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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유진의 넥스트 챕터

LIFESTYLE

에포케 스튜디오로 새로운 도전에 나선 홍유진의 출판 이야기.

책 만드는 사람들이 모이는 서교동 골목에 새로운 출판사가 들어섰다. 미메시스 대표와 열린책들 기획이사로 활약했던 홍유진의 에포케 스튜디오(Epoke Studio). “미메시스가 열린책들에 합쳐지고 나서 아쉬운 지점이 있었습니다. 열린책들은 국내 번역 문학의 새 지평을 연 출판사인 만큼 정체성이 뚜렷한데, 그에 맞지 않아 실행하지 못한 기획이 여럿 있었죠.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겠다는 생각에 도전해보기로 했습니다.” 이름은 ‘판단 보류’라는 뜻의 그리스어 ‘epoche’에서 따왔다. “열린책들과 오랜 세월 동행해온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내한하면 비서처럼 따라다녔는데요, 작가는 명상 전 모든 선입견과 고정관념을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자 에포케 타임을 가진다고 하더군요. 뇌리에 남은 그 단어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개념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여기에 활동 범위를 출판에 국한하고 싶지 않아 ‘스튜디오’를 붙였고요.”
지금 그녀는 염두에 두고 있던 것들을 마음껏 펼쳐내는 중이다. 당장 2월에 출간한 이제야 시인의 시집 <진심의 바깥>부터 그렇다. “예전부터 한국문학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다만 시집 초간본 시리즈를 기획한 적은 있어도, 현대시는 제게 낯선 영역이었어요. 알고 지내던 이제야 작가가 원고를 보냈는데 난해하지 않으면서 서정적이고, SNS 친화적인 것이 왜 젊은 세대가 호응하는지 알겠더군요.” 시집 말미에는 평론이나 해설이 붙기 마련인데, 이 시집은 작가와의 인터뷰로 갈음한다. “일상을 대하는 작가의 독특한 태도와 감성을 드러내는 데에는 인터뷰가 적합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의미 있는 결과물이 나왔어요.” 시집을 시작으로 세상에 나올 책이 여러 권이다. 패션 기업 더캐리 이은정 대표의 이야기가 담긴 인터뷰집, 인플루언서 땡스맘의 세탁 노하우를 집대성한 실용서 등 종류도 다양하다. “경영·인문 등 한두 분야에 집중하는 출판사가 있는 반면, 제한을 두지 않고 각기 다른 프로젝트를 전개하는 곳도 있습니다. 에포케 스튜디오는 후자에 가까워요. 무엇이든 빠르게 변화하는 오늘날에 한층 유연하게 대응할 필요가 있으니까요.”
홍유진의 향후 행보가 기대되는 건 2030 세대 대표 소설가 20명과 일러스트레이터 20명의 합작 프로젝트인 미메시스의 ‘테이크아웃’ 시리즈, 합리적 가격과 모던한 디자인으로 세계문학을 쉽게 즐기도록 유도한 열린책들의 ‘모노 에디션’ 시리즈 등 신선한 출판 기획을 주도했기 때문이다. 그 비결은 의외로 서점 밖에 있다고. “요즘 전시와 공연에서 많이 쓰는 컬러와 디자인을 살피고, 각종 뉴스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는 편입니다.” 지금 그녀의 머릿속을 채운 화두는 홍보 그리고 마케팅이다. “콘텐츠의 홍수 속 유행 주기는 점점 짧아지고 있어요. 책을 찍어내는 데에만 1~2주가 걸리니, 출판계의 호흡으로 따라가기 벅찬 측면이 있죠. 흐름을 좇을 수 없다면 직접 만들어야 합니다. 요새 많이 보이는, 사람들이 관심을 보일 법한 소재로 이야기를 시작하되 책 소개로 마무리하는 SNS 콘텐츠가 그런 노력의 일환입니다. 한편으로 사람들의 취향이 어느 때보다 다양해졌으니, 올바르게 독자를 찾아간다면 어떤 분야의 책이든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으리라 봅니다.”
한국에서 책이 비싸다는 불만은 꾸준히 나온다. 책 한 권 가격이 수백수천 편의 영상 콘텐츠가 담긴 OTT 서비스 구독료와 비슷하니 그렇게 느낄 만하다. “원재료비와 인건비 상승을 고려하면 책값이 더 올라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러기 어려우니 출판사들은 책과 연계한 굿즈를 판매하고, 북 토크 같은 행사를 개최하는 등 수익 구조 다변화에 집중하고 있죠. 저자에게 기대지 않고 출판사 자체적으로 책을 기획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입니다. 얼마 전까지 큰 인기를 끈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말을 엮은 책을 예로 들 수 있겠네요.” 편집숍이나 편의점의 PB 상품 같달까. 이런 방식으로 책을 만들면 텍스트 요약 정도는 훌륭하게 수행하는 인공지능(AI)이 활약할 여지도 충분하겠다. “아직 편집을 맡길 정도는 아닙니다. 하지만 머지않은 미래에 AI가 사람을 대체할 날이 오겠죠. AI의 비중이 커질수록 출판사가 큰 몸집으로 있을 필요도 줄어들 겁니다.”
AI가 우리 삶에 더욱 깊숙이 스며들어도 종이책은 지금 같은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이미 웬만한 정보는 유튜브 영상으로 손쉽게 얻고, 어린아이들은 책보다 태블릿 PC에 익숙한 시대다. “그래도 책의 가치는 유효하리라 생각해요. 책은 한 권을 소화하는 데 적잖은 시간이 걸리는 만큼 읽고 난 후의 성취감도 남다르죠. 한쪽에 치우치지 않은 검증된 지식을 구한다면 책장을 펼칠 수밖에 없고요. 무엇보다 책에는 특유의 물성, 그리고 따뜻함이 있습니다.” 이는 홍유진 대표가 오래도록 출판 일을 지속하려는 이유이기도 하다. “20년은 해야 뭔가 제대로 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5년 정도 남았는데 그간 기획, 홍보, 매출 등 모든 면에서 당당히 내세울 수 있는 콘텐츠를 기획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에디터 황제웅(jewoong@noblesse.com)
사진 조영훈(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