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14 Bag Begins
가방을 색다르게 바라보는 전시 프로젝트 <백스테이지展 by 0914>가 어느덧 8회째를 맞았다. ‘가방’을 테마로 다른 영역의 학문이나 장르 등을 매치해 가방의 본질을 탐색해온 이 전시의 여덟 번째 주제는 ‘0914 Bag Begins’. 가방을 인간 역사와 욕망, 관계의 산물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는 0914가 또 다른 실험을 시작했다.
1,2 마리킴, I Love Shoes Bags and Boys / Just Get a Bag and Drop a Dream in It, 캔버스에 울트라 크롬 잉크, 네온, 2015
3 정순구, High and Long, 나무, 가죽 외 혼합 재료, 2015
4,5 홍경택, 이것은 가방이 아니다, 리넨에 유채와 아크릴 물감, 2015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초현실주의 작가 르네 마그리트가 1929년에 제작한 이 작품은 아주 단순하다. 화면 중앙에 거대한 파이프가 그려져 있고, 작품 제목이기도 한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문장이 프랑스어로 쓰여 있다. 파이프를 두고 파이프가 아니라니. 사물과 언어의 관계를 역전시킨 이 작품은 일반 관람객은 물론 많은 철학자와 미학자를 매료시켰다. 파이프를 ‘파이프’가 아니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것에 어떤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실제 파이프를 파이프로 만드는 요소는 무엇일까? 파이프를 파이프라고 부름으로써 혹시 우리는 그동안 파이프의 진짜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은 아닐까?
마그리트가 우리에게 던진 질문은 세상의 모든 사물에 적용된다. 당신이 손에 든 가방을 보자. 누군가 ‘그것은 가방이 아니다’라고 지적한다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까. 시몬느가 새 핸드백 브랜드 ‘0914’의 런칭을 위해 지난 2년여 동안 진행한 전시 프로젝트 <백스테이지展 by 0914>는 앞서 던진 것 같은 엉뚱한 질문에 매회 유쾌하면서도 깊이 있는 답을 제시해왔다. 가방이라는 익숙한 사물을 두고 과학, 문학, 심리학, 미술 등을 접목하거나 소리, 기억, 남성과 여성 등을 주제로 가방의 본질을 탐색했다. 가방을 휴대용 수납공간이라는 1차원적 기능성에서 벗어나 인간사의 수많은 이야기를 담은 문화적 오브제로 바라보는 담대한 ‘실험’이었다. 말 그대로 이 프로젝트에서 우리가 알던 가방은 더 이상 가방이 아니었다. 여덟 번째 전시 주제는 ‘0914 Bag Begins’. 다시 가방의 가방으로 돌아가자는 0914의 철학적 메시지일까?
전시를 추적하는 단서처럼 관람객을 처음 맞는 작품은 홍경택 작가의 작은 회화다. 한 남성이 찻잔에서 티백을 건져 올리는 장면이 간결하다. 그런데 작품을 가까이에서 보면 그것은 티백이 아니라 가방이다. 전시장에 걸린 또 다른 작품에는 닥스훈트의 몸체에 가방 손잡이가 달려 있거나, 푸른 빛깔 가방에 물뿌리개의 주둥이가 결합돼 있다. 사물의 절묘한 이종교합에 웃음이 피식 터져 나온다. 홍경택은 르네 마그리트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를 차용해 ‘이것은 가방이 아니다’를 작품의 테마로 삼았다. 작가는 가방을 더 강조하기 위해 가방과 다른 사물의 형태적 유사성에 주목했다고 한다.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의 몸체가 어느 날 가방처럼 보이는 신기한 경험을 명쾌하게 포착했다. 꼬리를 흔드는 닥스훈트를 따라 옆 공간으로 이동하면 작가의 분신과 같은 눈이 큰 여성 캐릭터로 잘 알려진 마리킴 작가의 네온사인 작품이 등장한다. ‘이것은 가방이 아니다’라는 홍경택 작가의 정의는 마리킴의 ‘나는 신발과 가방과 남자를 사랑한다’, ‘가방을 구하고, 그 안에 꿈을 담아라’ 등의 영문 텍스트로 이어진다. 가방에 투영된 여성의 욕망을 솔직한 어투로 드러낸 문장은 SNS에 셀카와 사랑, 패션, 인생 등에 관한 유행 문구를 넣기 바쁜 세태가 투영돼 있다. 그녀는 말한다. “‘가방을 싸다, 풀다, 가방끈이 길다, 짧다’ 등 가방은 어떤 사람의 상태를 표현하는 뜻일 수 있어요. 가방에 반드시 물건만 넣으라는 법도 없지요. 우리의 마음 상태나 꿈을 담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가방이 누군가의 욕망을 재현하는 ‘언어’로 변신한 것이다.
6 전미래, Creative Evolution, 철망, 패브릭, 0914 가방, 2015 7 이진용, 화석, 혼합 재료, 2015
전시장의 시간은 전미래의 ‘Creative Evolution’이라는 설치 작품을 통해 신화의 세계로 점프한다. 동아시아의 원형적 창조 신화 주인공인 복희와 여와가 뱀처럼 몸을 꼬며 태초의 어둠을 뚫고 등장한다. 천장에는 빨갛게 잘 익은 사과처럼 욕망과 창조를 상징하는 붉은색 백이 매달려 있다. 모두 0914의 백이다. 전미래 작가가 펼쳐놓은 시간의 주름은 이진용의 ‘화석’에 와서 한층 단단하고 깊어진다. 그는 0914 가방을 고고학자의 손길에 의해 빛을 본 화석으로 형상화했다. 브론즈로 만든 크고 작은 가방은 지금 여기와 먼 과거 그리고 몇천 년 뒤의 미래를 횡단한다. 그의 ‘화석’은 가방에 영원불멸의 가치를 부여하는 0914의 상징인 물고기 화석과도 일맥상통한다. 우리가 지금 들고 다니는 가방이 언젠가 미래의 유물로 대접받는 장면을 상상해보는 일만으로 현기증이 인다.
전시장 중앙에 설치한 정순구의 ‘High and Long’은 <백스테이지展 by 0914>의 여정을 갈무리하는 기념비이자 긴긴 세월 인간과 함께해온 가방의 쉼터다. 작가는 시몬느의 작업장과 창고에서 샘플링으로 사용하고 남은 재료를 취합해 에코 백 형태의 거대한 가방과 의자를 제작했다. 가방이면서도 실제로 사용할 수 없는 가방이다. ‘가방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이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며 전시장에 메아리친다. 0914의 장인정신을 상징하는 오래된 재료가 비로소 가방의 모습을 얻어 의자에 걸터앉아 쉬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은 뭉클한 감동을 선사한다.
이번 전시가 백스테이지 갤러리에서 열리는 <백스테이지展 by 0914>의 마지막이지만, 가방을 새롭게 보려는 0914의 시도는 계속된다. 0914는 오는 가을 도산 플래그십 스토어를 오픈해 관람객과 본격적으로 만날 예정. 바닷가 마을을 모티브 삼은 건물에는 가방을 향한 0914의 심미적 . 철학적 . 실용적 . 인류학적 가치를 빼곡하게 담는다. 우리는 그곳에서 가방이 아닌 제3의 가방을 만날 것이다. ‘이것은 가방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가방 말이다.
에디터 김재석 (jskim@noblesse.com)
사진 정태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