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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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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한국 사회를 대변하는 단어 중 하나는 ‘혐오’다. 왜 우리는 무엇을 그토록 싫어하고 미워하는 것일까?

작가 잭슨 홍이 2008년 갤러리2에서 가진 개인전 를 위해 작품 ‘상식’으로 연출한 이미지

산업 디자이너 출신 작가 잭슨 홍의 작품 중에 ‘상식(Common Sense)’이 있다. 2008년에 발표한 작품이니 벌써 시간이 꽤 흘렀는데, 최근 각종 매체에서 ‘혐오’라는 단어를 마주칠 때마다 이 작품이 머릿속에 떠오르곤 한다. 그런 상식 밖의 논리와 감정을 부숴버리고 싶은 마음에서다.
잠시 작품에 관한 설명을 해보자. 그 외양은 제목만큼이나 엉뚱하다. 작가는 야구방망이 모양으로 제작한 흰 오브제에 영문으로 ‘Common Sense’라는 단어를 큼직하게 양각했다. 이를 나무 상자에 넣고는 유리로 덮어 ‘비상시 유리를 깨고 사용하시오(Break Glass in Case of Emergency)’라는 안내 문구까지 친절히 적어두었다. 건물이나 공공장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각종 안전장치나 방재 도구처럼 말이다. ‘작품’으로 전시한 야구방망이를 보면서 관람객은 고개를 갸우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알쏭달쏭한 작품의 메시지는 작가가 가상의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제작한 일종의 티저 이미지에서 극대화됐다. ‘Common Sense’라는 단어가 도드라진 야구방망이의 끝부분이 피를 연상시키는 붉은 액체로 뒤덮여 있었던 것. 관람객은 끔찍한 폭력적 상황이 벌어진 것을 즉각 상상할 수 있었다. 신문 사회면에서나 보던 실제로 야구방망이를 사용한 사건·사고의 한 장면을 자연스럽게 떠올린 사람도 있을 것이다. 당시 작가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이 작품을 제작한 배경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내 상식과 사회의 상식이 충돌하는 경험이 많았다. 심리적 불안이 구체적 일상과 부딪치면서 어떻게 물리적 현상으로 나타나는가에 관심이 있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회를 향한 한 작가의 외마디 ‘외침!’이었던 셈이다.
제작자가 아무리 선의로 만든 사물이라도 그것을 쓰는 사람의 목적과 상황에 따라 누군가에겐 흉기가 될 수 있다는 ‘상식’적 주제를 다소 괴팍한 방식으로 전달한 이 작품이 내게 하나의 원형으로 무의식 어딘가에 남아 있었나 보다. 세월이 흘러 ‘상식’이 느닷없이 떠오른 건 올봄이 지나면서부터였다. 나는 2015년 한국 사회를 급속히 잠식한 ‘혐오’라는 정서와 맞서 싸울 강한 무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기 시작했다. 성 소수자, 이주 노동자, 재난 희생자,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를 향한 이상하리만치 강렬한 무차별적 적의가 사회 곳곳에서 이글거렸고, 때론 그 광경이 눈앞에 아무렇지 않게 펼쳐졌다. 종교를 앞세워 성 소수자 축제에서 수치심을 자극하는 문구를 들고 또 다른 춤판을 벌이는가 하면,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의 단식 투쟁 현장 맞은편에서 치킨을 먹으며 폭식 투쟁이라는 후안무치한 이벤트를 벌였다.

출판계에선 여성주의 이슈와 관련한 책들이 화제다.

