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화라는 미지의 공간
정희민은 디지털 이미지에서 비롯한 감각을 물질적 층위와 표면의 시간으로 번역해 회화를 구축한다. 재료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감각을 정착시키고 밀도를 형성하는 핵심적 언어가 되고, 결국 한 점의 회화는 하나의 광활한 공간으로 확장된다.

작가님은 디지털 이미지에서 비롯한 감각을 화면에 체감 가능한 물질적 층위로 옮겨오고자 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감각을 처음으로 작업에 도입한 계기, 그리고 이후 재료에 대한 실험이 어떻게 확장되었는지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2D 평면 회화 안에서 또 하나의 공간을 포갤 방법을 고민하면서부터 처음으로 디지털 환경에서 비롯한 감각을 화면 위에 물질적으로 체감할 수 있는 층위로 옮겨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디지털 화면의 레이어 구조나 병치되는 시각적 정보들이 실제 회화의 표면에서도 ‘물리적으로’ 감지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갈증이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2017년경에 겔미디엄을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어요. 당시에는 그림 속 환영적 질서와는 독립된 층을 화면 위에 올리는 방식으로 이를 실험했고, 이후 2018년 금호미술관에서 전시를 열 때쯤 겔미디엄을 얼룩처럼 두껍게 사용한 것이 재료적 여정의 출발이었죠. 그때 이 물질이 단순한 보조재를 넘어, 또 하나의 공간적·물성적 층위를 만들 수 있는 재료라는 가능성을 분명하게 느꼈습니다. 이후에는 겔미디엄이 화면 위에서 점점 더 입체적으로 튀어나오거나 부풀어 오르기도 하고, 한 지점에서는 덩어리처럼 축적되기도 하며, 디지털 이미지의 층위를 물질적으로 번역하는 주요한 방식으로 자리 잡았죠. 겔미디엄을 안료와 분리된 상태로 다루기 때문에 볼륨을 쌓는 방식만큼이나, 그 위에 안료를 어떻게 입힐지에 대한 실험도 다양하게 해왔고요.
화면의 각 지점에 어떤 재료를 쓸지 결정하는 감각은 어떻게 작동하는지 궁금해요. 그 ‘결정의 순간’은 보통 어떻게 찾아오고, 그 리듬은 시간 속에서 어떻게 축적되나요?
재료를 선택할 때 직관적으로 결정하는 편이에요. 정해진 순서나 규칙보다는 상황에 따라 이미지가 환기하는 감각에 반응하며, 그때그때 레이어를 구성하는 재료를 선택합니다. 오일을 쓰기도 하고, 아크릴을 쓰기도 하고요. 때로는 인쇄된 면에서 그림이 시작되기도 하죠. 겔미디엄이나 오일을 도포하고 건조하는 과정이 반복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여러 작품을 동시에 진행하게 돼요. 한 번 올리고, 건조를 기다리고, 다시 올리는 시간이 쌓이면서 리듬이 만들어집니다. 이런 방식으로 작업하다 보니 한 시리즈는 보통 6개월에서 1년 정도 걸리기도 해요. 올해 초에 시작한 500호 작업도 약 10개월 만에 완성할 수 있었어요. 레이어의 수나 두께는 작품마다 매번 달라요. 정해진 규칙을 따라가기보다는, 화면이 스스로 형태를 찾아가는 시간을 기다리는 과정에 더 가깝기 때문입니다.

아래 2024년 타데우스로팍 런던의 〈UMBRA〉 The Sleeping Birds – Thin, Ambiguous, Abstract, and Intermediate – Which Decided to be Engraved on the Expanded Land was Already There but Nowhere to be Found, Acrylic, Oil, Gel Medium, Resin, and UV Print on Canvas, 181×227cm, 2024. Photo by Artifacts. Courtesy of Thaddaeus Ropac Gallery, London · Paris · Salzburg · Milan · Seoul. © Heemin Chung.
회화와 조각이 뚜렷이 분리되지 않고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지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처음에는 회화에서 분리된 일부가 입체로 확장되기 시작했다고 하셨는데, 지금은 데이터에서 출발해 평면과 입체를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가공하고 구성하는 과정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작가님께 이 매체 간 확장은 어떤 변화로 다가갔나요?
