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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5-2015

미분류

“역사는 단지 가십에 불과하다.” 희대의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가 남긴 명언 중 하나다.
하지만 시계 브랜드에 역사는 현재의 혁신과 기술력을 뒷받침하는 자양분이다. 올해로 탄생 280주년, 현존하는 시계 브랜드 중 가장 긴 역사를 간직한 하이엔드 매뉴팩처 워치메이커 블랑팡의 유구한 역사와 족적을 남긴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예한 자크 블랑팡의 첫 번째 작업장 전경

세계 최초의 오토매틱 와인딩 손목시계 블랑팡 하우드

가장 오랜 시계의 역사
블랑팡의 이야기는 스위스 쥐라 산맥에 자리한 작은 도시 빌레레의 한 농장에서 시작한다. 지금이야 대규모 건물과 시설을 갖춘 매뉴팩처지만 창립자 예한 자크 블랑팡(Jehan-Jacques Blancpain)이 시계 제작을 시작한 1735년의 공방은 열악함 그 자체였다. 2층 건물의 1층은 말과 소를 기르는 축사였고, 그의 작업실은 그 위층에 자리했으니 말이다. 당시 대부분의 워치메이커가 가족 기업 형태였다는 것과 추운 겨울 생계를 위해 시계를 제작했다는 건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 블랑팡도 마찬가지였다. 예한 자크는 플레이트와 브리지 재단, 휠과 톱니바퀴 제작 그리고 시간 세팅과 무브먼트를 케이스에 넣는 작업을 했고, 그의 아내는 남편이 만든 부품을 일일이 다듬고 장식하는 역할을 맡았다. 1735년 시작한 이들의 가업은 1932년 7대 자손인 프레데리크-에밀 블랑팡이 타계하기까지 200여 년간 계속되었다. 물론 그사이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한 군 징집, 선조의 타계, 경쟁 업체의 압박 등으로 블랑팡의 역사가 끊길 뻔한 적도 여러 차례 있었다고. 블랑팡이 이룬 모든 성과를 열거할 순 없지만, 시계 기술의 발전을 위해 다양한 일을 해온 것은 자명한 사실. 이를테면 1815년 톱니바퀴 형태의 탈진기를 실린더 형태로 바꾸었고, 당시 개발한 울트라 슬림 무브먼트는 200년이 지난 현재까지 블랑팡 무브먼트 제작의 초석으로 인정받고 있다.

르상티에에 위치한 블랑팡 매뉴팩처의 현재 모습

하이 컴플리케이션 공방에서 무브먼트를 조립 중인 워치메이커

계속되는 블랑팡의 시계에 대한 열정
1900년대 초, 블랑팡은 시계 제작에 관한 많은 업적을 남겼다. 특히 1926년 선보인 세계 최초의 오토매틱 와인딩 손목시계 ‘블랑팡 하우드(Blancpain Harwood)’는 기념비적 작품. 영국의 워치메이커 존 하우드(John Harwood)와 협업해 완성했고, 그해 바젤 박람회에 선보이며 주목받았다. 혁신은 이어졌다. 크라운 대신 베젤을 돌리며 시간을 맞추는 시스템, 손목시계의 영원한 적인 먼지를 막는 밀폐 시스템도 블랑팡에서 선보였다. 1930년에는 오토매틱 방식의 여성 시계 롤스(Rolls)를 개발해 여성을 위한 최초의 오토매틱 와인딩 손목시계라는 타이틀도 부여받았다. 영원할 것만 같던 블랑팡 왕조는 7대손 프레데리크-에밀의 타계로 위기에 처한다. 하지만 1915년 합류한 사업 파트너 베티 피히터(Betty Fiechter)의 도움으로 이들은 시계 역사를 계속 이어갈 수 있었다. 더욱이 시계 제작은 물론 당시 우후죽순 생기던 시계 메이커에 무브먼트를 공급하면서 무브먼트 제조 공급사로도 명성을 떨치게 된다. 이와 더불어 다이버 워치의 새로운 기준을 수립한 ‘피프티 패덤즈’(1953년), 당시 세계에서 가장 작은 원형 무브먼트를 장착한 여성용 시계 ‘레이디버드’(1956년)도 피히터가 이끈 블랑팡이 만든 걸작! 1959년에는 블랑팡의 연간 시계 총 생산량이 10만 개에 이를 정도로 성공 가도를 달린다.

