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원자들 이야기
예술가에게 재능 못지않게 필요한 게 후원자(patron)다. 밀어주는 사람이 있어야 재능도 꽃피울 수 있는 법. 미술계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르네상스 시대부터 현재까지, 세계의 미술계를 질적·양적으로 키워온 후원자들에 대해 알아본다.
피렌체에 있는 산 로렌초 성당. 메디치가의 조반니 디비치에 의해 제작된 브루넬레스키와 도나텔로의 작품들이 이곳에 있다.
르네상스 시대를 꽃피운 미술 후원자
15~16세기 이탈리아 피렌체의 메디치와 밀라노의 스포르차 가문은 당대 예술가들을 지원해 르네상스를 꽃피웠다. 특히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은 역사상 가장 유명한 미술 후원자. 메디치가의 터전을 닦은 조반니 디비치는 1418년 브루넬레스키와 도나텔로에게 산 로렌초(San Lorenzo) 성당의 내부 설계와 조각을 맡겼으며, 그의 증손자로 후일 교황이 된 레오 10세는 미켈란젤로에게 동생 줄리아노와 조카 로렌초의 무덤과 조각을 제작하게 해 5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국내 미술학원에서 그의 두상을 외우게 하는 ‘저력’을 발휘했다. 아무리 메디치가가 미술가를 후원한 동기가 당시 고리대금업인 은행업에 대한 오명을 씻고자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후원은 피렌체를 문화와 예술의 중심으로 만들어놓았고, 그 소장품은 오늘날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의 주요 컬렉션으로 남아 있다. 한편 르네상스 초기 밀라노를 다스린 스포르차 가문의 루도비코 스포르차도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비롯한 많은 예술가의 후원자로 유명하다. 그는 무자비한 군주이자 외교관이었지만 1482년부터 1499년까지 17년간 밀라노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후원해 그가 ‘최후의 만찬’이나 ‘담비를 안고 있는 여인’, 스포르차 성에 있는 ‘살라 델레 아세’의 프레스코 천장화 같은 대작을 후세에 남기게 했다. 또한 르네상스의 영부인으로 불리는 이사벨라 데스테는 당시 교양 있는 여성의 대표주자로 피렌체와 밀라노에 비해 작은 도시국가인 만토바의 부흥을 위해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라파엘로, 로렌초 코스타, 티치아노 베첼리오 등의 예술가를 후원하고 또 환대했다. 그녀는 만토바의 궁 살림이 그리 넉넉하지 않았음에도 많은 예술가를 후원하느라 금고가 텅 빌 때가 잦았다 한다.
▶ 메디치가가 미술가를 후원한 진짜 이유
르네상스 시대 미술 후원의 중심에 있었던 메디치가는 실리를 가장 우선시하는 상인 가문이었다. 그런 만큼 단지 고상한 취미를 위해 엄청난 자금과 시간을 투자하는 건 상인의 지침에 어긋난 일이었을 터. 사실 이들의 미술 후원은 단순히 작가의 용기를 북돋고 창작을 장려하는 후원자의 행위만이 아니라, 가문의 사회적 지위를 상승시키고 정치력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결국 그들의 권력과 영광을 기리는 ‘메디치 드라마’의 탄생을 위해 르네상스 문화 예술의 가장 강력한 후원자가 된 것이다.
메디치가의 터전을 닦은 조반니 디비치