처음에는 그랬어요. 그림에서 떨어져 나온 일부가 조각으로 이어졌거든요. 겔미디엄을 두껍게 쌓아 올리다 보면, 아직 화면에 붙기 전 상태의 살점들이 하나의 조각처럼 보일 때가 있어요. 그걸 ‘면’이 아닌 상태로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초기에는 회화의 프로세스를 조각으로 가져왔기 때문에 주변 동료들은 제 조각을 보고 ‘평면적’이라 말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계속 작업을 이어가다 보니 회화나 조각이라는 매체적 구분, 혹은 접근 방식을 점점 벗어나게 된 것 같아요. 결국 수백 장의 이미지로 기억된 사물의 정보인 ‘데이터’에서 출발한다는 점은 같거든요. 평면에서는 그게 조직처럼 쌓여 볼륨을 만들고, 조각에서는 그 데이터를 더 적극적으로 가공하거나 물리적 힘을 가해 환경처럼 구성하게 돼요. 그러니까 매체가 바뀐 게 아니라, 데이터를 다루는 방식이 여러 갈래로 확장된 것에 가까운 것 같아요.
작업 과정에서 재료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반응하거나, 통제권 밖에서 우연이 개입하는 순간이 생길 것 같습니다. 특히 그 순간이 작업의 방향이나 감각을 바꾸는 전환점이 되기도 할 텐데, 기억에 남은 경험이 있나요?
저는 주로 큰 그림을 그리게 되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우연성에 있어요. 크기가 커질수록 화면을 전체적으로 통제하는 것이 정말 어렵기 때문에 우연적 표현을 만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스케치도 그래픽 데이터로 하고 있어요. 작품에 필요한 뼈대와 레이어를 미리 계획하지만, 그 모든 과정이 화면에 대한 통제를 잃는 순간을 위한 빌드업인 것 같아요. 결국 그림이 자기 갈 길을 가는 순간을 만나기 위해서 말이죠. 그런 순간에는 화면 위에서 거의 허우적대다시피 방향을 잃게 되는데, 이를 경험한 작업은 다르게 기억됩니다. 그림 위에 남은 겹 하나하나가 신체에 각인된 경험으로 남는다고 해야 할까요. 특히 2023년에 두산갤러리에서 열린 〈수신자들(Receivers)〉전에서 선보인 큰 꽃 작품들이 그랬어요. 전시 직전까지 작품을 붙잡고 고생을 많이 했거든요. 그래서인지 원하는 대로 잘 구현되었는지와는 별개로, 그 시간을 제가 잘 통과했는가의 관점에서 보게 되어 더 애착이 가요.
재료는 단순한 물성을 넘어 감각을 지탱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처럼 보였어요. 어느 순간 재료가 ‘무언가를 말한다’고 느끼게 된 지점이 있나요?
네, 분명 그런 시점이 있었어요. 초반에는 이 재료를 어떻게 다룰지 저 자신도 모호한 상태에서 여러 실험을 반복하는 시간을 이어갔어요. 그러다가 최대한 단순한 대상을 재현해보자는 생각에서 꽃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그때 재료 자체가 저에게 하나의 수사적 언어가 될 수 있다고 느끼게 됐습니다. 이 재료가 표면에서 몸체를 구성하고 그 위에 안료를 전사하는, 분리된 방식 자체가 제가 동시대를 살아가며 포착하는 신체적 감각이나 상태에 대한 비유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그간 왜 꽃을 그렸는지 궁금했는데, 가장 단순한 대상을 선택하신 거군요!
맞아요. 어느 순간부터 각각의 작업이 반드시 어떤 주제나 의미를 전달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고 싶었어요. 그래서 가장 단순한 사물, 그 자체를 화면에 그대로 옮겨보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도시를 걷다 눈에 들어오는 작은 생명체에 매혹되는 경험도 그 선택에 큰 영향을 줬습니다. 제가 미국의 화가 조지아 오키프를 좋아하는데, 그녀의 작품을 보면 대상은 분명 ‘꽃’이지만 그 이미지가 단순한 꽃으로만 보이지 않고 하나의 광활한 공간처럼 느껴지잖아요. 저도 사물 속에 숨어 있는 어떤 정서적이고 확장된 공간에 접속하는 경험을 한 것 같아요. 그 감각을 따라 작은 사물을 크게 확장해 화면에 옮겨보는 시도를 했고, 이후에는 그 하나의 사물에 다른 사물의 형태를 겹치거나 충돌시키면서 더 추상적인 공간으로 나아가게 되었어요.

오른쪽 커튼처럼 늘어질 겔미디엄 덩어리.
작업 중 화면 위에 쌓이는 두께는 평면 회화가 만들어내는 시각적 환영과는 조금 다른 감각일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이 두께는 어떤 방식으로 화면의 감각이나 공간을 만들어내는 요소가 되나요?