1990년, 740개의 부품으로 완성한 그랑 컴플리케이션 무브먼트인 칼리버 1735

독자적 기술력으로 중력을 상쇄하는 부품인 1 미니트 플라잉 까루셀(carrousel)을 2008년 개발했다.

창조와 혁신으로 가득한 매뉴팩처 블랑팡
1971년 생산량이 22만 개까지 늘어난 블랑팡이지만 배터리로 동력을 공급하는 쿼츠 시계의 파동을 이겨낼 순 없었다. 하지만 운명은 곧 바뀌었다. 브랜드를 인수한 장-클로드 비버(Jean-Claude Biver)와 지금은 사라진 무브먼트 공급사 프레데릭 피게(Frederique Piguet)의 자크 피게(Jaques Piguet) 덕분이었다(장-클로드 비버는 이후 시계 브랜드 위블로의 수장으로 활약한다). 이들은 시계의 생산량을 한 해에 수천 개로 제한하고, 누구나 도전할 수 없던 하이 컴플리케이션 제작은 물론 까루셀 같은 중력 상쇄 장치를 개발하며 승승장구한다. 유구한 역사를 바탕으로 창조성과 혁신성으로 무장한 브랜드로 거듭난 것! 시계업계에서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룬 이들은 1992년 스와치 그룹에 합류, 그룹을 이끄는 하이엔드 브랜드로 자리매김하며 전 세계 시계 애호가의 열렬한 구애를 받고 있으며, 현재 하이 컴플리케이션인 르 브라쉬스, 브랜드의 중추 역할을 하는 빌레레, 탄생 60년이 넘은 다이버 워치 피프티 패덤즈, 스포츠와 드레스 워치의 중간자 역할을 하는 레망, 아방가르드 디자인과 혁신적 기술을 담은 L-에볼루션, 여성을 위한 기계식 시계 블랑팡 우먼 등 총 6가지 컬렉션을 선보이고 있다. 이렇듯 유구한 역사를 가진 블랑팡에 ‘전통’이란 수식어를 부여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이들은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데 두려움이 없었고, 그 결과 지금의 위치에 올라설 수 있었다. 블랑팡을 설명하는 또 다른 단어가 ‘혁신’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블랑팡 역사 속 기념비적 시계
280년 장구한 역사, 이들이 남긴 가치있는 히스토리컬 피스를 소개한다.

Rolls
1930년 블랑팡이 프랑스 워치메이커 레옹 아토(Leon Hatot)와 협업해 선보인 직사각 형태의 손목시계. 여성을 위한 최초의 오토매틱 시계이기도 하다. 원형 로터를 장착하기엔 케 이스 크기가 너무 작았기 때문에 무브먼트 전체를 하나의 케이 지에 넣은 후 왕복 운동을 통해 태엽을 감는 방식을 택했다.

Fifty Fathoms
피프티 패덤즈는 60여 년 전인 1953년 당시 블랑팡을 이끈 장-자크 피히터에 의해 탄생했다. 프랑스 해군 납품 시계로 이름을 알린 이 시계의 특징은 시인성이 뛰어난 아워 마크, 잠금이 가능한 볼록한 형태의 베젤. 당시 방수 성능은 50패덤(약 91.45m)이었다(시계의 이름이 여기서 기인했다). 지름 42mm의 크기는 장갑을 착용하는 다이버에게 제격이었다.

Ladybird
블랑팡에 여성 시계 컬렉션은 일찍이 주요 테마였다. 이는 아주 작은 핸드와인딩 무브먼트를 만들 수 있는 블랑팡의 기술력이 뒷받침했기에 가능한 일. 1956년 탄생한 골드 케이스의 레이디버드는 발표 당시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고, 현재 블랑팡 우먼 컬렉션의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다. 당시 가장 작은 원형 무브먼트를 장착한 시계로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1735
1980년대 초 블랑팡은 문페이즈와 트리플 캘린더, 울트라 슬림, 스플릿 세컨드, 투르비용, 미니트리피터, 퍼페추얼 캘린더 등 6개의 컴플리케이션을 한 번에 선보이며 주목받 았다. 그리고 1990년 이 6가지 기능을 한데 담은 그랑 컴플리케이션 1735 모델을 선보인다. 총 740개의 부품, 6년의 개발 시간, 1년이 넘는 조립 시간 등 대기록을 보유한 이 모델은 지금까지도 블랑팡의 기술력을 대변하는 마스터피스다. 눈치챘겠지만 제품의 이름은 블랑팡의 설립 연도다.

