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D 프린팅은 지금
우리의 일상을 바꾸어 놓은 3D 프린팅이 만들어갈 새로운 세계.
20년 넘게 안경을 썼지만 좋은 안경을 찾기란 쉽지 않다. 모처럼 마음에 드는 모델을 발견해도 막상 착용하면 어색한 경우가 부지기수. 특히 동양인의 전형적 얼굴형인 에디터에겐 유럽 브랜드 안경이 잘 어울리지 않는다. 새 안경을 찾아 헤매던 중 브리즘(Breezm)이라는 흥미로운 브랜드를 발견했다. 오프라인 매장에서 얼굴 크기와 모양을 측정해 최적화된 안경 사이즈와 디자인을 추천한 뒤 3D 프린터로 커스텀 안경을 만드는 것. 얼굴 측정부터 안경을 제작하고 완성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2주 정도. 세상에 단 하나뿐인 안경을 만드는 만큼 가격이 높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나름 합리적이다. 이번 원고 마감이 끝나는 대로 매장을 방문할 생각이다.
에디터의 패션 고민을 덜어준 데에는 3D 프린팅이라는 기술의 역할이 컸다. 적층 가공(additive manufacturing)이라 불리는 3D 프린팅은 종이에 활자를 새기는 2차원 인쇄 방식이 진화한 것으로, 층을 쌓아 3차원 물체를 만든다. 인공지능이나 메타버스처럼 요즘 자주 언급되는 기술에 비해 ‘첨단’스러운 느낌은 덜하지만, 제조 혁명이라 부를 정도로 대단한 기술이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뭔가를 만들 때 항상 ‘덜어냈다’. 나무, 금속, 플라스틱 같은 원자재 덩어리를 잘라 원하는 모양으로 다듬는 것. 반면 3D 프린팅은 ‘첨가’하는 방식이다. 이는 엄청난 장점으로, 재료 낭비가 적은 것은 물론 복잡한 모양도 쉽게 만들 수 있다. 예컨대 공 안에 공을 넣으려면 기존에는 반구를 만들어 그 안에 작은 공을 넣고 접합했지만, 3D 프린팅은 통째로 만들 수 있다. 제작 공정이 간소하고, 부품 결합을 위해 사용하던 볼트와 너트 등이 필요 없어 무게와 부피가 줄어드는 것은 당연지사. 1980년대 3D 프린팅 기술이 처음 등장했을 때는 플라스틱만 출력이 가능했지만, 현재는 금속·고무·콘크리트 등 다양한 재료를 활용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미 제조업 분야에서는 3D 프린팅을 활발하게 이용하고 있다. 포르쉐는 3D 프린팅 보디 폼 풀 버킷 시트를 911과 718 파생 모델에 이용하고 있으며, 시트 중앙 부분인 시트 및 등받이 쿠션을 부분적으로 3D 프린터로 생산한다. 911 GT2 RS의 고성능 엔진에 적용하는 고강도 피스톤도 3D 프린터로 제작한다. 단조 생산 방식의 피스톤에 비해 10%가량 무게 저감 효과가 있고, 기존 방식으로 제작할 수 없던 피스톤 크라운에 통합된 쿨링 덕트가 특징이다. 포르쉐 첨단 드라이브 개발 부서 프랭크 이킨저는 “새 피스톤 덕분에 엔진 속도는 증가하고, 피스톤의 온도 부하가 낮아지며, 연소는 최적화됐다”고 밝혔다. 철도 사업을 하는 지멘스 모빌리티는 3D 프린터로 운전석 팔걸이를 비롯한 주요 부품을 제작한다. 열차 유지 보수에도 이 기술을 활용한다. 3D 프린팅을 도입하기 전에는 생산 단가를 맞추고 예비 부품을 구비할 목적으로 많은 양의 부품을 생산할 수밖에 없었다고. 그래서 소량 들어가는 부품의 경우 오래되어 사용할 수 없을 때까지 보관하는 일이 잦았다. 하지만 이젠 상황에 맞게 맞춤형 부품을 딱 하나만 생산하면 된다. ‘친환경’이라는 키워드가 돋보이는 사례도 있다. 포러스트(Forust)는 목제 폐기물을 이용해 3D 프린터로 만든 트레이와 볼 등을 출시했다. 장인이 오랜 시간 심혈을 기울여야 완성할 수 있는 복잡한 형상의 제품도 뚝딱 만들어낸다. 에보니, 마호가니 등 각종 나무 질감도 재현 가능하다.
