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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혜의 세상 속으로

ARTNOW

무엇이든 쉽게 흡수하는 열린 자세, 그리고 순발력과 감각을 겸비한 작가 홍승혜.

작업실에서 홍승혜 작가.

홍승혜 1959년 서울에서 태어난 홍승혜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하고 파리 국립미술학교(Ecole Nationale Superieure des Beaux-Arts, Paris)에서 수학했다. 국제갤러리, 서울시립북서울미술관, 일민미술관, 아뜰리에 에르메스,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등에서 작품을 선보였다. 홍승혜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리움미술관, 아트선재센터 등 주요 컬렉션에 포함돼 있다.

8월 16일부터 10월 28일까지 송은에서 열리는 단체전 《파노라마》에 참가하시죠.
송은빌딩 입구에 전시 홍보용 LED 스크린이 있어요. 그 패널이 제 작품의 무대예요. 패널의 원래 용도와 무관하지 않게 전시 참여 작가 15팀을 모두 아우르는 작업을 구상했어요. 제 조형 언어인 도형을 써서 작가들이 도형으로 변신해 송은이라는 우주를 유영하게 했죠. 작가들의 작업 텍스트와 이미지를 도형화하고, 그 형상이 모이고 흩어지는 모습을 연출했어요. 작가들의 유기적 관계를 일종의 ‘파노라마’로 만들었어요. 제 작업이 일종의 전시 포스터가 되는 거죠. 장소의 의미를 반영한 ‘장소 특정적’ 작업을 선보이고 싶었어요.
지난 2월 9일부터 3월 19일까지 국제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 《복선을 넘어서 II》도 반응이 좋았어요. 최근 본 갤러리 전시 중 제일 기자가 많이 몰린 것 같았어요. 당시 작가님의 별명 ‘홍당무’를 다룬 작품도 있었고, 꽃, 하늘, 우주 등 다양한 주제와 소재가 등장했죠. 갖가지 도형의 조합이 의외의 형상을 만들어냈고요. 특히 〈꽃병〉은 당장 제 방에 가져다 놓고 싶었어요.
저는 다가오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여요. 제 유년 시절과 연결된 이야기나 동화 레퍼런스, 문화와 일상의 인상 등이 떠올랐고, 자연스럽게 작업으로 이어졌어요. 그리고 원래 단순한 형태를 좋아해요. 특정한 대상을 만들려는 의도보다는 도형을 늘어놓고 조합하며 무계획적으로 연결하다 보니 테이블, 꽃병, 별똥별 등이 탄생했어요. 결국 제가 좋아하는 대상이 작품에 나오더군요. 물론 꽃은 만인이 좋아하지만 오히려 현대미술에서는 살짝 금기시하는 경향도 있잖아요. 하지만 개의치 않아요. 좋아하는 걸 구태여 피할 이유는 없죠. 또 제가 만든 형태는 재현적이라기보다는 구축적이에요. 어떤 요소를 벽돌처럼 쌓으면 기하학적이고 건축적인 이미지가 나올 수밖에 없어요. 실제 공간을 만들기 위한 밑그림이라고도 할 수 있어요. 물론 어느 정도 저만의 조형 문법이 생기고 나니 이제는 어떤 구체적 대상을 염두에 두고 시작할 때도 있고요.

국제갤러리 개인전 《복선을 넘어서 II》 설치 전경. 사진 제공. 국제갤러리
아래 〈꽃이 피면〉, 2023, 자작나무 합판, 아크릴 라텍스 페인트, 60×80×81.5cm, 160×5×1.5cm (바). 사진 제공. 국제갤러리, 사진. 안천호

앙리 마티스에 관한 작업도 인상적이었어요.
대학 시절 마티스의 색채 주도적 회화를 접하고 미술에 진정한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어요. 전시에서는 마티스에게 경의를 표하고자 전시실의 벽면 모서리를 잘라낸 〈레몬 자르기(Le Citron Decoupe/Homage a Matisse)〉와 〈하늘 자르기(Le Ciel Decoupe/Homage a Matisse)〉를 선보였죠. 마티스가 말년에 선보인 파피에데쿠테(papier decoupe, 종이 콜라주 기법) 작업에 대한 오마주입니다.
작가님의 대학 시절이라, 더 자세히 듣고 싶네요.
사람의 취향이 어떤 계기를 통해 변하더군요. 대학 3학년 때 색채 감각이 남다른 친구가 있었는데, 한창 열심히 그리던 작품의 배경색을 갑자기 완전히 바꾼 거예요. 그때 작품 속 공기가 확 변하는 걸 보며 색의 힘을 느꼈죠. 그 전에는 데생에 관심이 많았거든요. 한국 입시 미술은 현실을 리얼하게 그리도록 가르치잖아요. 원래 렘브란트 작품에 깃든 남다른 사실성을 좋아했지만 색채의 힘을 안 뒤로 마티스에게 푹 빠졌죠. 그때부터 색채가 제 조형의 밑거름이 됐어요.
대학에서 회화를 전공했지만 1990년대 후반부터 붓이 아닌 픽셀로 작품을 만들고 있죠. 컴퓨터를 활용하고, 3차원 공간에 작품을 놓고요. 당시 새로운 매체를 맞닥뜨린 계기가 궁금합니다.
1995년에 국제갤러리에서 개인전을 마친 후 어마어마한 슬럼프를 겪었어요. 그 전에는 자그마한 화폭에 종이 콜라주 작업을 하다가 점점 현실이나 실제 공간에 개입해 작품을 만들고 싶어졌어요. 스케일 면에서 갈증이 생겼고 수공 방식에 한계를 느꼈죠. 공란에서 뭔가를 구축해나가는 것이 제 궁극적 조형 목표였거든요. 그때 우연히 그림판과 픽셀을 알게 됐죠. 네모 바깥의 실제 공간으로 나오고 싶었는데, 크게 확대해도 형태의 비율과 힘을 유지할 수 있는 컴퓨터가 결정적 출구 역할을 했어요. 처음엔 그림판과 포토샵 픽셀을 구축하면서 시작했지만 이후 플래시 MX, 개라지밴드(GarageBand)를 접하고 영상, 사운드의 세계로도 진입했어요. 최근에는 뒤늦게 일러스트레이터를 배워 픽셀에서 벗어난 벡터 문법의 도형을 생산했죠.