이런 풍경을 보면서 ‘이 땅엔 애초에 ‘상식’ 같은 건 없는 것이냐!’라는 강렬한 불신마저 들기 시작했다. 한 사회를 이루는 구성원이라면 마땅히 공유해야 할 일말의 이해력과 판단력, 사리분별이 그 현장에는 없었다. 모두 (내) 상식과 (네) 상식의 옳고 그름을 따져가며 악다구니처럼 서로 싸웠다. 가장 일반화된, 그래서 그 상황 전개가 점입가경이던 혐오의 대립은 남성과 여성 사이에 벌어졌다. 그들은 포털 사이트와 SNS를 통해 서로를 각종 벌레로, 무슨무슨 ‘녀’로 끝없이 비하하며 찍어내기 바빴다. 이 사회에서 남자는 남자대로, 여자는 여자대로 차별을 받고 있다고 호소했다.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라는 선언과 동참의 해시태그가 SNS에서 퍼지며 하나의 운동이 될 때, 이와 동시에 여성을 상대로 한 끔찍한 성범죄 뉴스가 우리의 눈과 귀를 경악하게 했다. 여성 비하 발언을 한 방송인은 시청자의 압력을 받아 자리에서 물러났고, 상식 밖의 행동을 한 기관과 매체, 특정 인물은 자기변명이 뒤섞인 사과문을 세트 메뉴처럼 발표했다.
여성을 혐오하는 남성을 규탄하고 한국의 여성 차별을 폭로하기 위해 ‘남성 혐오’라는 미러링(mirroring) 전략을 구사하는 사이트 ‘메갈리아’의 등장 시점이 메르스가 창궐하던 시기라는 점은 흥미롭다. 바로 이 혐오의 정서가 한국에서 퍼져 나간 방식이 바이러스와 같았기 때문이다. ‘혐오’를 한국 사회를 읽는 또렷한 ‘징후’로 확진한 논문, 특별 기사와 시사 프로그램이 잇따라 제작됐다. 특히 여성 혐오 이슈를 다룬 서적이 출판계에서 화제를 모았다. 도대체 ‘왜 지금 이 시점에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할까?’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찾는 사람이 많아졌다는 의미일 것이다. 2012년에 출간한 일본 사회학자 우에노 치즈코의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가 다시 주목받기 시작하더니, 성인류학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게일 루빈의 선집 <일탈>이, 2010년 <뉴욕타임스>가 선정한 올해의 단어로 2014년에 옥스퍼드, 온라인 영어사전에 실린 신조어 ‘맨스플레인(mansplain, man+explain)’을 만든 리베카 솔닛의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가 연달아 번역 출간돼 인기를 끌었다. 여성주의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모여 한국의 여성 혐오 현상을 분석한 <여성 혐오가 어쨌다구?>도 출판됐으며, 젊은 예술가와 디자이너가 주축이 된 무크지 <도미노>도 여성주의 이슈를 전면에 내세웠다.
21세기 한국에서 혐오의 감정이 번식한 근본적 원인은 무엇일까? 여성문화이론연구소의 손희정은 ‘혐오의 시대–2015년, 혐오는 어떻게 문제적 정동이 되었는가’라는 글에서 21세기 한국에서 정치를 비롯한 다양한 사회적 영역이 혐오라는 정동(affect)을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혐오를 “자신의 존재와 그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정체성을 견고하게 하고 강화하며, 그것을 관계망 안에서 주체적으로 확인하려는 열정적인 정동”이라고 정의하면서 한국에서 혐오가 대두한 원인으로 전통적 가치관의 붕괴와 그것에 대한 향수, 대의적 차원의 거대 담론과 소신이 사라진 시대에 정체성이 불안정해진 개인의 소속감을 향한 강렬한 열망 등을 지목했다.
그의 지적대로 혐오가 어떤 대체물로서 기능하는 극단적 상황이 반복된다면, 그래서 그 안에서 편안함을 찾는다면 어떤 문제가 발생할까? 현재의 혐오가 언젠가 누군가의 그럴싸한 상식으로 자리 잡는다면? 법철학자이자 정치철학자 마사 너스바움은 <혐오와 수치심>에서 공적 판단의 근거로 활용하는 혐오에 관해 분석한다. 그는 혐오가 약자를 파괴함으로써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강자들만의 부당한 논리로 확대·재생산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그러나 혐오는 그렇게 쉽게 무너질 성벽이 아니다. 일각에서는 혐오가 일으키는 긍정적 효과를 주목하자고 말하기도 한다. 너스바움은 그에 대해 “한 사회가 갖는 악덕과 부도덕한 행동에 대한 증오는 필연적으로 혐오를 수반하기 마련이며, 이러한 혐오 없이는 사회가 유지될 수 없다는 주장”이라고 설명한다.

배우 에마 왓슨이 젠더 평등을 위한 캠페인 ‘He For She’를 런칭하면서 연설하는 모습

​보수주의자들의 주장처럼 혐오가 인간의 문화에 긍정적으로 기여해왔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스튜어트 월턴은 <인간다움의 조건>에서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감정 중 하나로 혐오를 꼽았다. 그것은 어떤 대상에 대한 공포, 분노, 슬픔, 질투, 경멸, 수치, 당황, 놀람, 행복과 함께 인간의 진화 과정에 깊숙이 관여해왔다는 것. 그러나 지금 한국에서 번지고 있는 혐오는 인간이 자연 상태에서 피해야 할 위험 요소를 감지하기 위해 사용하는 쓸모 있는 감정이 아니다. 남성이 여성을, 여성이 남성을 썩은 고기나 배설물 따위로 여긴다면 우리의 앞날은 얼마나 끔찍할까?
원시사회가 아닌 다음에야 혐오 논란의 (어쩌면 유일한) 긍정적 효과는 학습에 있을 것이다. 지금 이 사회는 무엇이 잘못됐으며, 고쳐야 할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내가 말해야 할 것과 말할 수 없는 사안은 어떤 것인지 깨닫는 것 말이다. 이 사회가 한 개인의 무의식에 주입한 지독한 편견과 고정관념을 타파하고, 모두를 위한 새로운 상식을 만드는 일!
무엇보다 잊지 말아야 할 점은, 혐오 발언이 결코 ‘표현의 자유’가 아니라는 것이다. 혐오가 그리고 그러한 발언과 행동이 얼마나 큰 문제인지는 혐오 발언의 대상에 나를 대입함으로써 손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일본의 여성 변호사이자 인종차별철폐 NGO네트워크 간사인 모로오카 야스코는 혐오 발언의 심각한 실태를 <증오하는 입>이라는 책에서 파헤친다. “혐오 발언은 단순히 ‘사악하고’ ‘지지를 받기 어렵고’ ‘부적절하고’ ‘불쾌한’ 표현이 아니다. 협박과 명예훼손으로 타인의 인권을 침해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듯이, 혐오 발언 또한 인권을 침해하는 표현이며 허락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혐오 발언을 ‘불쾌하다’거나 ‘부적절하다’는 식으로 가볍게 여기는 것은 혐오 발언이 초래하는 돌이킬 수 없는 심각한 인권침해와 사회 파괴라는 해악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덧붙여 “혐오 발언을 법으로 규제해야 하는 것은 각국 정부의 자의적인 판단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인권의 근본 원칙이자, 집단살해와 전쟁 방지라는 국제사회의 공통적 가치관을 토대로 도달한 원칙”이라고 강조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런 기초적인 ‘상식’이다.

에디터 김재석 (jskim@nobless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