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애인 만나기
남자는 20대 여자를 동경한다. 마치 20대 여자만이 여자로서 의미가 있는 것처럼. 하지만 남자가 나이 들면 20대 애인은 무겁고 무서운 존재가 된다. 그럼에도 남자는,여전히 20대 여자를 동경한다.

36세 남자, 24세 여자를 만나다
“오빠, 고생했어.” 그녀가 내 등을 두드린다. 내가 그녀를 좋아하는 이유는 고생한 걸 알아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띠동갑이다. 내가 서른여섯이고 그녀는 스물네 살이다. 친구들은 나한테 “어린 여자 만나서 좋겠다”고 말하는데 나는 여자친구가 어리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도 젊기 때문이다. “만날 만하니까 만 난 거지.” 당당하게 말한다.
하지만 안 힘든건 아니다. 그 얘기를 하기 전에 고백할 게 있다. “남자들이 왜 어린 여자가 좋다고 하는지 알겠어”라고 애인에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숨을 헐떡였고, 어린 애인은 그저 웃었다. 침대 위에서 주고받은 말이다. 19금이라 여기까지. 19금이든 아니든 힘든 순간은 엄청 많다. 한번은 애인이 친구랑 단둘이 경기도 어디쯤으로 1박2일 여행을 간다고 했다. 친구는 물론 여자다. 머리가 아팠다. 안 보내주면 속 좁은 남자가 되기 때문이다. 가라고 했다. 쿨하게 보내놓고 뒤끝 있다는 소리 들을까 봐 전화도 안했다. 내 마음이 어땠겠어? 전화기만 바라보며 하루를 보냈다. 밤 12시가 넘어서 전화가 왔다. 술에 취해 있었다.
“오빠, 보고 싶어.”
“나도 우리 애기 보고 싶지.”
“그렇지? 그럼 지금 여기로 와줘.”
장난으로 하는 말인지 알았다. 그런데 계속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오빠, 내 친구가 오빠 너무 궁금하대. 나랑 제일 친한 친구야.” 스물네 살이면 세상 물정 알 나이 아닌가? 나는 그 나이에 갓 제대해서 5년 안에 창업하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품고 있었다. 그러나 철없는 애인은 우정이 소중해 한밤중에 경기도에서 오빠를 부르고 있었다.
“오빠 내일 회사 가야지.”
“왔다 가면 되잖아.”
그때 옆에서 위대한 친구분께서 거드셨다.
“오빠, 너무 보고 싶어요. 우후.”
“내 친구 하는 말 들었지? 오빠, 정말 못 와?”
웃음이 나왔다. 내가 얼마나 자랑스러우면 이 시간에 불러 친구에게 보여주려는 걸까? ‘나를 사랑하긴 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갈게.”
전화를 끊었다.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족히 100km는 달려야 했다. 1시간 반이 걸린다고 나왔다. 3시쯤 도착할 테니까, 1시간 정도 같이 있다가 집에 오면 5시 정도엔 잠자리에 들 수 있겠지. 2시간만 자고 출근하면 되겠다. 일어나서 비타민을 두 알 먹었다.
차를 타고 가는데 계속 전화가 왔다.
“오빠, 어디야?”
“오빠, 어디까지 왔어?”
허허허 웃으며 일일이 대답해주었다.
도착했을 때 애인은 나를 안아주었다. 그리고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수고했어, 우리 오빠.” 피로가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때부터 계속 애인과 애인 친구의 얘기를 들어주었다. 무슨 얘기를 들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 운전하고 돌아가야 해서 술은 안 마셨다.
5시쯤 어린 애인과 애인의 친구는 만취해서 잠이 들었다. 봄이 끝날 무렵이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그저 헛것이 보였는지 밝은 빛이 저 멀리서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해가 뜬 것이다. 조용히 문을 열고 나가려 하는데 화가 났다. 잠도 못 자고 이게 무슨 등신 짓인가. 피곤해서 사랑이고 연애고 다 때려치우고 싶었다. 나는 열던 문을 쾅 닫고 어린 애인에게 가서 와락끌 어안았다. 안기라도 하고 가자, 입이라도 맞추고…. 애인은 잠깐 잠에서 깼는지 나를 꼭 안아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오빠, 고생했어.”
“어, 나 고생했어. 힘들어서 죽을지도 몰라.”
애인은 다시 잠들었다. 깊이.

43세 남자, 28세 여자를 만나다
오늘 병원에 갔다. 애인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위로받고 싶고 기대고 싶었는데, 병원에 간 걸 노화 때문으로 알까 봐 말할 수 없었다. 간 기능이 좀 떨어졌을 뿐이다. 노화가 맞네. 아파도 아프다고 말할 수가 없다.