Le Brassus Carrousel Minute Repeater Flyback Chronograph
2013년 발표한 하이 컴플리케이션 모델. 2008년 선보인 1 미니트 까루셀, 1996년의 플라이백 크로노그래프, 1986년 완성한 미니트리피터를 응집한 시계로, 오픈워크 다이얼 아래 블랑팡의 시계 제조 기술과 세공력 등 무브먼트의 아름다움을 케이스 앞뒤로 감상할 수 있는 시계다.

블랑팡의 독보적 워치메이킹 영역
블랑팡을 하이엔드 브랜드라 부를 수 있는 이유는 역사적 배경에 안주하지 않고 항상 새로움을 추구하는 데 있다. 1988년 허공에 떠 있는 듯한 플라잉 투르비용을 최초로 개발한 이래, 2008년에는 플라잉 까루셀을 발표해 투르비용과 별개로 중력을 상쇄하는 독창적 기술력을 과시하기도! 한편, 무브먼트는 물론 다이얼과 케이스 등의 세공 장식에도 탁월한 블랑팡의 아트 피스는 워치메이킹의 또 다른 방향을 제시한다.

르 브라쉬스 투르비용 까루셀 모델

Carrousel
투르비용과 마찬가지로 중력의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개발한 장치. 하지만 메커니즘에 차이가 있다. 하나의 기어 트레인을 통해 배럴과 연결된 투르비용 케이지와 달리 까루셀은 2개의 기어 트레인으로 배럴과 연결되어 있다. 하나는 이스케이프먼트 작동에 필요한 에너지를 전달하고, 다른 하나는 케이지의 회전속도를 조절한다. 사실 까루셀은 회중시계를 위해 고안한 장치지만 그 당시에는 하루에 1회전하는 대단히 느린 장치였다. 하지만 블랑팡은 이를 1분에 1회전하는 방식으로 바꾸어 본래 목적인 중력 상쇄 효과를 극대화했다. 1 미니트 까루셀은 칼리버 225를 통해 대중에게 공개했고, 현재 블랑팡의 하이 컴플리케이션 기술력을 대표하는 장치로 활약 중이다.

빌레레 스노-셋 인버티드 무브먼트 모델

빌레레 스켈레톤 8-데이 모델

Engraving & Jewel Setting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블랑팡은 시계 본연의 기능과 이를 위한 기술 개발을 넘어 예술품으로서 시계를 바라보게 된다. 무브먼트를 아름답게 장식하는 인그레이빙 기술과 케이스, 브리지 등 주요 부품에 다이아몬드 등 진귀한 보석을 세팅하는 기술에 집중 투자하기 시작한 것. 물론 이런 기술은 280년의 역사 속에서 은은하게 이어져왔다. 현재 블랑팡은 스켈레톤 무브먼트 제작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데 2012년 바젤월드에서 공개한 빌레레 스켈레톤 8-데이 모델이 그 대표작으로, 사파이어 크리스털 글라스로 만든 케이스 앞뒤를 통해 드러난 무브먼트의 섬세한 모습과 부품의 정교한 움직임이 시선을 사로 잡는다. 더욱이 구동에 필요한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을 과감히 도려내고 남은 부분에 더한 수공 인그레이빙 장식이 백미. 8일 파워 리저브를 위해 탑재한 3개의 태엽통(배럴)도 과감히 드러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서히 풀려가는 태엽의 모습도 즐길 수 있다. 한편 지난해에 발표한 빌레레 스노-셋 인버티드 무브먼트 모델은 제품명대로 무브먼트의 곳곳에 다이아몬드를 빼곡하게 세팅한 아트 피스. 마치 눈이 소복이 쌓인 듯한 무브먼트가 손목 위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앞뒤를 뒤집어 탑재한 무브먼트 자체를 다이얼로 사용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블랑팡의 재치와 장인정신을 동시에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더욱이 시곗바늘을 움직이는 무브먼트에 다이아몬드를 세팅하는 건 소수의 워치메이커만 할 수 있는 작업이다. 무브먼트에만 409개의 다이아몬드가 쓰였고, 케이스를 포함해 총 815개의 다이아몬드를 세팅했다.

에디터 | 이현상 (ryan.lee@nobless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