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 추 니엔, 그가 예술로써 할 수 있는 것
호 추 니엔은 동남아시아 역사 속 가려진 레이어를 풀어내 미지의 세계로 담론을 확장하는 작가다. 역사를 관찰하고, 사실과 신화를 엮고, 문학과 미술사, 음악 등 다양한 레퍼런스를 차용해 사실과 허구의 경계에서 정서적, 신체적 충격을 가하며 관람객을 다감각적 세계로 끌어들인다. 수년에 걸친 방대한 리서치 결과물과 그가 심어놓은 여러 장치로 점철된 작품에서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역사, 알지 못하는 것, 혹은 알고 있다고 믿는 것, 작가의 기억과 해석이 한데 뒤섞여 휘몰아친다. 그의 작품은 모호하고 불안하며 동시에 연극적이고 웅장하다.

T for Time, Algorithmically edited double channel HD video, 5.1 channel sound, 24 flatscreens, scrim wall and screen, 2023, Installation View of 〈Time & the Tiger〉, Singapore Art Museum, Singapore, 2023. Courtesy of Singapore Art Museum.

호 추 니엔 1976년 싱가포르에서 태어난 호 추 니엔은 멜버른 대학교 빅토리아 예술대학과 싱가포르 국립대학교에서 수학했다. 영화, 영상, 퍼포먼스, 멀티미디어 설치, 저술 등 다양한 매체로 작업하는 그는 2011년 베니스 비엔날레 싱가포르 국가관 작가로 참여했고, 테이트,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 시드니 아트스페이스, ZKM, 카타르 국립박물관 등 전 세계 유수의 기관에서 작품을 선보이며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Photo by Matthew Teo
지난 3월에 막을 내린 싱가포르 미술관(Singapore Art Museum) 전시로 다시 한번 호평을 받은 호 추 니엔의 개인전이 현재 서울 아트선재센터와 도쿄 도쿄도 현대미술관(Museum of Contemporary Art Tokyo) 등 아시아의 주요 미술 기관에서 잇따라 열리고 있다. “작품의 형식, 내용, 과정, 결과물이 항상 낯설고 새롭고 아름다운 방식으로 공감을 불러일으키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그의 말이 대변하듯, 전시는 호평 일색이다.
현재 아시아 주요 도시에서 개인전이 한창이죠. 싱가포르 미술관 전시 〈Time & the Tiger〉(2023년 11월 24일~2024년 3월 3일)에 이어, 현재 서울 아트선재센터의 〈Time & the Cloud〉(6월 4일~8월 4일)와 도쿄 도쿄도 현대미술관의 〈A for Agents〉(4월 6일~7월 7일) 등 전시 제목도 흥미롭네요. 아트선재센터 전시 제목도 싱가포르 전시처럼 호랑이를 형상화하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한국 땅은 호랑이 모습을 하고 있잖아요. 그래서 서울에서는 호랑이 대신 끊임없이 변화하는 구름을 표현했습니다. 도쿄 전시에서는 최경화 큐레이터가 제안한 제목 ‘A for Agents’가 제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어요. 1939년부터 1947년까지 말레이공산당 총서기이자 프랑스, 영국, 일본 비밀 기관의 3중 요원인 라이 텍(Lai Teck)에 관한 영화 〈이름 없는 자(The Nameless)〉(2015) 등 제 작품의 소재이기도 한 ‘비밀 요원’이 떠오르죠. ‘능력(agency)’, 즉 세상에서 의지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한 주관적 경험을 의미해요. 우리는 늘 여러 힘의 작용에 노출되니까 에이전트를 복수형으로 표현했고요.
세 전시에 모두 등장하는 신작 ‘T for Time’(2023)은 어떤 작품인가요? 가장 최근에 완성한 작품입니다. 아트선재센터와 싱가포르 미술관이 공동으로 커미션하고 샤르자 예술재단과 도쿄도 현대미술관이 후원한 프로젝트예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시간, 나아가 복수형인 시간들, 성격, 규모, 차원이 다 다른 다양한 시간에 관한 작업이에요. 우주의 시간부터 ‘광자(photon)’ 같은 미립자의 시간,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시계가 계산하고 측정한 시간부터 그리니치자오선이 설정되기까지 이야기, 경도, 항해, 식민지, 제국주의, 전쟁 등에 관한 작품이죠. 일제강점기, 일본의 근대성,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동남아시아에서 점령한 모든 영토를 도쿄 시간에 맞추려던 일본의 계획, 원자의 시간, 원자시계, 원자 붕괴의 통계적 시간, 도요타식 시간 관리의 ‘정시’ 시스템, ‘미래’라는 단어가 없는 말레이어, 우연과 동시성의 시간, 우리의 주관적 시간 감각, 프로이트가 영원하다고 말한 무의식, 우리 기억 속 가상의 시간, 지구의 자전과 빛에 의해 동기화되는 생체 시계까지 모두 아우릅니다.
