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rnar Venet 베르나르 브네
베르나르 브네는 프랑스 출신의 세계적 개념미술가다. 그는 미술의 목적을 ‘미(美)가 아닌 지식을 담는 것’으로 정의하며, 지난 40여 년간 조각 · 회화 · 퍼포먼스 · 사진 · 음악 · 무용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작품 활동을 해왔다. 석탄 더미를 아무렇게나 쌓아두고 끈끈한 타르가 흘러내리게 방치한 작품을 선보이는가 하면, 쓰레기 더미에 누워 직접 쓰레기가 되는 퍼포먼스를 감행하기도 한 급진적 아티스트. 오는 5월 갤러리현대에서 열리는 그의 개인전에 앞서, 그와 함께 그간의 활동에 대해 되짚어봤다.
1 자신의 작품 ‘GRIB’에 기댄 베르나르 브네
2 Three Indeterminate Lines, 2003
베르나르 브네는 작품에 대한 집중도를 높이기 위해 최대한 단순하고 중성적인 작업을 추구한다. 작품을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기 위한 어떤 장식적 시도도 거부한다. 그는 파리·베를린·뉴욕 등 세계의 유명 공공장소에 작품을 설치해 이목을 끌었으며, 기존의 미술 사조와 담론을 뛰어넘는 급진적 작품 활동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유년 시절부터 그는 이미 기성 미술에 도전했다. 겨우 스무 살이던 1961년 중력에 의해 타르가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려 굳은 모습을 작품화한 ‘타르 회화’로 파문을 일으켰는가 하면, 1980년대부터는 소재를 바꿔 철을 구부려 만든 작품을 내놓기 시작했다. 일찌감치 수학에 심취한 그는 (수학적 재능과 상관없이) 방정식과 도표, 각도의 아름다움에 주목하면서 자신의 작품 세계를 다듬기도 했다. 그가 인터뷰 중 가장 많이 언급한 말은 바로 ‘새로움’. 그의 목표는 단순했다. 미술의 한계를 넘어 ‘이런 표현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작품을 통해 보여주는 것. 세상에 모든 걸 터놓고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사유를 확장해가는 한 예술가를 통해, 우리는 21세기 현대미술의 진수를 경험할 수 있다.
제 55회 베니스 비엔날레(2013) 기간에 아바치아 디 산 그레고리오(베니스)에서 열린 개인전 당시 선보인 작품.
Gold Diptych with “Recursiveness”, to Kurt Gödel, 2012
(왼쪽) Round Gold Painting with “Quantification”, 2012 (오른쪽) Gold Triptych with Two Saturations, 2009
꽤 어린 나이에 작품 활동을 시작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미술을 시작한 계기가 무엇인가요?
어린 시절 학교에서 우연히 책을 뒤적이다 르누아르의 작품을 봤습니다. 그걸 본 순간 단번에 미술 작가가 돼야겠다고 생각했죠. 전 당시 또래 친구들보다 재능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또 예술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었죠. 물론 모든 것이 잘 풀릴 경우에 말이지만요.(웃음)
열한 살 땐 지역 미술관에도 초대받았습니다.
당시 저를 초대한 곳은 미술관(갤러리)이 아닌 ‘살롱’이었습니다.
파리의 살롱은 일종의 복합 문화 공간이죠. 작가들의 최신작을 볼 수 있고 작품에 관해 토론하며 커피도 마실 수 있는, 미술관보다 진입 장벽이 낮은 미술 전시장이었습니다.
최근 선보인 ‘GRIB’ 시리즈는 당신의 이전 작품들과 조금 다릅니다. 아무래도 늘어난 낙서 때문이겠죠?
