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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혈하는 이이남

LIFESTYLE

‘얼리어답터’라는 말로도 모자랄 만큼 다양한 디지털 기기를 통해 작품을 선보여온 이이남 작가가 이번엔 ‘가상현실’과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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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남은 디지털 기술과 동서양 고전을 접목한 ‘뉴미디어 아트’로 주목받아왔다. 김홍도의 명화 ‘마상청앵도’에 애니메이션 기법을 더해 그림 속 인물과 새들이 움직이게 하는 작품을 선보이는가 하면, 밀로의 ‘비너스’ 조각에 프로젝트 빔을 투사해 ‘고정불변’하다고 여기던 동서양 거장의 작품에 새 이미지를 부여했다. 새와 나비가 날고, 만개한 매화가 바람결에 흩날리며 향기를 퍼뜨리는 풍경. 10여 년 전, 그가 세상에 선보인 디지털 병풍 작업은 상상 속에서나 가능하던 것이 눈앞에 펼쳐지는 어떤 것이었다.
그런 그가 최근 또 다른 디지털 미디어와 합을 맞췄다. 이번엔 ‘가상현실’이다. 예술과 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모색해온 ‘구글 컬처럴 인스티튜트’가 올 초 공개한 가상 현실 프로그램 틸트 브러시(Tilt Brush)를 통해서다. 틸트 브러시는 HTC의 인공지능 체험 기기 ‘바이브’를 이용해 가상 공간에 3차원 입체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해주는 프로그램. 포토샵처럼 다양한 색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것은 물론, 예의 ‘슈퍼 마리오’ 게임처럼 별이 쏟아지고 번개가 떨어지는 효과 또한 구현할 수 있다. 말하자면 그가 ‘디지털 병풍’속에 10여 년 전 가둔 나비와 새, 흩날리는 꽃잎 같은 것을 가상의 공간에 실제같이 구현 해주는 기술.
그는 이 틸트 브러시로 만든 작품을 지난 9월부터 열린 부산비엔날레의 전시장에 공개했다. 제목은 비엔날레의 주제 ‘혼혈하는 지구, 다중지성의 공론장’에서 따온 ‘혼혈하는 지구’. 해당 작품을 만들기 위해 그는 지난해 여름부터 반년간 프랑스 파리 소재 구글 연구소를 왕래했다. 신기술에 민감한 미디어 아트 작품을 만드는 만큼 여러 엔지니어와 작업에 대해 논했고, 결국 비엔날레를 찾은 모든 관람객이 직접 체험해볼 수 있게 오픈 형태의 작품으로 선보였다. 쉽게 말해, 그가 틸트 브러시로 그린 작품을 다시 프로그램에 삽입해 관람객이 그의 작품 위에 또 다른 그림을 완성할 수 있게 한 것. 한마디로 이이남 작가와 틸트 브러시, 관람객의 공동 협업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간 선보인 그의 미디어 아트 작품 대부분이 평면 화면에 구현한 영상이었다면, ‘혼혈하는 지구’는 인공지능 체험 기기를 이용해 실제 사물을 보듯 360도로 살필 수 있는 게 특징이다. “부산비엔날레의 주제가 마침 ‘혼혈’이었기 때문에 틸트 브러시로 관람객과 함께하는 작업이 의미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정약용의 경전 주석서 중 자연의 이치를 다룬 한자를 틸트 브러시로 그린 후 관람객이 그 위에 또 다른 그림을 겹쳐 그릴 수 있게 했죠. 한자를 전면에 내세운 건 저 같은 아시아 예술가가 서양(구글)의 테크놀로지와 함께한다는 의미이기도 했어요. 이번 비엔날레에서 되도록 많은 이와 협업해 세상은 혼자 살 수 없다는 것을 작품으로 표현하고 싶었죠.”