제가 화면 위에 볼륨을 쌓기 시작했을 때, 평면 회화가 전통적으로 만들어내는 빛과 그림자에 의한 환영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환영을 구현하고 싶었다는 점이 가장 중요했어요. 평면 속 덩어리는 결국 소묘적 질서로 만들어진 시각적 착각에 가깝죠. 그런데 제가 사용하는 겔미디엄 덩어리는 착각이 아닌, 실제 두께를 가진 물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화면에 쌓이는 두께는 눈으로만 읽히는 환영이 아니라, 몸으로 감지되는 또 다른 층위의 감각을 만들어낸다고 느꼈어요. 예전에 한 평론가가 제 작업의 환영에 대해 ‘멸실감’이라는 단어로 설명한 적이 있어요. 그 표현이 매우 정확하게 다가왔어요. 물질로 존재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시간성과 취약성이 화면 위에 드러난다는 의미로 이해했거든요. 그래서 제게 중요한 순간은 이미지가 단순한 그림으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몸을 가진 덩어리로 화면에 자리 잡는 순간, 그 물질적 존재가 평면의 환영과 다른 방식으로 공간을 만들어내는 순간이에요.
올해 하반기 특히 바쁜 시간을 보내고 계십니다. 타데우스로팍 서울에서 열리는 개인전 〈번민의 정원〉을 앞두고 계시죠. 작업의 또 다른 재료가 되는 데이터 이미지에 관해 이야기해보고 싶어요. 이번 전시 제목과 그 안에서 작가님이 마주한 감정의 스펙트럼에 대해 이야기해주실 수 있을까요?
이번 전시의 전체적 구상은 윌리엄 터너의 ‘The Slave Ship’(1840)이 남긴 여운에서 출발했어요. 이 작품은 언뜻 강렬한 빛과 색채가 만들어내는 서정적 풍경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노예선 ‘종(Zong)’호 사건인 보험금을 타기 위해 노예들을 바다에 내던진 역사적 비극을 다루고 있죠. 저는 이 폭력적 사실이 화면 안에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대신, 서정적 색채와 잔혹한 장면이 충돌하며 간극으로 남아 있는 방식이 무척 강렬하게 느껴졌어요. 이러한 감정적 긴장은 전시 제목인 ‘번민의 정원’에도 이어져 있어요. 작업을 하다 보면 화면 속 공간이 어느 순간 스스로에게 달라지는 지점을 느끼게 돼요. 어떤 때는 무한히 확장하는 열린 공간처럼 보이기도 하고, 또 어떤 순간에는 이 ‘끝없는 확장’이라는 것이 매우 잔혹하게 느껴져서 만들어지는 혼란이 마치 림보 같은 상태로 다가오기도 하죠. ‘번민’이라는 단어는 제가 그림 속에서 반복적으로 마주하는 이러한 감정의 스펙트럼을 설명하는 데 가장 적절했어요. 한편, ‘정원’은 자연이 가공된 세계면서 인간이 조성한 작은 세계라는 점에서 제가 작업에서 자연물을 다루는 방식과도 연결되는 표현입니다. 화면 속에서 자연물은 포개지고 재단되는 등 가공을 거치고, 그 과정에서 뒤틀리면서 또 다른 공간적 감각을 자아냅니다. 함께 선보이는 청동 조각 역시 그런 가상의 물리력이 작동하는 공간을 전제하고 출발했어요. 분재처럼 인간이 인위적 힘을 가해 만든 자연의 형태를 떠올리며, 스캔한 나무 데이터를 변형하고 가공해 주름지고 비틀린 형상으로 재구성한 작품입니다.
작가님께 회화는 감각과 정서가 머무는 ‘공간’에 더 가까운 듯합니다. 그 공간을 구성할 때, 개입해야 하는 지점과 그대로 두어야 하는 지점은 어떤 감각으로 구분하나요?
저에게 회화는 하나의 고정된 화면이라기보다 열려 있는 공간에 더 가깝습니다. 손이 닿는 부분은 전체 중 아주 일부일 뿐이고, 나머지 영역은 화면 밖으로 끝없이 확장하는 것처럼 느껴져요. 이 공간은 때로는 숨이 트이는 넓은 풍경처럼 다가오고, 때로는 그 열린 감각 자체가 너무 커져 공포나 혼란을 불러오기도 하죠. 저는 작업에서 가능한 한 그런 상반되는 감정이 동시에 존재하는 상태를 그대로 두려고 합니다. 그래서 개입해야 하는 지점과 그러지 말아야 하는 지점을 구분하는 기준도 매우 직관적이에요. 과정이 만들어내는 흐름이나 우연성을 억지로 정리하는 대신, 재료가 만드는 방향성이나 우발적 움직임을 최대한 받아들이는 편이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