‘GRIB’은 프랑스어로 ‘Gribouillage(그리부야주, 갈겨쓴 글씨)’를 뜻합니다. 작품에 낙서가 많긴 해도 그리 놀랄 일은 아닙니다. 제가 1979~1983년에 발표한 초기 작품 ‘Indeterminate Lines(비결정적 선)’와 상당 부분 닮았으니까요. ‘GRIB’과 ‘Indeterminate Lines’는 둘 다 낙서(Doodle)의 형태를 띱니다. 물론 ‘GRIB’이 더 단순하고 벽에 붙어 있는 부조의 형태를 띠긴 하지만요. ‘Indeterminate Lines’가 두꺼운 강철을 잘라 연필로 갈겨쓴 선처럼 보인다면, ‘GRIB’은 35mm 강판을 절단기로 정교하게 자른 조각을 즉흥적으로 배열한 겁니다. 단순해 보이지만, 꽤 복잡한 작업을 요구합니다.
작품이 주로 진한 구릿빛을 띱니다. 단순히 철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런 건가요?
오랜 시간 제 조각 작품은 재료 자체의 색을 유지해왔습니다. 이전의 제 작품이 주로 구릿빛으로 보인 건 철을 외부로 노출시켜 산화작용을 거친 결과였죠. 하지만 최근의 ‘GRIB’ 시리즈는 이전 작품보다 조금 어두운 편입니다. 주로 실내에 설치하는 작품이라 산화작용이 거의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죠. 사실 작품의 색은 저에게 주요 관심 대상이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저는 실제에 가깝게 스케치하지만, 색은 그와 반대로 신경 쓰지 않는 편이죠.
1 195.5° Arc x 18, 2012 2 지난해 로스엔젤레스에 있는 에이스 갤러리에서의 개인전, 다양한 ‘Indeterminate Lines’ 작품이 전시돼 있다.

에이스 갤러리의 개인전 당시 ‘GRIB’ 작품들이 전시돼 있는 모습
철로 작업을 하는 이유가 있나요?
1960년대에는 오직 수학적 도표와 학술적 정보만 탐구했습니다. 수학적 도식을 보면 빈번히 선과 그래프화한 방정식이 나오는데, 사실 당시엔 그런 개념을 철 조형에 녹여낼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1976년 5년간 휴식을 취한 후 다시 작업을 시작하면서 아주 단순한 수학적 각도와 곡선 등을 사용했습니다. 그때 제가 확신한 건 앞으로는 선이 제 작업의 중심 소재가 될 거라는 점이었습니다. 그건 아주 자연스러운 흐름이었죠. 이후 저는 나무와 철을 이용해 다양한 방법으로 공간을 채우는 공부를 했습니다. 그러다 결국 철을 택하게 됐죠.
그런데 왜 하필 수학이었나요? 수학에 재능이 있습니까?
저는 수학에 전혀 소질이 없습니다. 하지만 작품에 수학을 적용하기 위해 수학을 잘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세잔도 식물학자가 아닌데 꽃과 나무를 즐겨 그렸고, 카지미르 말레비치 또한 기하학자가 아닌데도 원과 사각형, 삼각형을 그렸죠. 이런 걸 알아야 합니다. 동시대 작가들이 과거 유명 작가의 작품을 모방하길 원치 않는다면, 그들의 활동에서 무관한 학문의 도입이 또 다른 지식과 가능성을 확장할 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저는 제가 이해하지 못하는 분야에 매력을 느낍니다. 수학도 제가 이해하기 힘든 분야여서 고도의 추상화나 조각으로 표현할 수 있었던 겁니다.
당신은 작품 제작에 앞서 ‘개념’을 먼저 설정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심지어 주관적 해석이 개입할 수 없는 단 하나의 이미지가 단 하나의 객관적 사실을 드러내는 ‘단의성(Monosemy)’이란 개념을 미술에 도입했죠. 하지만 당신의 작품은 때로 몹시 어렵습니다. 단의성이란 개념으로 만든 작품은 쉽고 단 하나의 뜻으로 해석돼야 하는 것 아닌가요?
우선 개념을 먼저 설정하고 작품을 만든다고 한 제 발언을 정정하고 싶습니다. 저도 다른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즉흥성과 직관에 입각해 작품을 만듭니다. 그러면서 생각지도 못한 가능성을 발견하기도 하고요. 단언컨대 이론은 경험에 앞설 수 없습니다. 하지만 작업이 발전해가는 동안 이론은 분명히 정립됩니다. 저는 제 작품에 객관성, 합리성, 단의성이란 개념이 자연스럽게 녹아들길 원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미술 작품이 그런 방향성을 띨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예술은 엄격한 규칙에 따라 기하학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한 몬드리안의 생각도 무척 어리석다고 느끼는 사람입니다. 예술은 자유의 영역이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놀라움을 기대할 수 있는 겁니다.