〈꽃병〉, 2023, 자작나무 합판, 아크릴 라텍스 페인트, 23×50×63.5cm (화병), 160×5×1.5cm (3개의 바). 사진 제공. 국제갤러리, 사진. 안천호

〈콘솔/테이블〉, 2023, 자작나무 합판, 아크릴 라텍스 페인트, 60×80×81.5cm

얼마 전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백남준 효과》전에서 작가님이 직접 카드보드를 잘라 만든 작품 〈종이 풍경〉(1994)을 보니까 참 새로웠어요. 이 작품을 현재의 시공간으로 확장한 〈2D to 3D〉(2022)를 함께 소개했죠.
그 전시 덕분에 30년 만에 예전 작품을 꺼내 봤어요. 당시 반복해서 카드보드를 잘라내는 단순한 행위를 하다 보니 점점 고민이 커졌어요. 3차원의 실제 공간에 개입하고 싶은데 해결책이 없었죠. 그러다 디지털 프로세스를 통한 다양한 제작 방식을 접하면서 워터젯 커팅이나 CNC 커팅 같은 기술을 축적했어요. 입체로 나아갈 수 있는 돌파구를 찾은 거죠. 1994년 작품에선 종이를 잘라 액자 안에 평면적으로 제시했다면 신작에서는 액자 밖으로 탈출시켜 재현, 확장했어요. 평면을 입체로 탈바꿈했죠.
작품에 쓸 컬러는 어떻게 정하고, 또 작품에서 어떻게 구현하세요?
제가 컬러 때문에 작업을 시작했잖아요. 색과 색이 만나서 생기는 화학적 변화에 흥미를 느껴요. 마치 음악의 하모니처럼 색도 예상하지 못한 케미스트리를 만들어내요. 한동안 검은색을 골격으로 삼원색 위주의 절제된 색채를 구사하다가 올봄 개인전을 계기로 형태가 수평 수직 그리드에서 벗어난 것처럼 색상도 자유로워졌습니다. 그동안 형태 중심적 사고를 하면서 색채를 보완적 역할로 썼다면 이제 색채를 해방시켰어요. 제 작품은 색채형태(color form)라는 용어처럼 형태이면서 동시에 색채죠.

국립현대미술관 《백남준 효과》 (2022.11.10–2023.2.26)에서 선보인 〈종이 풍경〉(1994)과 〈2D to 3D〉(2022). 사진 제공. 국제갤러리

작품 활동에 매진한 지도 30년이 넘었습니다. 꾸준히 감각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은 뭔가요?
새로운 경향이나 도구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요. 미술대학 강단에 서며 젊은 세대와 생각을 주고받은 것도 도움이 됐습니다. 30년에 걸쳐 차근차근 시대상을 읽고자 노력했어요. 또 음악, 영화, 문학 등 모든 대상이 작업에 암암리에 스며들어요. 전시도 많이 보러 다니고요. 예술 생산자 이전에 향유자로 살면서 만나는 모든 것이 제 작업의 출발점인 동시에 총화입니다.
그동안 작품 주제나 마음가짐 등에도 변화가 있었나요?
어린 시절부터 ‘생활미술’을 하고 싶었어요. 지금 제가 건축이나 디자인에 대한 관심이 지대한 걸 보면, 과거의 시선이 변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 목표는 작업을 통해 현실에 개입하는 거예요. 조각대나 화려한 액자 안을 넘어 생활에서 가깝게 접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어요. 집을 짓거나 일상 오브제를 디자인하는 등 전문적이고 까다로운 작업까진 못하더라도, 최소한 제 작업을 통해 제가 꿈꾸는 상태를 표현할 수 있다면 더는 바랄 게 없죠.
앞으로 계획이 궁금합니다.
올 하반기 개최를 목표로 제가 기획한 젊은 조각가들의 전시를 준비하고 있어요. 전문 기획자도 아닌 제가 전시 기획을 한다는 게 외람되지만 그동안 가르친 학생들 전시를 많이 치렀어요. 젊은 작가를 발굴하는 데에도 관심이 있거든요. 개인적으로는 앞으로도 작품을 통해 공간에 건축적으로 개입해 ‘장소’를 만들어나가는 작업을 계속할 생각이에요. 무대예술이나 퍼포먼스에도 관심이 생겼어요. 그동안 2차원에서 3차원으로 작품을 확장했다면 이제는 공간에서 시간으로 관심을 넓힌다고 할 수 있죠.

 

에디터 백아영(summer@noblesse.com)
사진 안지섭(인물)
사진 제공 작가, 국제갤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