건축 분야에서도 3D 프린팅의 활약이 눈부시다. 윈선(Winsun)은 지난 2014년 상하이에 데모용 주택 열 채를 3D 프린터로 하루 만에 지었다. 2018년 프랑스 낭트 대학교가 3D 프린터로 지은 29평(약 95.8m²) 규모의 주택에는 실제 5인 가족이 거주 중이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랜초미라지(Rancho Mirage)에는 내년 초 3D 프린팅 주택단지가 들어선다. 건설을 맡은 마이티 빌딩(Mighty Buildings)은 자외선에 노출되면 단단하게 굳어지는 특수 소재를 잉크로 사용, 제작 기간과 인건비가 줄어 주변 시세보다 약 30% 저렴한 가격에 주택을 분양했다. 지난여름 암스테르담에서는 세계 최초의 3D 프린팅 강철 교량을 개통했다. 보행자가 자유롭게 다닐 만큼 튼튼한 3D 프린팅 금속 구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 프로젝트와 관련해 런던 임페리얼 칼리지의 토목환경공학과 크레이그 뷰캐넌 박사는 “건축 분야에서 3D 프린팅은 재료 낭비를 막아 효율적이며, 미적인 측면도 고려할 수 있어 잠재력이 크다”고 전했다.
여기까진 쉽게 상상이 가능한 범위. 의료 분야에 적용된 3D 프린팅 사례를 보면 더욱 놀랍다. 언리미티드 투모로(Unlimited Tomorrow)와 오픈 바이오닉스(Open Bionics)는 3D 프린터로 개인화된 생체공학 의수를 만든다. 근육의 미세한 신호에 따라 진짜 팔처럼 움직인다! 그뿐 아니라 이 기술은 사람의 내부 기관을 제작하는 용도로도 쓰인다. 지난 2018년 영국 뉴캐슬 대학교 연구진은 세계 최초로 사람의 각막을 3D 프린팅으로 제작했다. 해초에서 추출한 알긴산염과 콜라겐으로 바이오 잉크를 개발, 이것을 인간의 각막 줄기세포와 혼합해 동심원으로 인쇄한 것. 데스크톱 헬스(Desktop Health)는 몇 달 전 소리를 이식한다는 뜻의 포노 그래프트(Phono Graft) 기술을 개발했다. 3D 프린터로 만든 인조 청각 신경을 인체에 이식해 환자의 고막을 치유한다고. 이스라엘 텔아비브 대학교에서는 지난 2019년 한 환자의 세포와 생물학적 물질을 이용해 만든 3D 프린팅 심장을 공개했다. 체리 1개 크기지만 세포, 혈관, 심실 등을 갖췄다. 전문가들은 수년 내 3D 프린터로 제작한 인공 기관이 상용화될 거라고 입을 모은다.
머지않은 미래에는 3D 프린팅 음식이 식탁 위에 오를지도 모르겠다. 리디파인 미트(Redefine Meat)는 식물에서 추출한 단백질을 기반으로 3D 프린팅 대체육을 개발한다. 대체 근육과 지방, 혈액을 쌓아 올려 실제 스테이크 고기 등을 감쪽같이 모방한다. 생긴 것만큼 맛도 좋다. 지난해 한 시식회에선 10명 중 8명이 실제 고기와 리디파인 미트 대체육을 구별하지 못했다. 노바미트(Novameat)는 가정이나 식당에서 직접 대체육을 만드는 비즈니스를 구상 중이다. 주방에 3D 프린터를 설치하고 고기 캡슐을 넣어 각자 입맛에 맞는 대체육을 뽑아내는 것. 3D 프린팅 기술력은 육류에 국한되지 않는다. 레전더리 비시(Legendary Vish)는 버섯 단백질과 해조류를 원료로 한 3D 프린팅 연어 살코기를 개발하고 있다.
다양한 분야에서 혁신을 일으키는 3D 프린팅은 우주 진출에 꼭 필요한 기술이기도 하다. 3D 프린터를 이용하면 우주선 제작 기간이 단축되고 부품 수가 줄어들 것이다. 렐러티비티 스페이스(Relativity Space)는 대형 3D 프린터를 이용해 로켓을 만들 계획인데, 부품 수가 기존의 100분의 1 수준으로 알려졌다. 이 외에도 우주에서 로켓을 수리할 때, 우주인이 아플 때, 우주 식민지를 건설할 때, 식량을 생산할 때 등 여러 상황에서 3D 프린팅을 이용할 수 있다. 실제로 지난 2018년 우주정거장에서 임무 수행 중 손가락을 다친 우주인이 3D 프린터로 부목을 만들어 치료했으며, 3D 프린팅 건설사 아이콘(Icon)은 달 먼지를 콘크리트 같은 물질로 바꾸는 기술을 연구 중이다.
너무 청사진만 제시한 걸까? 다른 기술 트렌드와 마찬가지로 3D 프린팅에는 극복해야 할 장애물이 많다. 3D 프린팅이 보편화될수록 위조품을 쉽게 만들 수 있는 만큼 지식재산권 문제가 부각될 것이다. 무기를 쉽게 복제할 수 있는 것도 문제. 또 공장과 건설 현장 등에서 3D 프린터가 인간을 대신하면서 일자리가 감축될 수도 있다. 하지만 3D 프린팅의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생각하면 우려보다는 기대가 클 수밖에 없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듯한 21세기 연금술, 3D 프린팅에 주목할 때다.
에디터 황제웅(jewoong@nobless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