1970년대 초반 5년 동안 작품 활동을 전혀 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저는 오랫동안 예술이 새롭고 급진적인 패러다임의 단계에 존재한다고 주장해왔습니다. 시장을 만족시키기 위한 변화나 타인에게 인정받기 위해 하는 예술가의 어떤 활동에도 반대해왔죠. 제가 당시 작품 활동을 중단한 건 작품에서 자아를 지워버리려는 실험이 더 나아갈 데 없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1 미국 플로리다 주 아이즐워스 컨트리 클럽에 있는 자신의 작품 ‘220.5° Arc x 24’ 옆에 선 베르나르 브네
2 자신이 디자인한 부가티 베이론 그랜드 스포트 앞에서 용접 작업을 하고 있는 베르나르 브네
주로 어떤 음악을 듣습니까? 수학에 관심이 많다고 하니, 클래식이나 전자음악을 좋아할 것 같은데요.
1970년대 초반에 만든 소프트 록이나 클래식, 전자음악을 모두 좋아합니다. 콘크리트 뮤직(자연계의 음을 녹음·합성해 만든 음악)도 즐겨 듣죠. 사실 저는 조각 작업과 함께 작곡도 꾸준히 해왔습니다. 그중 몇 곡은 이미 CD로도 발매했습니다. 1966년에 작곡한 곡 중 하나는 1988년 파리에서 오페라로도 공연됐죠.
한때 파리 소르본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교육자로서의 경험은 어땠나요?
솔직히 말하면 전 제가 알고 있는 지식을 누군가에게 전달하는 것보다, 스스로 무언가를 배우고 그 시간을 활용하는 걸 선호합니다. 학생을 가르치는 건 분명 소중한 경험이지만, 제 성격과는 맞지 않았습니다. 언젠가 뉴욕 시각예술 학교(Scool of Visual Arts, New York)에서 교수로 초청하기도 했지만 거절했습니다.
자동차에도 관심이 많은가 봅니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스포츠카로 알려진 ‘부가티 베이론 그랜드 스포트’를 디자인했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저는 자동차광입니다. 특히 최신 스포츠카에 관심이 많죠. 오래전부터 자동차의 혁신적 기술과 비범한 디자인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카티나 람보르기니와 친밀한 관계를 맺었고, 종종 그들의 차를 운전할 기회를 얻습니다.
언젠가 에드가르 모랭(Edgar Morin)의 책만 읽는다고 했습니다. 에드가르 모랭은 당신을 어떻게 변화시켰나요?
에드가르 모랭은 프랑스의 저명한 사회학자이자 철학자입니다. 그가 대중의 이해를 돕기 위해 정립한 몇몇 이론과 제 작품(퍼포먼스 작품 ‘Accident(사고)’를 비롯한 몇몇 조각 작품)은 상당 부분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에드가르 모랭의 책은 제 작품을 이해하는 데 분명 도움이 될 것입니다.
지금 진행하고 있거나 계획 중인 프로젝트에 대해 알려주세요.
프랑스와 독일에서 거대한 조각품을 만들고 있습니다. 직선과 곡선, 모호한 선에 대한 작업을 동시에 진행하고 있죠. 많은 노력과 시간이 들어간 프로젝트로 곧 사람들에게 선보일 예정입니다.
베르나르 브네 개인전
오는 5월 프랑스 출신의 개념주의 미술가 베르나르 브의 개인전이 갤러리현대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에선 브네의 전 작업 세계를 아우르는 회화와 신작 ‘GRIB’ 시리즈, 다수의 드로잉 작품이 소개될 예정이다. 문의 2287-3500
에디터 이영균 (youngkyoon@noblesse.com)
사진 제공 갤러리현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