뭘 모르는 사람들은, 특히 대부분의 여자는 내 친구들이 나를 부러워할 거라고 생각한다. 내 나이에 20대 여자친구를 만나니까. 웃기는 소리다. 내 친구 중에 나를 부러워하는 사람은 없다. “야, 걔가 언제까지 널 만날 것 같으냐?” 부러워서 하는 소리 같은데, 아니다. 애인이 나를 두고 젊은 남자한테 가버릴 거라고 그들은 확신 한다. 그런데 그건 나도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애인한테 말은 안 하지만 체념하고 산다. 음, 아예 말을 안 하는 건 아니다. 같이 잠을 잘 때, 그러니까 잠만 자는 게 아니라 그 무엇인가를 할 때, 지나가는 말로 “내가 더 늙고 힘없어지면 두고 떠날 거지?”라고 말한다. 그 순간엔 정말 그런 생각이 든다. 애인은 그 말을 듣고 화를 낸 적이 없다. “아니야, 오빠.” 그리고 늘 뒤따라오는 말이 있다. “나는 이거 안 하고도 살 수 있어. 오빠만 있다면.” 그 말이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든 적도 있다. 지금은 아니다. 안 하고 살 수 있다면 이 여자를 놓치고 싶지 않다. 일단 지금은. ‘영원’은 40대 남자에게 존재하지 않는 단어니까. 하지만 하고 살아야 한다면 보내줘야지. 내 힘으론 감당할 수가 없거든.
우린 사귄 지 1년 됐다. 사귄다는 표현이 좀 어색하긴 하다. 알고 지낸 건 3년째다. 가끔 해외 출장을 가면 선물로 뭘 사줘야 할지 고민된다. 한번은 면세점에서 화이트닝으로 유명한 S 브랜드의 수분 크림과 팩을 사줬다. 30만 원 정도 한 것 같다. 한번은 지갑을 사줬다. 영국 B 브랜드의 짙은 블루 컬러 지갑이었다. 70만 원이었다. 출장은 이제 안 가고 싶다. 액수가 점점 커진다. 다음엔 가방을 사줘야 할 것 같다. 100만 원은 넘기면 안 되는데. 물론 애인은 싼 선물을 사와도 좋아할 거다. 착한 여자니까. 하지만 아쉬움은 씨앗과도 같다. 나는 그것이 자란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마흔세 살이 되면 그 정도는 아는 법이다. 그래서 요즘 내 가장 큰 고민은 선물이다. 어떡해야 하지? 허심탄회하게 말해볼까?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녀는 내 생일에 이탈리아 P 브랜드의 지갑을 사줬다. 나만 쏟아붓는 게 아니다. 그냥 아무말도 하지 말자. 그래, 괜찮아. 사실 선물보다 더 큰 고민은 술이다. 그리고 배.우선 술을 줄여야 할 거다. 그래야 건강해지고 덜 늙을 테니까. 술만 줄일 수 있어도 애인 앞에서 당당해 질 것 같다. 그러면 뱃살도 빠질거고. 거울 앞에 서서 뱃살과 피로를 그대로 인쇄한 듯한 얼굴을 볼 때마다 약간 화가 난다. ‘내 나이에 이 정도면 괜찮은 건데. 아, 그냥 헤어지고 30대 중·후반의 여자를 만날까? 그럼 좀 편하지 않을까?’ 그런데 내가 아직 정신을 못 차렸는지 맘에 드는 여자는 전부 20대다. 20대를 만나고 싶어서 만나는 게 아니다. 어쩔 수 없이 20대를 만나는 거다. 그러니 애인을 생각하면 술을 안 마실 수가 없다. 연하의 애인에게 젊은 에너지를 받지 않느냐고 물을 수도 있다. 하지만 스물여덟인 여자는 자신이 어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더 깊이 생각해보니 술을 줄이는 것이 가장 큰 고민은 아니었다. 나는 애인을 결혼할 만큼 사랑하진 않는다. 정신 못 차렸구나. 애인보다 예쁜 여자를 얼마든지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뭔가 잘난 구석이 있으니까 애인도 나를 만나는 거 아닐까 생각하기 때문이다. 기다려보자, 더 예쁜 여자가 나타날 때까지. 이게 나도 스트레스다. 내가 이 모양 이 꼴인 게 싫다. 하지만 어차피 젊은 여자 만나는 마당에 그중에 좀 더 예쁜 여자를 찾아내야 내 인생이 행복해지지 않을까? 그게 왜 나빠? 그래서 결혼하자는 말을 안했다. 안 하고 있다. 애인이 기다리려나? 그녀도 스물여덟이니까. 먼저 차이면 안 되는데. 좋은 여자 만나기 전에는. 정말 최악이구나, 나.
에디터 김이신 (christmas@noblesse.com)
글 이우성(시인) 사진 Getty Imag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