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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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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골프가 유일한 취미인가? 이 정신 사나운 21세기에도 선비의 고고함을 잃고 싶지 않은 당신에게 활을 권한다.

황학정 회원들이 활 쏘는 풍경. 일렬횡대로 서서 각자의 활을 쏜다.

종로구 사직공원 뒤편 인왕산 기슭을 오르다보면 길 너머로 독특한 풍경을 발견할 수 있다. 사람들이 일렬횡대로 모여 활을 쏘는 모습이다. 올림픽 중계에서 보던 커다란 양궁용 활이 아니라 작고 가벼운 우리의 전통 활인 국궁이다. 이 활터의 이름은 황학정(黃鶴亭). 1889년 대한제국 시절 고종의 어명으로 창건한 활터다. 19세기와 20세기 사이, 신식 군대와 화기에 밀려 활쏘기가 퇴출되는 것이 안타까워 만든 곳이라 전해진다. 고종이 노란색 곤룡포를 입고 활을 쏘는 모습이 학과 같다 하여 ‘황학’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조선 마지막 왕의 유산이기에 이곳에는 아직도 고종의 어진(御眞, 왕의 초상화)이 모셔져 있을 정도다.

황학정의 최남섭 사두가 시범을 보이고 있다.

그런 역사성 탓인지 이곳은 예전에는 꽤 폐쇄적인 회원제 클럽이었다. 황학정의 최남섭 사두(활터의 대표)는 말했다. “1994년부터 황학정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기존 회원의 추천을 통해 들어오는 이들이 대부분이었어요. 일종의 검증 과정이 필요했던 거죠. 그래서인지 예전에는 주로 공직자나 학자, 개인 사업자가 많았어요. 하지만 요즘은 성인이라면 누구나 회원이 될 수 있습니다. 인성에 지나친 문제가 있는 분만 아니라면 말이죠.” 성리학이 통치 이념이던 조선시대에는 활쏘기를 심신 수양의 방편으로 여겼다. <맹자>에는 선비가 익혀야 하는 육예(六藝)에 대한 얘기가 등장한다. 그 여섯 가지는 ‘예악사어서수(禮樂射御書數)’, 예법·음악·활쏘기·말타기·글쓰기·셈하기다. 그중 활쏘기에 대한 구절은 이렇다. “마음과 몸의 자세를 바르게 한 뒤 화살을 내보내는데, 맞지 않더라도 나를 이긴 사람을 원망하지 않으며 화살을 맞히지 못한 원인을 반성해 스스로에게 구할 뿐이다.” 과거의 활은 기본적으로 선비의 무예였다. 선비가 심신을 갈고닦는 수단으로 활쏘기를 택한 것이다. 유교의 핵심 개념인 인(仁)을 행함은 곧 활쏘기와 같았다. 그래서일까. 황학정의 회원 리스트에는 정·재계 인사들의 이름도 제법 있다.
황학정 회원인 온종석 선생은 활을 시작한 지 5년가량 됐다고 했다. 그는 아디다스코리아 부사장을 비롯해 쟁쟁한 기업 임원을 거친 베테랑 경영인이다. 예나 지금이나 사업하는 사람에게 최고의 사교는 골프다. 그 역시 오랫동안 골프를 쳤지만 최근에는 골프를 잠시 접고 활에 심취해 있다고 했다. “활과 골프는 어떤면에서 비슷한 데가 있어요. 남을 해코지하는게 아니라 자신과의 싸움이라는 점에서. 하지만 활이 좀 더 명상의 측면이 강하다고 할 수 있지요. 얼핏 보기에는 활이 단순한 듯싶지만 익숙해지려면 생각보다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팔과 등의 근력, 온몸의 균형과 긴장, 호흡까지 다스려야 하니까요. 예컨대 활시위를 끝까지 당겼을 때는 온몸이 긴장감으로 팽팽해져요. 그 절정에서 화살을 쏘면 뭐랄까, 자신의 몸을 온전히 느끼게 돼요. 그 쾌감이 대단하죠. 그리고 끊임없이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게 됩니다. 화살이 제대로 과녁에 맞지 않는건 마음의 이유가 더 크거든요. 옛 선비들이 활을 수양의 도구로 삼은 이유기도 하죠.”

꽃과 나무로 둘러싸인 황학정의 전경.

실내 벽면에는 역대 사두들의 사진, 회원들의 이름이 쓰인 나무 명패가 붙어 있다. 황학정의 오랜 전통이다.

과녁까지 거리는 보통 145m. 이 정도 거리까지 화살을 쏘려면 생각보다 많은 근력이 필요하다. 팔은 물론 등 근육도 필요하며, 척추를 꼿꼿이 펴야 해서 자연스레 자세 교정 효과도 있다고 한다. 실제로 황학정에서 활을 쏘는 이들 중에는 연세가 많은 분이 꽤 있었는데, 대부분 아직 정정한 모습이었다. 활이 충분한 운동이 된다는 뜻일 것이다. 현실적으로 보면 골프보다 시간이나 비용을 훨씬 아낄 수 있다. 약 없이 자기가 원하는 시간에 와서 원하는 만큼 쏘고 가면 된다는 것도 장점이다.
그럼에도 국궁 인구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사람들이 너무 여유가 없는 탓도 있지만, 국가 차원의 지원도 아쉽다고 한다. 활터는 그 특성상 다른 생활체육에 비해 면적을 많이 차지한다. 위험 요소도 있어 너무 개방된 곳에는 설치할 수 없다. 최남섭 사두는 “생활체육을 넘어 전통 계승이라는 차원에서 정부와 서울시가 활터 확보에 좀 더 신경을 써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다.
현재 전국에 381개의 활터가 있으며, 서울에는 8개의 활터가 있다. 지금 소개한 황학정과 석호정이 역사적 의미도 있고, 널리 알려진 곳이다. 황학정은 회원제지만 그 문턱이 많이 낮아졌으며, 남산 아래 위치한 석호정은 지난 2011년부터 서울시에서 직영하며 누구나 제약 없이 활을 배울 수 있는 공간으로 변했다. 편리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배울 의지만 있다면 접근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아쉽게도 안전 문제로 직접 활을 쏴보지는 못했다. 활을 쏘려면 기본 교육과 트레이닝이 필요하다. 취미라지만 초보가 함부로 다루기엔 위험 요소가 있다. 하지만 쉭쉭 소리를 내며 날아가는 화살을 보는 것만으로 충분한 쾌감이 있었고, 터의 아름다운 풍경 덕분에 치유되는 기분 또한 있었다.
시간의 제약에서 자유롭고, 계절도 타지 않으며, 비용도 저렴한 편이다. 복장이나 절차 같은 허식 없이 몸만 있으면 되는 편리함 또한 이점. 어찌 보면 21세기의 생활 패턴에 이렇게 적합한 운동도 없을 것이다.

에디터 이기원 (lkw@noblesse.com)
사진 노기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