티치아노 베첼리오가 그린 이사벨라 데스테의 초상화

세잔이 그린 앙브루아즈 볼라르의 초상화
19세기 후반에 나타난 안목 있는 후원자
무명 시절 피카소의 뛰어난 감각을 알아보고 그를 세기의 대가로 키운 앙브루아즈 볼라르는 아방가르드 미술의 최고 후원자로 알려진 인물. 피카소는 물론 세잔, 르누아르, 루셀, 보나르 등 20세기를 대표하는 화가가 모두 그의 손에서 컸다. 1887년 스물아홉의 나이로 난생처음 파리에 온 볼라르는 파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당시 무명 작가인 폴 세잔의 작품 150점을 전시해 일약 스타 딜러로 떠올랐고, 1901년엔 파리에서 피카소에게 첫 전시를, 1904년엔 마티스에게 첫 개인전을 열어줘 큰 성공을 거뒀다. 볼라르는 자신이 선택한 화가와 생사고락을 같이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작가를 발굴하고 그들에게 자신의 남은 생과 재산, 명예를 모두 걸었다. 오늘날 현대미술의 대가로 추앙받는 이들을 뜨기 전에 미리 알아본 그의 안목은 놀라울 정도로 정확했다. 그는 루오, 블라맹크, 드가, 샤갈 같은 작가의 작품집을 내기도 하고, 판화집을 만들어 판화가 독립된 장르로 자리 잡는 데 이바지하기도 했다. 볼라르 이후 유럽 근대미술사에서 가장 유명한 아트 딜러이자 후원자는 칸바일러다. 그는 붓 외엔 가진 게 없던 조르주 브라크와 잭슨 폴록, 빌럼 데 쿠닝, 재스퍼 존스 같은 아티스트에게 전시 공간을 제공하고 작품을 사주며 세계적 아티스트로 끌어올린 공헌자. 칸바일러가 훌륭한 딜러이자 후원자가 될 수 있었던 것 역시 돈보다는 뛰어난 안목 덕분이었다. 그는 이미 유명해진 작가의 작품을 전시 및 판매하는 안전한 방법을 피했고, 당시 전위적 작가를 발굴하는 데 전념했다. 또 앞뒤와 양옆 등 여러 시점에서 본 사물의 모습을 2차원의 한 화면에 담고, 입체를 정육면체(cubic)로 쪼개 평면화한 피카소의 ‘아비뇽의 여인들’에 ‘입체파’라는 이름을 붙여주기도 했다. 1907년 파리에 갤러리를 연 이래 입체파 화가들과 친분을 쌓으며 창작 활동을 고무하고 화집을 도맡아 발간함으로써 화가들이 작품 판매에 신경 쓰지 않고 창작에 전념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준 그는, 입체파 미술이 세계 미술 조류의 한 획이 되는 데 앞장선 최초의 인물이다.
▶ 볼라르에 대한 엇갈린 평가
볼라르는 세상에서 가장 많은 초상화를 남긴 남자다. 세잔, 루셀, 보나르, 피카소 같은 화가가 모두 그에 대한 보답으로 초상화를 그려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듯 인기 있는 화상에게도 나름의 비난은 존재했다. 바로 예술을 돈으로 주무르는 머리 좋은 화상이라는 평. 볼라르는 작가의 가치를 올리기 위해 작품을 함부로 공개하지 않고 오랫동안 숨겨두었다가 때가 되면 한 번에 모두 보여주는 작전으로 큰 이익을 얻었다고 알려졌다. 그 때문에 그의 후원을 받은 고갱은 유난히 그를 싫어했다고 한다.
MoMA의 전신은 1929년 록펠러가에 의해 세워진 뉴욕 근대미술관이다.

솔로몬 구겐하임이 수집한 현대미술품들을 기반으로 설립된 뉴욕 구겐하임미술관

엄청난 재산으로 20세기 미술가들을 후원했던 페기 구겐하임
여러 대에 걸친 미술 후원으로 메디치가에 비견될 만한 근대의 컬렉터는 록펠러 가문이다. 스탠더드 석유 회사를 창업한 록펠러 1세도 악덕 자본가라는 이미지를 벗기 위해 1913년 록펠러 재단을 세우고 미술품 수집과 박애 사업을 시작했다. 이후 록펠러 2세와 그의 자녀까지 3대에 걸친 미술과 문화 후원이 미국 각 분야에 미친 영향력은 대단했다. 특히 록펠러 2세의 부인 애비는 안목이 탁월한 여성. 그녀는 미국에 변변한 현대미술관이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1929년 근대미술관(현재의 MoMA)을 창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애비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초대 관장인 미술사학자 앨프리드 바는 회화와 조각뿐 아니라 디자인, 사진, 영화, 건축 등 다양한 분야의 컬렉션을 시작할 수 있었다. 록펠러 3세의 경우, 아시아 미술에 관심을 둔 큰아들 존은 1000만 달러에 달하는 수집품을 아시아 소사이어티에 기증했고, 데이비드는 체이스맨해튼 은행을 이끌며 기업의 예술 후원에 앞장섰다. 한편 스위스 태생의 유대인 솔로몬 구겐하임은 미국에 이민 와 구리 광산업으로 성공한 뒤 미술가를 적극 도왔다. 1920년대 후반부터 미국과 유럽의 가난한 작가를 격려하며 그림을 사줬다. 한데 구겐하임을 언급할 때 그의 조카딸 페기 구겐하임을 빠뜨려선 안 된다. 그녀는 작가를 후원하는 열정이 삼촌을 능가했다. 상속받은 엄청난 재산을 작품을 수집하는 데 ‘탕진’했다. 피카소·칸딘스키·샤갈·클레를 비롯해 브랑쿠시·콕토· 아르프 등을 미술 무대의 전면으로 끌어냈고, 제2차 세계대전 중 유럽의 미술품을 집중적으로 사 모아 초현실주의 컬렉션을 이루었으며, 브르통과 막스 에른스트 같은 작가의 미국행을 돕기도 했다. 그녀는 결코 단순한 후원자가 아니었다. 작가와의 폭넓은 교류가 자주 연인 관계로도 발전하며 현대미술의 신조류 형성에 일조했으니 말이다.
▶ 아는 사람만 아는 페기 구겐하임의 남성 편력
페기 구겐하임은 하루에 1점씩 그림을 사는 것으로 유명했다. 하지만 그녀에겐 세상 부러울 것 없는 컬렉터라는 호칭 외에도, ‘죄악에 가깝도록 문란한 여인’이란 꼬리표가 늘 따라다녔다. 열 살 이상 연하인 극작가 사뮈엘 베케트, 독일 화가 막스 에른스트, 프랑스 출신 화가 이브 탕기, 그리고 20년 이상 친구로 지낸 마르셀 뒤샹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남성 편력을 일일이 언급하자면 숨이 찰 정도. 그런 그녀의 삶이 크게 달라진 건, 그녀가 마흔 살을 기점으로 1938년 런던에 갤러리 ‘구겐하임 죈’을 개관하면서다. 풍요의 바다에서 허우적대던 말괄량이 페기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미술에만 전념하기 시작한다.
다양한 방식으로 현대미술가들을 후원하는 LVMH 그룹 회장 베르나르 아르노

