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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의 힘

LIFESTYLE

크리스틴 아이 추를 만났다. 빛과 어둠, 순수함과 기괴함, 구상과 추상이 공존하는 작품은 그녀의 분신이기도 하다. 텍스타일 디자이너로 출발해 동남아시아를 대표하는 작가로 성장한 지난 15년의 기록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녀가 털어놓는 회화의 진정한 힘에 관하여.

 

크리스틴 아이 추(Christine Ay Tjoe)를 처음 만난 건 지난 1월 싱가포르에서였다. 아시아 현대미술 작가를 장르별로 나눠 심사하는 ‘프루덴셜 아이 어워즈’의 회화 부문 후보에 그녀의 이름이 올라 있었다. 올해 한국에서 첫 개인전이 열린다는 소식을 들은 터라 조금 더 가까이에서 작품을 살폈다. 피부에 난 생채기처럼 캔버스 여기저기에 잘게 지글거리는 세밀한 선과 검거나 붉은 오일 스틱으로 거칠게 남긴 표현주의적 터치가 눈에 띄었다. 자유분방함이 내재된 선의 형태, 색과 색의 대비가 화면에 묘한 질서를 만들고 있었다. 구상과 추상을 오가는 작가의 줄타기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저녁, 크리스틴 아이 추가 회화 부문의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지난 4월 28일, 마침내 크리스틴 아이 추의 한국 개인전 이 송은아트 스페이스에서 열렸다. 그녀의 초기작부터 신작까지 15년 넘게 발표한 주요 작품 50여 점을 주제별로 사이좋게 모아놓았다. ‘완벽한 불완전’이라는 시적 모순의 전시 제목이 인상적이다. “인간이란 피조물은 완벽한 불완전성 속에서 살잖아요. 그래서 항상 더 나은 것을 추구해야 해요.” 기자간담회 자리에서 다시 만난 그녀는 몸에 달라붙는 검은 바지에 천사 날개를 그린 회색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넌지시 소감을 물었다. “인도네시아라는 낯선 나라와 문화, 그곳의 여성 작가, 게다가 현대미술이라니, 일반 관람객 입장에서는 이 전시가 얼마나 어렵겠어요. 이해하는 데 긴 시간이 필요할 거예요.(웃음)”
크리스틴 아이 추의 이력을 살피면 한 작가의 예술적 여정이 삶의 선택, 그에 따른 독특한 경험과 얼마나 밀접하게 연결되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1973년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태어난 그녀는 어릴 적부터 서로 다른 물질을 뒤섞어 무언가를 만들며 노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반둥 공과대학에서 판화와 그래픽 아트를 전공했지만 미래는 불투명했다. “당시 인도네시아에선 여자가 작가를 한다는 것에 대해 지금보다 훨씬 부정적이었어요. 주변 사람들은 ‘넌 분명히 성공하지 못할 거야. 예술가? 여자가?’라고 말했죠.” 그녀는 가족과 주변의 만류에 밀려 텍스타일 공장에서 디자이너로 2년 동안 일했지만, 이건 아니다 싶었다. 다시 자카르타로 옮겨 텍스타일 디자인 회사에 취직했지만 5개월 정도 일하다 그만두었다. “오랜 고민 끝에 결국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고, 여기까지 오게 됐습니다.”

