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문화 예술을 이끄는 기업의 행보
21세기 문화 예술 발전에서 중요한 축을 담당하는 기업. 다양한 방식을 통해 공생을 모색하는 이들의 행보에 대하여.

위 2023 금호영아티스트로 선정된 김원진의 개인전 〈무용한 무용〉 전경. © 금호문화재단.
아래 롯데문화재단의 핵심 사업 중 하나인 롯데뮤지엄. 그곳에서 2024년 개최한 윤협 작가의 〈녹턴시티〉 전시 전경. © 롯데문화재단, 롯데미술관.
예술은 배고프다고 했던가. 유럽을 중심으로 놓고 보면, 르네상스 시대부터 19세기까지 예술가는 후원이 없으면 대체로 생계를 유지하기 힘들었다. 이들을 뒷받침하는 가장 큰 후원자로는 교회가 있었다. 많은 건축가와 화가, 조각가가 성당과 수도원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예를 들면 바티칸의 시스티나성당이 대표적이다.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예술가 미켈란젤로는 교황 율리우스 2세와 바오로 3세의 의뢰로 시스티나성당에 ‘아담의 창조’, ‘노아의 홍수’를 비롯해 300개가 넘는 인물 천장화와 ‘최후의 심판’ 같은 걸작을 남겼다.
한편 이탈리아 피렌체를 지배한 메디치 가문처럼 경제적으로 부유한 집안이 도시를 한 시대의 중심지로 만들기도 했다. 건축의 아버지라 불리는 브루넬레스키를 후원해 산타마리아델피오레대성당의 돔을 완성하고, 보티첼리,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이 가문의 우산 아래 붓과 망치를 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교회와 봉건제도가 몰락하고, 자본주의 시대가 도래하며 양상은 크게 바뀌기 시작했다. 이제 예술가도 시장구조를 익히고 화상, 즉 갤러리와 협력해 작품을 판매하며 자본주의 체제에 자연스럽게 얽혀 들어갔다.

위 롯데문화재단에서 사회 공헌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마련한 음악회 〈뷰티플마인드〉. © 롯데문화재단.
아래 삼성문화재단은 뮤직 펠로우십을 통해 젊은 음악가에게 명장의 현악기를 무상으로 대여해주는 지원사업을 펼치고 있다. 2023년에는 바이올리니스트 김봄소리가 펠로우로 선정되었다. © 삼성문화재단.
새롭게 등장한 문화 예술 재단
그렇다면 문화 예술 영역에 있는 이들은 누4 군가의 후원이 없어도 풍족하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을까? 답은 모두가 예상한 대로 ‘아니다’다. 20세기 초반 유럽과 미국에서는 지금과 같은 형태의 기업 재단이 출현해 문화 예술을 후원하기 시작했다. 가장 선구적인 사례로 손꼽히는 재단이 미국 철강 산업의 중심에 있던 앤드루 카네기가 설립한 카네기 재단(Carnegie Corporation)(1911), 존 D. 록펠러가 1913년에 설립한 록펠러 재단(Rockefeller Foundation)이다. 먼저 카네기 재단은 ‘사회 기여’ 철학을 바탕으로 도서관, 미술관, 뮤직홀, 교육기관 등을 통해 다양한 문화 예술 활동을 후원해왔다. 또 록펠러 재단은 미술과 공연 예술 분야의 중요한 후원자로 알려졌지만, 그뿐만 아니라 공공 보건, 교육, 사회복지 같은 분야도 후원하며 당시 미국 사회를 부흥하는 데 힘썼다. 이 밖에도 금융계의 전설 J. P. 모건(J. P. Morgan)의 모건 재단(Morgan Foundation)은 도서관과 문화유산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기업의 재단 설립 배경에 ‘사회적 책임’이 주요하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산업화와 경제성장의 동반 썰물을 타고 거대한 부를 쌓은 기업가들은 이전 봉건사회의 귀족과 달리 ‘부유한 사람이 사회에 기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공익적 목적은 기업의 사회적 이미지 제고로 이어진다. 이는 정치적 · 사회적 영향력의 강화로도 연결되므로, 궁극적으로 이들은 재단 설립을 통해 대중에게 기업과 브랜드의 긍정적 이미지를 심어주고자 했다.