우크라이나 현대미술의 최대 후원자인 빅토르 핀추크
갈수록 그 양상이 다양해지는 현대의 미술 후원자 21세기, 현대미술 후원의 특징은 기업이 그 중심에 있다는 것이다. 기업이 나름의 철학을 가지고, 기업의 정체성에 어울리는 문화 예술 후원 사업을 특화하는 것. 이 방면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은 프랑스 LVMH 그룹의 베르나르 아르노다. 그는 루이 비통과 디올, 모엣 헤네시 등을 통해 쌓은 재력으로 최근 파리 불로뉴 숲 속에 루이 비통 재단 미술관을 열어 파리 시민이 새로운 문화 공간을 누릴 수 있게 했다. 루이 비통 재단 미술관엔 아르노 회장의 개인 소장품인 게르하르트 리히터와 크리스티앙 볼탕스키, 베르트랑 라비에 등의 작품이 전시돼 있으며, LVMH 재단에선 미술 학도에게 장학금을 제공하고 젊은 음악가에겐 악기까지 대여해준다. 한편 우크라이나 현대미술의 최대 후원자인 억만장자 빅토르 핀추크는 2006년 키예프에 있는 호텔을 리모델링해 핀추크 아트 센터를 오픈, 우크라이나에 세계적 현대미술을 소개해왔다. 최근 한 인터뷰에서 그는 5년 이내에 우크라이나에 기념비적 미술관을 짓겠다는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 또한 프랑스 리카르 재단은 프랑스 현대미술의 중요한 후원자다. 최근 퐁피두 센터의 디지털 사이트 구현에도 참여했다. 이런 활동을 통해 이들은 프랑스 정부에서 ‘그랑 메센’상을 받기도 했다. 국내의 현대자동차 역시 국립현대미술관과 함께 매년 1명의 작가를 선정, 10년간 최대 90억 원의 예산을 투입해 최고 수준의 전시회를 열 수 있도록 다각적인 지원을 하고 있다. 이와 함께 신진 작가를 포함한 유망 작가에게 10년간 총 30억 원을 지원할 계획이며,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갤러리 아트 존’에서 분기별 주제에 따라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특히 이들과 국립현대미술관의 협력은 한국 미술 세계화 프로젝트의 시동으로 평가받으며, 기업의 예술 후원 ‘메세나’의 새로운 가능성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런가 하면 기업이나 부자만 미술 후원을 할 수 있다는 편견을 깬 이들도 있다. 바로 허버트와 도로시 보겔 부부. ‘노동계급 아트 컬렉터’라 불리는 이들은 1960년대 이후 미국 미술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미술품 수집가이자 후원자로 손꼽히고 있다. 이들은 고작 2만3000달러에 이르는 연봉으로 집세와 생활비를 감당하고, 나머지는 모두 미술품을 사거나 미술가를 후원하는 데 사용했다. 이들의 후원금을 받은 미술가 중 후에 국제적 명성을 얻은 이도 있는데 로버트 배리(Robert Barry), 솔 르윗(Sol LeWitt), 에다 레노프(Edda Renouf) 그리고 리처드 터틀(Richard Tuttle)이 바로 그들이다. 1992년 보겔 부부는 그동안 수집한 엄청난 양의 작품을 전부 워싱턴DC의 내셔널 갤러리에 기증해 미국 미술계의 본보기가 되었다.
▶ 작가에겐 왜 후원자가 필요할까?
미술이란 완전히 독자적·자율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당연한 얘기지만 미술은 그 시대의 역사적·사회적 조건 안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고전 예술조차 귀족 후원자의 도움을 받았으며, 자본의 도움 없이 성취한 예술은 사실상 거의 없다. 더욱이 현대미술은 작가의 아이디어를 구현하기 위해 엄청난 비용이 필요하다. 데이미언 허스트가 찰스 사치의 도움이 없었다면 지금 같은 스타가 될 수 있었을까? 백남준 작가가 TV 없이, 아이디어만으로 현대미술사에 한 획을 그을 수 있었을까? 미술가에 대한 후원은 예술적 시너지 효과를 낸다. 이것이 오늘날 작가들에게 후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유다.
에디터 이영균 (youngkyoon@nobless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