1 틸트 브러시를 시연하는 이이남 작가 뒤로 보이는 ‘혼혈하는 지구’
2 해외의 틸트 브러시 사용자가 공개한 3차원 그림
3 틸트 브러시로는 ‘3차원 포토샵’처럼 자유자재로 입체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사실 그는 대학에서 미디어 아트와는 전혀 관계없는 조각을 전공했다. 로댕이나 미켈란젤로 등 근대 조각에 뿌리를 두고 공부하는 것 말이다. 하지만 그는 디지털 미디어에 관심을 보이며 어떻게 하면 기존 작품과 미디어를 접목해 새로운 예술 세계를 만들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러면서 생각이 열렸고, 주변의 모든 자극이 상상력을 자극했다. 그렇게 미술가의 인생을 살게 됐다. “조각을 할 땐 흙을 제 맘대로 주무를 수 있어야 해요. 그리고 미디어 아트를 할 땐 미디어를 의도대로 제어할 수 있어야 하죠. 미디어 아트라고 디지털에만 집중하면 예술성은 떨어져요. 그건 늘 차가우니까요. 그래서 미디어 아트는 ‘어떻게 조합하느냐’가 가장 중요해요. 이번 틸트 브러시 작업에선 조각을 공부한 제 경험이 큰 도움이 됐어요. 무엇보다 ‘만들어놨을 때’를 상상할 수 있으니까요. 제가 평면 회화를 공부했다면 입체를 이해하지 못했을 거예요.”
그럼 이제 그에게 가상의 눈과 팔이 되어준 틸트 브러시에 대해 알아보자. 이 프로그램을 사용하려면 반드시 헤드셋을 끼고 양손에 컨트롤러를 쥐어야 한다. 그럼 가상의 공간이 눈앞에 펼쳐지고 색상을 고를 수 있는 팔레트,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붓이 손에 쥐여져 원하는 그림을 그릴 수 있다. 물론 처음 사용자가 가장 놀라는 건 그림을 그릴 캔버스가 ‘평면’이 아닌 ‘공간’이라는 것. 입체 그림을 그린다는 개념이 누구에게든 생소하겠지만, 10분만 만지작거리면 쉽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이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파리 구글 오피스에서 처음 틸트 브러시를 접한 순간을 지금도 기억해요. 헤드셋을 쓴 뒤 눈을 떴는데 컴컴한 공간만 보였죠. 한데 그마저 ‘툴(팔레트)’ 같은 게 허공에 떠 있어서 그것이 가상현실임을 알 수 있는 수준이었어요. 우리가 흔히 허상인데 실체같이 느껴진다는 얘길 하잖아요. 틸트 브러시는 가상현실을 단순히 ‘보는 것’에서 나아가 직접 ‘체험해볼 수 있게’ 한 기술의 진보라고 할 수 있죠.”
지난해부터 이이남 작가가 틸트 브러시로 ‘혼혈하는 지구’를 만드는 전 과정을 지켜본 구글 컬처럴 인스티튜트의 김윤경 프로그램 매니저도 틸트 브러시에 대해 한마디했다. “작가가 그린 3차원 드로잉 주변을 직접 거닐며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것, 또 작가가 그린 그림 위에 관람객이 또 다른 예술적 표현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이 틸트 브러시의 가장 큰 기술적 특징이라고 봐요.” 참고로 이번 부산비엔날레에서 ‘혼혈하는 지구’는 관람객 참여형 작품 중에서도 가장 긴 줄을 세운 작품이었다고 한다. 관람객은 틸트 브러시를 통해 자신의 작품을 만드는 것은 물론, 전시장 한편에 마련한 프린터를 통해 작품을 프린트해 소장할 수도 있었다.
이쯤 되니 이런 궁금증도 생긴다. 현대미술이 이렇게 대중과 친숙해도 되는 걸까 하는 의문. “요샌 사람들이 예술 작품 앞에 오랜 시간 머물지 않아요. 작가가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소통을 더는 받아들이려 하지 않죠. 그래서 전 이전부터 관람객을 상대로 객관적 소통을 시도했어요. 대중에게 친숙한 디지털 미디어를 통해 관람객이 편하게 다가올 수 있게 놔두는 거죠.”
그는 인터뷰 중간에도 틈날 때마다 눈앞에 있는 책을 뒤적이며 사진을 찍었다. 신기한 것이 있으면 얼굴을 들이밀어 관찰했고, 자신의 작품에 어떻게 차용할 수 있을지 생각했다. 그는 미디어 아트가 어렵다는 혹은 너무 쉬워 눈길이 가지 않는다는 선입견을 덜어내는 역할을 하는 중요한 아티스트다. 누군가 예술가를, 늘 한발 앞서 미래와 현재를 연결하는 수행자라 칭한다면 지금 그와 그의 작업은 그 정점에 있다. 새로운 미디어를 통해 앞으로도 이전에 없던 작업을 선보이겠다는 그의 또 다른 작품이 기대된다.

“조각을 할 땐 흙을 제 맘대로 주무를 수 있어야 해요. 그리고 미디어 아트를 할 땐 미디어를 의도대로 제어할 수 있어야 하죠. 미디어 아트라고 디지털에만 집중하면 예술성은 떨어져요.
그건 늘 차가우니까요.”

에디터 이영균(youngkyoon@noblesse.com)
사진 김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