시간에 관한 모든 것이 담겨 있네요. 좀 더 듣고 싶어요. 이렇듯 다양한 시간성이 공존하고 공명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 작품입니다. 작품은 순 킴(Soon Kim)의 색소폰 솔로 연주에 맞춰 60분이라는 구조 속에 존재하는데, 제게는 마치 이 연주가 연주자의 호흡으로 유지되는 사유의 선(線) 같아요. 하지만 60분마다 알고리즘이 작품의 순서를 재배열하고, 글의 유형을 선택하고, 형상을 합성하며 반복적이면서도 서로 다른 구조를 생산해내죠. 이 작품을 하나의 타임라인으로 축소할 수 없게 하는 데 가장 중점을 두었습니다.
작품 전반에 걸쳐 다양한 형태로 드러나는 시간과 동시대성 개념이 아주 중요해 보입니다. 실제로 시간의 개념은 제 작업의 본질입니다. 제가 작업하는 이미지와 사운드, 그리고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영향력은 모두 어찌 보면 관람객과 함께 시간 속에서 어떠한 형태를 만들어내려는 시도예요.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시간 속에서 특정한 형태를 만들어내려는 노력입니다. 우리 모두는 동시대에 주어진 모든 시간을 살아내고자 노력하잖아요. 시간 자체도 직선, 시계의 화살표, 또는 화살표의 기울기 등 다양한 모양을 취합니다. 물결선, 나선형 선, 원형 등도 있고요.
작품에서 시간만큼 중요한 것이 ‘호랑이’죠. 그걸 꾸준히 파고든 이유가 있다면요? 제가 호랑이를 선택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오히려 호랑이들이 대리인으로 저를 선택한 거죠. 하지만 호랑이에 대해 그리고 그들과 함께 고민할 시간이 많았던 것은 사실입니다. 호랑이가 경계를 넘나드는 동물이라는 점에 매력을 느꼈어요. 동남아시아의 여러 우주론에서 호랑이는 사회의 여러 경계에 존재하는 조상, 주술사, 부랑자와 연관이 있는데, 이는 호랑이가 숲과 물 사이 환경에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생태계에서 이들의 위상이 어떻게 먹이사슬의 최상위 포식자에서 먹잇감으로, 식민지 시대 박제된 트로피로 변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관심이 있어요. 유령처럼 은유적 메타포로서만 존재하게 된 경위 말이죠. 또 한 가지, 호랑이의 귀소본능도 매력적이에요. 이런 성향이 마치 신성한 기계처럼 영원한 귀환의 징표 같아 보이거든요.
아트선재센터 전시에서는 어떤 작품을 볼 수 있죠? 2019년부터 2022년까지 일본 제국주의 역사를 폭넓게 다룬 세 작품 중 첫 번째 작품 ‘Hotel Aporia’를 전시합니다. 전쟁을 겪은 다양한 일본인, 전쟁 당시 전통 여관을 운영한 여인, 첫 번째이자 마지막 임무 수행을 위해 떠나기 전 여관에서 최후의 만찬을 한 가미카제 조종사 편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동남아시아로 파견되어 선전물을 만든 일본 영화 거장 오즈 야스지로(Yasujiro Ozu)와 만화가 요코야마 류이치(Ryuichi Yokoyama)를 시청각 형식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절대 무’ 개념으로 서양철학을 극복하고자 한 일본 철학자 그룹 교토학파도 소개해요. 그리고 제가 영상에 글 넣는 것을 지양하던 시절에 만든 ‘Newton’(2009), ‘Earth’(2009), ‘The Cloud of Unknowing’(2011) 등도 선보일 수 있어 기쁩니다. 이 전시는 제 작품 중에서 비물질적이면서도 동시에 구름처럼 밀도 있는 작품을 한데 모은 독특한 기획전입니다.
도쿄도 현대미술관 전시 방식이 흥미롭더군요. 서로 다른 작품을 계속 번갈아가며 전시하고, 전시 공간도 마치 여러 정체성을 가진 에이전트처럼 시간의 흐름에 따라 형태가 달라지고요. 이 전시에서는 시간의 단면을 실험해봤습니다. 두 전시를 하나의 공간에 잘라 붙였어요. 시각예술 분야에서는 한 공간에서 하나의 작품을 보는 데 익숙하죠. 일종의 영역성과 존재감에서 비롯한 선호도예요. 하지만 관람객은 물리적으로 한 번에 한 공간에만 있을 수 있습니다. 저는 둘 이상의 작품이 하나의 기술적 몸체나 장비를 공유하는 작업을 선보이는 데 관심이 있어요. 하지만 이 ‘2-in-1’은 말씀하신 것처럼 여러 정체성을 가진 에이전트, 하나 또는 여러 주체를 잇는 통로와 같아요.
2017년부터 진행 중인 ‘동남아시아 비평 사전(CDOSEA)’ 이야기를 해볼까요. 당시 서울에서 이 작업을 선보이셨을 때도 인상 깊었습니다. 약 7년이 지난 지금, 프로젝트는 어디까지 왔나요? <논어>에서는 ‘역경’을 ‘변함없는 변화’라고 표현합니다. 이 작품도 그와 닮았다고 생각해요. 알고리즘 편집 시스템을 통해 끊임없이 변화하지만 그 핵심에는 2017년에 처음 선보인 이래 변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위상수학자에게는 도넛과 컵이 같은 물체라는 농담이 문득 떠오르네요. 어떤 의미에서 위상수학은 하나의 사물이 변화하면서도 한편으론 동일하게 유지될 수 있는지 파악하는 과학이에요. 변형 속에서도 동일성을 유지하는 도형이죠. 소설이나 연극의 등장인물처럼 일련의 변형을 겪으면서도 동일한 캐릭터를 갖는 거예요.
