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광주의 맛
시민사회와 소통하고 시대정신을 탐색하며 미적 담론을 선도하는 2018 광주비엔날레 ‘상상된 경계들(Imagined Borders)’ (9월 6일~11월 11일)이 20일 앞으로 다가왔다. 전 세계 미술계는 김선정 광주비엔날레 대표가 진두지휘한 올해의 광주비엔날레를 유독 기다리고 고대하는 눈치다. 미술계의 미다스 손으로 불리는 그녀의 진가를 아는 이들은 더더욱 그렇다.

2005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로 부임했지만 전시 기획 리서치를 맘껏 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7년 만에 사표를 낸 김선정 광주비엔날레 대표는 누가 뭐래도 현장 체질이다. 그녀는 이번 광주비엔날레를 준비하며 소통과 교육을 거듭 강조했다.
피처 기자로 일하면서 꽤 많은 시간 미술계를 취재해왔다. 그 때문에 김선정 대표를 종종 만나온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김선정 대표는 이화여자대학교 서양화과와 미국 크랜브룩 대학원을 졸업한 후 1993년부터 아트선재센터 큐레이터로 일하며 요절한 개념미술가 박이소, 세계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이불, 최정화, 윤석남, 안규철, 공성훈, 오형근 등 굵직한 작가를 소개해온 주인공. 2004년 기획사 ‘사무소’를 열고 2005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커미셔너, 2005년부터 2012년까지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2010년 SeMA비엔날레 미디어시티서울 전시 총감독, 2012년 광주비엔날레 예술감독으로 활동해온 그녀이기에 미술을 담당하는 기자라면 그녀를 만나지 않는 것이 사실상 더 어려운 일이라 할 수 있다.

1 파빌리온 프로젝트에 참여한 ‘필리핀 컨템퍼러리 아트 네트워크’의 전시는 이강하미술관에서 열린다.
2 2018 광주비엔날레 ‘상상된 경계들’ 포스터. 전 세계 미술계에서 한국에 관심을 보이는 건 바로 광주비엔날레가 열리는 기간이다.
지난해 7월, 한동안 공석이던 광주비엔날레 대표로 부임하며 아트선재센터 관장직을 내려놓은 그녀에 대한 미술계의 평은 대략 이렇다. 일에 관한 열정이 엄청나다, 꾸준히 도전한다, (그래서) 일 벌이기를 좋아한다, 평가에 위축되지 않는다, 주변에 밝고 좋은 에너지를 전해준다 등등. 측근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행사장에서, 몇몇 식사 자리에서, 전화 통화나 인터뷰를 통해 내가 느낀 것 역시 그와 비슷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내가 높이 사는 부분은 따로 있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상대에게 거리낌없이 ‘묻는다’는 것이다. 세계 미술계의 요직을 두루 거치고 영국의 <아트리뷰>가 선정한 ‘세계 미술계 파워 100인’에 이름을 올릴 정도로 미술계에서 잔뼈가 굵었지만 종종 전시장에서 만날 때면 전시에 대한 솔직한 의견을 물었고, 그것이 좋은 이야기든 불편한 이야기든 늘 수긍하는 자세로 경청했다.
광주비엔날레 대표로 부임한 후 그녀가 가장 먼저 한 일 또한 직원들을 모아 1995년에 시작한 제1회 광주비엔날레부터 최근까지 행사를 하나하나 되짚으며 잘한 점, 못한 점, 개선할 점 등을 허심탄회하게 묻고 의견을 나눈 것이다. 물론 그 안에는 그녀가 예술감독을 맡은 2012년 광주비엔날레 ‘라운드 테이블’도 있었다. “직원들이 2012년의 비엔날레는 좀 산만했다고 하더라고요. 공동 큐레이팅을 시도한 해였는데, 여러 명의 큐레이터가 각자 목소리를 내다 보니 이도 저도 아닌 이야기처럼 보인 것 같아요. 그래서 이번 비엔날레는 큐레이터들이 각각의 전시를 만드는 형식으로 진행합니다.”
