음악 축제, 문화제, 기념 공연 등이 이어진다. 그 어느 때보다 역동적이고 풍성한 문화 예술 축제를 통해 경주는 이제 더 이상 역사에만 기대는 도시가 아님을 증명할 것이다. APEC 정상회의 개최를 발판 삼아 새롭게 도약할 경주의 미래가 기대되는 이유다.
에디터 정송(song@noblesse.com)
사진 솔거미술관, 우양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