모든 작품이 방대한 리서치를 거쳐 탄생했죠. 작품을 볼 때마다 놀랍습니다. 리서치는 단순히 정보를 얻거나 담론을 숙달하는 과정이 아닙니다. 다른 세계에 빠져들기 위해 거쳐야 하는 과정에 가깝죠. 자유롭게 움직이고, 숨 쉬고, 꿈을 꿀 수 있어야 작품이 탄생할 수 있어요.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런 세계에서 1~2년 동안 살아야 하기도 하고요. 때로는 프로젝트가 길어지고, 이 세계가 다른 세계와 융합하기도 합니다.
꾸준한 리서치가 일상화한 만큼 새로운 프로젝트로 연결, 확장되기도 하겠네요. 모든 건 연결돼 있어요. 때로는 시작점과는 동떨어진 방향으로 전개되는 듯 보이기도 하지만, 끝과 끝을 한 번만 접으면 바로 시작점으로 다시 돌아올 때가 많죠. 접기 또한 제가 매우 흥미롭게 생각하는 또 다른 시간의 형태입니다. 거듭 반죽을 하면서 세상의 두꺼운 반죽에 시간을 가두는 거예요. 따라서 리서치는 작품이 탄생하는 세계에 상상, 감각, 조형적으로 머무를 수 있는 방법입니다. 제 세계를 여러 방향으로 빼곡하게 채운, 지층이 두꺼운 땅에 세우고 싶어요. 별이 가득한 하늘, 별자리를 상상하게 하는 별점을 연결해 모양을 만들고, 별의 안내를 받으며 밤바다를 가로지를 수 있는 곳이 되겠죠.
그럼 프로젝트의 결과물을 먼저 구상하고 리서치를 진행하세요? 최종 결과물 자체만큼이나 방법을 찾는 과정 또한 프로젝트의 일부예요. 결과물을 미리 알았다면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했을 거예요. 하지만 시작 단계에서는 제가 전달하고 싶은 구체적이고 정확한 감각, ‘미치고 싶은 영향’이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바로 이 순간, 다른 사람들에게 전혀 다른 매체, 맥락, 속도, 지속 기간을 통해 특정한 영향력을 발현할 방법을 찾아나가는 과정에서 작품이 탄생하죠.
서구인이 아닌 입장에서 싱가포르 등 동남아시아의 역사적 사건, 신화, 정치 이데올로기, 주체성, 문화적 정체성을 다룬 작품이 많습니다. 직접 몸담은 세계의 이야기를 때로는 집중적으로, 때로는 더 큰 서사의 일부로 바라보는데, 주제는 어떻게 선택하세요? 일부러 서구적이지 않은 관점에서 작품을 만들려고 한 적은 없는 것 같아요. 일단 저는 항상 가장 가까운 맥락, 심지어 저 자신의 가정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대체로 제 첫 작품 ‘Utama – Every Name in History is I’(2003)를 싱가포르의 식민지 이전 창시자에 대한 작품이라고 묘사하곤 하는데, 이는 훗날 싱가포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어느 섬 해안에서 사자를 발견한 상 닐라 우타마(Sang Nila Utama)라는 사람에 대한 작품입니다. 싱가포르는 산스크리트어로 ‘사자의 도시’를 뜻해요. 하지만 이 창시자의 계보를 추적하면 외부로, 수마트라 왕국으로, 남아시아의 촐라 왕국과 관련된 혈통으로,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로, 솔로몬 왕으로 이어지거든요. 본질은 항상 이미 외부에 있습니다.
지금까지 작가로서 좋은 행보를 보여주신 만큼, 앞으로도 무궁무진한 작업이 기대됩니다. 미래 계획과 새롭게 다루고 싶은 주제가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최근 권력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권력을 ‘외부에서 행사하는 것, 다른 사람에게 지시하는 것, 다른 사람 위에 있는 것’으로 이해하는 방식에 대해 말이죠. 하지만 가장 넓은 대역폭과 가장 높은 강도로 영향을 받으면서도, 그 형태를 유지하는 어떤 신체 능력으로 권력을 이해하는 방향으로 새롭게 접근해보고 있습니다. 즉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만 영향을 받고, 민감해지고, 개방되고, 수용적이 되거나 증폭될 수 있는 능력으로서 권력을 떠올려봅니다. 앞으로 펼쳐질 길은 미스터리입니다. 가끔은 앞으로 나아가면서 지나온 길을 다시 밟는 자신을 발견하곤 해요. 하지만 기대됩니다. 옛 길을 다시 걷다 보면 새로운 생각과 감각을 얻게 되니까요.
글 백아영(프리랜서)
에디터 정송(song@noblesse.com)
사진 키앙 말링그(Kiang Malingu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