지난해에 반년 가까이 공석이던 광주비엔날레 대표 자리에 뒤늦게 부임했기에 준비 시간은 매우 촉박했다. 이번에도 다수의 큐레이터가 비엔날레를 준비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2012년의 공동 큐레이팅 방식을 반면교사 삼아 이번엔 한 큐레이터가 하나의 소전시를 꾸린다고. “이번 비엔날레에서 대서사보다는 소서사가 중요하다고 판단했기에 메인 주제전이 각각의 피스 형태로 존재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그 각각의 피스가 서로 연결되어야겠지만요.” 광주비엔날레가 크게 주목받은 2008년 ‘연례 기획’, 2010년 ‘만인보’, 2012년 ‘라운드 테이블’, 2014년 ‘터전을 불태우라’, 2016년 ‘제8기후대’에 이어 올해는 ‘이 시대 예술의 본질은 무엇인가?’라는 묵직한 질문을 던지는 ‘상상된 경계들(Imagined Borders)’을 주제로 정했지만 사실 후보 중에는 ‘다크 유토피아’도 있었다.
“상상된 경계들은 내적으로는 한국의 분단 상황, 외적으로는 트럼프 정부의 미국 보호 정책으로 인한 세계 정세의 변화 속에서 지금의 우리를 한번 돌아보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나온 주제예요. 다크 유토피아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각국에서 열심히 개발했지만 어떤 이유에서든 실패한 장소, 예를 들면 후쿠시마나 체르노빌 같은 장소와 함께 유토피아에 대한 개념을 다뤄보자는 주제였는데, 큐레이터들이 상상된 경계들에 좀 더 많은 지지를 보내 주제로 결정되었습니다. 다크 유토피아라는 제목은 좀 만화적이기도 하고요.”

3 올해 신설한 파빌리온 프로젝트 중 ‘팔레 드 도쿄’에서 선보이는 쥘리앵 크뢰제의 ‘Upset, Gloomy, Wonderful, Sunset of Moon’(2017년).
4, 7 GB 커미션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옛 국군광주병원 부지 교회에서 작업하는 마이크 넬슨과 태국 작가 아피찻뽕 위라세타쿤.
5 2018 광주비엔날레 참여 작가 강서경은 올해 발루아즈 예술상을 수상했다. 사진은 지난 2016 광주비엔날레에서 선보인 비디오 설치 작품 ‘검은자리 꾀꼬리’.
6 주제관 전시 7섹션, <북한 미술>에서 선보이는 최창호 작가의 작품 ‘로동자’(2014년).
세계화 이후 민족적·지정학적 경계가 재편되고 있는 동시대 현상을 다루는 이번 주제전에는 42개국 163명의 작가가 참여한다. 특히 주제전은 앞서 말했듯 클라라 킴, 그리티야 가위웡, 리타 곤살레스, 정연심, 데이비드 테 등 11명의 큐레이터가 <상상된 국가들/모던 유토피아>, <경계라는 환영을 마주하며>, <예술과 글로벌 포스트인터넷 조건>, <지진: 충돌하는 경계들>, <귀환>, <생존의 기술>, <북한미술: 사실주의 패러독스>까지 7개의 전시를 선보인다. 지정학적 경계를 넘어 정치, 경제, 감정, 세대 간 복잡해지고 눈에 보이지 않게 굳건해지는 새로운 경계에 대해 이야기할 예정.
무엇보다 개인적으로 관심이 가는 건 3섹션, <예술과 글로벌 포스트인터넷 조건>이다. 인터넷이 등장하면서 누구나 정보의 접근성에서 평등하다고 느끼지만 거기서 생성되는 또 다른 경계에 관한 이야기다. “중국에 가면 페이스북과 트위터, 유튜브 등이 막혀있죠. 쿠바는 아예 인터넷 연결 자체가 안 되는 경우가 다반사예요. 심지어 제가 사용하는 휴대폰도 작동이 안 되더라고요. 3섹션에 참여하는 쿠바 작가 중 한 명은 DIY로 인터넷을 쓸 수 있게 도와주는 작업을 선보이고, 러시아 작가는 휴대폰이 발산하는 열로 온실을 만들 예정입니다.” 데이비드 테(David The)가 기획한, 역대 광주비엔날레 출품작 중 광주비엔날레의 역사와 조응하면서 현재도 중요한 맥락을 형성하는 소수의 작품을 선별해 관람객에게 선보이는 5섹션, <귀환>전도 꼭 한번 주의 깊게 들여다볼 만하다. “역대 비엔날레에서 선보인 작품 중에서 큐레이터가 이번 주제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는 소수의 작품을 다시 선별했어요.” 톰 니컬슨, 코응왕 하우, 루앙루파, 강연균 등 약 10명의 작가가 함께한다.