뒤늦은 출발
우리나라도 1980년대부터 기업 기반 문화 예술 재단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특히 1990년대에 김영삼 정부가 ‘문화예술진흥법’을 개정하며 본격적으로 생겨났다. 이에 관해 미술 평론가이자 자문을 통해 파마리서치문화재단을 돕고 있는 하계훈 양평군립미술관 명예관장은 “당시 기업들이 재단의 역할에 대해 깊이 고민하지 않은 채 국가정책에 따라 재단을 설립했어요. 의무적이었던 거죠. 외국의 경우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또 만든 지 오래되지 않았기에 아직 궤도에 오르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우리나라 기업이 문화 예술 재단을 설립한 배경을 종합했다.
지난해에 우리나라는 1인당 GDP 3만4653달러를 기록했다. 그간 많은 경제학자가 일정 수준 이상으로 경제적 안정과 성장을 이루면 사람들이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 관심을 집중한다는 점을 주목해왔다. 그 결과 문화 예술 분야에 대한 관심과 니즈가 자연스럽게 높아진다는 것. 경제학자 로버트 프랭크(Robert Frank)도 저서 〈사치 열병(Luxury Fevers)〉을 통해 최하층까지 퍼지는 소비 패턴에 대해 지적하기도 했다. 이는 물질적 소비에 대한 갈증이 문화적 · 정신적 만족을 위한 소비로 번지는 현상을 말한다. “사람들이 원하면 기업도 이를 주목할 수밖에 없죠. 또한 기업에서 무엇인가를 제시하면 사람들은 관심을 갖고요. 문화 예술 중에서 접근성이 가장 쉬운 것부터 하나하나 커져갑니다. 음악, 공연, 영화 같은 매체는 상대적으로 빠르게 즐길 수 있는 장르의 예술이죠. 반면 미술은 교육과 긴 시간 투자가 필요한 분야입니다.” 그런데 이제 사람들이 미술에 관심을 가질 준비가 된 것이다. 1인당 GDP가 3만 달러를 넘으며 다양한 문화 활동에 시간을 쏟기 시작했고, 이제 그 정점에 있는 미술을 공부하고 즐기며 소장하는 데까지 관심을 보이는 것. “하지만 생각보다 사람들의 니즈와 관심에 비해 우리나라 기업의 문화 예술에 대한 지원은 두드러지지 않아요. 우리나라에는 1994년 기업 메세나 활동을 통해 문화 예술에 대한 국민 의식을 높이고, 경제와 문화 예술의 균형 발전을 이루기 위해 설립한 ‘한국메세나협회’가 있어요. 아직 2024년 총액을 발표하지 않았는데, 2023년에는 기업 문화 예술 지원 금액이 약 2088억 원이었어요. 이렇게 보면 큰 액수 같지만 515개 기업을 조사한 결과니, 과학기술을 비롯해 다른 분야에 투자하는 비용을 생각할 때 결코 큰 규모는 아니에요. 아직 더 노력해야 합니다.” 하계훈 관장은 흐름이 바뀌는 것은 단기간에 일어나지 않는다고 거듭 강조했다. “우리나라엔 유한양행의 유한재단처럼 후손에게 물려주지 않고, 전문 경영인이 운영하며 문화 예술에 기여하는 재단도 있어요. 이렇게 진정 사회로 환원하는 재단이 많아져야 해요. 재단이 사회적 · 문화적 역할을 제대로 하려면 먼저 재단의 설립 목적과 방향성 그리고 그것이 사회에 미칠 영향력을 정확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어요. 우리나라는 아직 더 시간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예술을 ‘시각언어’라고 부르는 건 이를 통해 감정적으로 교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경험과 감정을 나누고 공감하게 한다. 우리는 예술 작품을 통해 직관적으로 복잡다단한 이야기를 전달하고 이해하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이렇기에 문화 예술은 마지막 레벨의 사회적 · 정치적 도구이자 수단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현대 기업이 이윤 창출만을 목적으로 해선 살아남을 수 없게 된 지 오래다. 그래서 이들은 일찌감치 사회 전반에 걸쳐 재단을 설립하고 다양한 활동을 통해 사회적 · 환경적 · 문화적 · 예술적 · 윤리적 가치를 실현하고 있다.
에디터 정송(song@nobless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