Tiny Supper 01, 캔버스에 혼합 재료, 160 x 180cm, 2007 ⓒThe Artist. All rights reserved

Bertigapuluh #2, 종이에 혼합 재료, 54 x 31cm, 2006 ⓒThe Artist. All rights reserved

1999년부터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그녀는 학교와 직장 생활에서 배운 기술을 자산으로 삼았다. 드라이 포인트(Dry Point)와 에칭 등 판화 기법을 활용해 흑백의 선명한 대조 그리고 순수함과 괴기스러움이 공존하는 강렬한 작품을 제작했다. 바늘로 자신의 아이디어를 판면에 그리고 그 결과를 즉각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매력이었다. “새로운 재료를 사용하는 걸 좋아해요. 지금도 이런저런 실험을 하다 더 좋은 작품이 나오면 그쪽에 집중합니다.” 그녀는 평면 작업뿐 아니라 설치와 사진 등 여러 매체를 사용한다. 회화로 표현할 수 없는 이야기를 담기 위해서다. 2001년 인도네시아에서 열린 첫 개인전 이후 미국, 홍콩, 싱가포르, 타이완, 일본 등 점차 활동 영역을 해외로 확장하며 ‘인도네시아를 대표하는 여성 작가’로 느리고 정직하게 성장했다.
한국 개인전의 기획은 인도네시아 소더비 지사장으로 활동 중인 재스민 프라세티오(Jasmine Prasetio)가 맡았다. 그녀는 오랫동안 크리스틴 아이 추의 작품을 지켜본 인물이다. 예전 <아트나우>와의 인터뷰에서 가장 좋아하는 작가로 크리스틴 아이 추를 꼽았을 정도. 1999년 우연히 작가의 드로잉을 보고 팬이 됐다는 그녀는 작품의 매력을 이렇게 설명한다. “크리스틴 아이 추의 작품에는 인도네시아의 다른 현대미술에선 볼 수 없는 것이 있어요. 깨지기 쉬운 것과 절대 깨질 수 없는 것, 그런 상반된 성향이 한 화면에 평화롭게 공존하죠. 무엇보다 그녀의 작품에는 강직한 믿음이 있습니다. 어떤 두려움에도 맞설 수 있는 작가적 신념 말이에요. 사람들이 이제라도 그 진가를 알게 된 것 같아 기뻐요.” 재스민은 ‘동트기 전 하늘이 가장 어둡다’, ‘그리고 빛이 있었다’, ‘보이는 것이 아닌 믿음으로 행하다’, ‘끝은 새로운 시작’ 등 테마에 따라 4개의 섹션으로 전시를 구성했다.
작가의 내면 변화가 작품에 어떻게 투영됐는지 시기별로 분류했다. 전시장 곳곳에는 종교적 상징과 인간 본성에 관한 철학적 고민이 무겁게 깔려 있었다. 크리스틴 아이 추가 입고 있던 날개를 그린 티셔츠가 전시를 이해하는 중요한 힌트였던 셈이다. 전시장을 계단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송은아트스페이스의 건축 구조와 물리적 경험은 그녀의 작품에 주로 등장하는 계단이라는 메타포와도 잘 어울린다. 단색조였던 화면은 작가가 아들을 출산하고 이러저러한 신변의 변화를 겪으면서 점차 무지개 빛깔로 변했다. 회화적 질감을 표현한 레이어와 형태는 더욱 복잡하고 과감해졌다. 4층의 메자닌에 설치한 신작은 크리스틴 아이 추의 성장과 변화에 관한 증거로 충분하다. 화산처럼 분출한 붉은 색채가 시각적 즐거움의 파노라마를 연출한다. 이렇게 우리는 전시의 끝에서 새로운 작가의 오늘과 만난다. 그렇다면 이번 전시에서 그녀가 한국 관람객에게 던지고 싶은 궁극의 메시지는 무엇일까. “저는 예술을 통해 좀 더 자유롭게 신과 만날 수 있어요. 굳이 특별한 종교가 아니더라도 신이 어떤 식으로든 인간을 구원한다는 메시지를 작품에 담고 싶습니다. 그렇게 제 작품이 관람객의 잔잔한 사고에 어떤 풍파를 일으켰으면 좋겠어요. 사유 체계에 혼란을 주는 거죠. 새로운 예술 세계로 들어가는 디딤돌 역할로요.” 그녀가 마련한 다른 세계로 가는 기회를 놓치지 말자.

에디터 김재석 (jskim@noblesse.com)
사진 김보라(인물)  사진 제공 송은아트스페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