이뿐 아니라 과거 광주비엔날레를 통해 발굴, 지금은 세계적 명성을 얻은 작가 몇몇도 이번 비엔날레에 재합류한다. 2002년 광주비엔날레에 참여한 덴마크 출신의 아티스트 그룹 슈퍼플렉스는 광주비엔날레 이후 쿤스트할레 바젤, 모리 미술관, 그리고 지난해에는 영국 테이트 모던 ‘현대커미션 2017’ 작가에 선정되며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였는데 올해 광주비엔날레 2섹션, <경계라는 환영을 마주하며>에 참여하며 다시 한번 광주에 대한 애정을 보인 것.
“슈퍼플렉스는 광주를 매우 사랑해요. 광주비엔날레를 통해 이름을 알렸기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제1회 광주비엔날레 당시 상을 탄 쿠바 작가 크초도 마찬가지예요. 이번에 5섹션에 참여했죠. 광주비엔날레를 통해 이름을 알리고 성장한 작가나 큐레이터들을 보면 괜스레 마음이 뿌듯합니다.” 2008년 광주비엔날레에 참여한 임흥순 작가가 베니스 비엔날레 은사자상을 수상한 것도, 같은 해에 예술감독을 맡은 오쿠이 엔위저가 2015 베니스 비엔날레 예술감독이 된 것도, 2010년 감독을 맡은 마시밀리아노 조니 감독이 2013 베니스 비엔날레 예술감독을 거쳐 현재 뉴욕 뉴 뮤지엄 부관장으로 부임한 것도 모두 광주비엔날레의 자랑거리다.
김선정 대표가 야심차게 준비한 건 또 있다. 바로 올해 새롭게 신설한 ‘GB커미션’. 옛 국군광주병원과 같은 광주민주화운동의 사적지에 기념비적 규모의 장소 특정적 작품을 설치하는 이 프로젝트를 위해 태국의 실험영화 감독 아피찻뽕 위라세타쿤과 아르헨티나 작가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 영국 작가 마이크 넬슨, 알제리아 출신인 아티아는 지난여름 광주의 폭염과 싸우며 작업에 임했다. GB커미션은 작품을 통해 광주의 역사를 환기시키면서 관람객과 소통하고, 꾸준한 담론화를 유도한다는 목표를 세웠으나 사실 새로운 장소에서 작품을 만들고 선보이는 것이라 보는 이에 따라 실패처럼, 또는 성공처럼 보일 수도 있는 일. 하지만 GB커미션이야말로 비엔날레의 실험성을 보여줄 수 있는 출구라는 생각에 김선정 대표는 이 프로젝트를 강행했다.
“관람자들의 평가가 두렵긴 하지만 실패를 통해 늘 배우는 게 있으니 괜찮아요. 사실 남들은 제가 꽃길만 걸은 줄 알지만 실패도 많이 했어요. 아트선재센터에서 제가 처음으로 기획한 <싹> 전시 때 도록을 멋있게 잘 만들어보겠다는 의욕으로 한 작가에게 제작을 부탁을 했는데 도록에 들어가는 글의 모든 행간과 자간을 없앤 거예요. 한마디로 읽을 수 없는 책을 만든 거죠. 그대로 다 갖다 버리고 새로 만들었어요. 이외에도 수없이 많아요. 그런데 이런 것이 재미있지 않나요?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 말이에요. 너무 뻔한 길은 가고 싶지 않더라고요.”

8 ‘필리핀 컨템퍼러리 아트 네트워크’의 전시 전경.
9 필리핀 컨템퍼러리 아트 네트워크에 함께 소개하는 이세현 사진작가의 작품. Boundary-Square, Digital Pigment Print, 150×100cm, 2017.
베니스 비엔날레 국가관 전시처럼 해외 유수의 미술 기관이 자국의 신진 작가와 함께 국내 작가를 초대해 진행하는 ‘파빌리온 프로젝트’도 광주비엔날레의 새로운 도전이다. 올해 참여 기관은 파리의 현대미술 전시관 ‘팔레 드 도쿄’, 헬싱키의 대표적 국제 레지던시 프로젝트 ‘헬싱키 국제 아티스트 프로그램’, 필리핀 현대미술 기관 연합체 ‘필리핀 컨템퍼러리 아트 네트워크’다.
“올해 처음 해보는 프로젝트라 실험이 필요해서 우선 3개 기관만 진행하려고요. 그런데 각 기관이 알아서 자국에 홍보도 많이 하고, 기자들도 데려오려는 것 같아요. 광주와 한국을 세계에 알리는 성공적인 프로젝트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2020년 비엔날레에서는 참여 기관의 수가 훨씬 증가할 것 같습니다.”
2012년 광주비엔날레 예술감독으로 일할 때와 지금, 대표로 광주비엔날레를 진두지휘하는 피로도는 천양지차다. 예술감독이었을때는 전시에만 집중했지만 대표가 된 지금 비엔날레 전체, 재단 전체를 보고 비전과 방향을 생각해야한다. 1995년에 처음 광주비엔날레가 출범했을 땐 아시아에는 비엔날레가 거의 없었지만 지금은 전 세계에 200여 개의 비엔날레가 있고, 올해만 태국에 3개가 생긴다는 점도 과거와 달라진 상황이다. 예산 문제도 그렇다. 국제 행사가 7차례 이상 국고 지원을 받으면 다음 회에는 지원 심사 대상에서 제외되는 일몰제가 올해부터 광주비엔날레에도 적용된다. 그렇게 되면 예산이 10억 원 이상 줄어드는데, 지난해 광주비엔날레 예산이 96억 원인 것을 감안하면 10% 이상 감소한 금액이다.
광주비엔날레의 기획과 전시, 학술 프로그램 그리고 행정까지 어느 것 하나 쉽게 흘러가는 건 없지만 김선정 대표는 광주비엔날레의 의미가 여전히 크고 방대하다 말한다. “단적인 예로 2012년과 2014년 광주비엔날레를 위해 한국을 방문한 수많은 해외 미술관의 큐레이터가 같은 기간 갤러리와 미술관에서 열린 단색화 전시에서 작품을 구매하며 전 세계적으로 단색화 붐이 일었습니다. 이외에도 광주비엔날레의 역할은 실로 다양해요. 가끔 시장경제에 의해 작품이 예술적 가치보다 자본의 가치로 평가될 때가 있는데, 그것을 방지하는 것이 비엔날레의 기능이기도 하고요. 이러한 여러 가지 요인 때문에 비엔날레의 성패는 단순히 관람객 수로 평가하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그녀는 예술의 사회적 역할과 그 힘에 대해서도 굳은 신뢰를 보냈다. “예술은 철학과 비슷한 것 같아요. 철학서는 우리가 평소 생각해볼 수 없는 어떤 걸 이야기해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야기를 풀어내는 과정에서 보통 사람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관점을 보여주기도 하죠. 예술도 그래요. 분명 중요한 이야기인데,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빼먹고 하지 않는 이야기를 색다른 방향에서 풀어줍니다.” 지금껏 아트선재센터와 많은 비엔날레를 통해 좋은 큐레이터와 작가를 발굴, 소개해왔다는 말에 “발굴도, 소개도 아닙니다. 나는 그들과 같이 일한 것뿐이에요”라고 답하는 김선정 대표. 그녀가 도전할 새로운 9월은 뜨거운 지난여름의 끝에 비로소 완성될, 우리가 그토록 ‘필리핀 컨템퍼러리 아트 네트워크’의 전시 전경. 기다려온 가을의 맛일 것이다.
에디터 김이신(christmas@noblesse.com)
사진 김잔듸(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