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tween Passion and Calmness
내 뮤지컬 시장에서 박은태는 흥행 보증수표다. 반복해서 공연을 찾는 열성 팬이 가득하다. 특유의 미성과 열정적인 연기로 보는 이를 매혹하는 그도 무대에서 내려오면 일상의 고요한 남자가 된다. 열정과 고요 사이를 천진하게 오가는 그의 매력을 탐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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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무대에 집중하다가 작년 후반부터 운신의 폭이 넓어졌다. <라디오스타>, <더 마스터-음악의 공존>,〈sbs연기대상〉축하 공연까지. 평소의 박은태를 생각하면 조금 놀라운 일이다. 뮤지컬은 연습부터 실제 공연까지 몇 개월 이상 집중해야 하는 장르다. 짧은 호흡의 공연은 내 성격과 잘 맞지 않는다. 그래서 지금까지 뮤지컬 무대 이외의 활동을 주저한 건 사실이다. 특히 즉흥적 예능감이 부족하다고 느껴 방송 출연은 삼가고 있었다. 하지만 방송을 계속 피하는 것도 그렇고, 기회가 되면 한 번쯤 도전해봐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더 마스터-음악의 공존>에서는 뮤지컬 배우 본연의 모습이 잘 나타났다. 출연을 결정할 때 한 가지 기준이 있었다. 뮤지컬 배우의 정체성을 잃지 않는 선에서 프로그램에 참가하고 싶었다. 나는 한 가지에 집중하는 스타일이라 뮤지컬 말고 다른 엔터테이너 역할을 겸하는 건 못하겠더라. 그래서 <더 마스터-음악의 공존>에도 ‘뮤지컬 마스터’라는 명칭으로 출연했다.
총 네 번 무대에 섰는데 후반에는 아예 뮤지컬에 등장하는 노래 ‘넘버’로만 승부했다. 처음에 프로그램 작가들이 뮤지컬 넘버만 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했다. 뮤지컬 마스터로 출연하지만 대중성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중적이고 익숙한 노래를 뮤지컬스럽게 부르는 게 어떻겠느냐는 부탁을 받기도 했다.
뮤지컬스럽게 부른다는 게 뭘까? 대중이 뮤지컬 배우를 바라보는 시선이 있다. 노래에 감정이 짙게 실려서 대사처럼 처리하는 모습 말이다. 한마디로 좀 과잉해서 노래하는 모습을 말하는 것 같다. 대중가요를 뮤지컬스럽게 부르는 건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러면 단발성 퍼포먼스로 그칠 수밖에 없다.
뮤지컬 넘버의 본질적 특성 때문인가? 엄밀히 말하면 뮤지컬의 메인 넘버는 영화의 클라이맥스와 비슷하다. 시간이 지나면서 극 중 드라마가 켜켜이 쌓이고 관객이 배우의 감정선을 따라가다 메인 넘버를 만났을 때 비로소 감동하는 것이다. 처음 극을 시작할 때 앞으로 펼쳐질 드라마를 미리 알려주면서 뒤에 나오는 넘버를 살리는 기능을 하기도 한다. 곧 뮤지컬 전체를 염두에 둘 때 각 넘버가 나름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내가 욕심이 많아서 그런지 뮤지컬 마스터라는 타이틀로 참여하는 거라면 새로운 도전의 개념이 아니라 뮤지컬 배우로서 가장 잘할 수 있는 장면을 보여주고 싶었다. 6~7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뮤지컬을 처음 보는 사람들이 노래뿐 아니라 배우가 이끌어가는 스토리의 여정에서 감동을 느낄 수 있도록 무대를 짰다.
2006년 시키 극단의 <라이온 킹>으로 데뷔할 때 앙상블로 시작했다고 들었다. 뮤지컬에는 남녀 주연배우와 조연배우가 있고 앙상블이 있다. 영화로 치면 단역 같은 건데 뮤지컬에서는 개념이 좀 다르다. 앙상블은 굉장히 중요하다. 어워드에 앙상블 부문이 있을 정도다. 영화에서 행인1, 경찰1이 단역이라면 뮤지컬에서 앙상블은 전체 합창을 담당하는 사람들이다. 남녀 솔로가 노래를 부른 후 앙상블이 뒤편에서 합창을 하곤 한다. 앙상블 중 대사가 있는 경우도 있고, 춤을 엄청 추기도 한다. 당시 <라이온 킹>에서는 댄서 앙상블, 싱어 앙상블이 따로 있었다. 나는 싱어 앙상블로 오디션을 통과한 경우다.
한양대학교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강변가요제에서 상을 탄 가수 지망생이었는데. 가수가 되고 싶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노래할 수 있는 기회를 잡기 위해 뮤지컬 오디션에 지원했는데 다행히도 싱어 앙상블이 따로 있었다. 만일 전체 앙상블을 뽑는 오디션이었으면 떨어졌을 거다. 뮤지컬을 시작할 당시 이미 기존 배우들과 엄청난 격차가 있었기 때문에 누군가를 따라잡겠다는 생각보단 계속 배우면서 천천히 올라가겠다고 마음먹었다. 어차피 실력은 갑자기 늘지 않으니까. 오디션에서 떨어진 일도 많지만 계속 앞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려 했다. 지금 생각하면 늦게 시작한 게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
강심장이다. 늦게 시작한 건 정말 늦은 거라는 말도 있지 않나. 스스로 배수의 진을 쳤다. 당시 스물여섯 살이었는데 5년 안에 어떤 결과를 내지 못하면 그때 가서 인생을 다시 진지하게 고민하려 했다. 근데 그 결과라는 게 눈에 명확히 보이는 수치나 돈, 배역을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 만일 특정 목표를 세우면 그걸 이루지 못했을 때 얼마나 실망이 크겠나. 결과라는 건 결국 스스로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일종의 잣대였다. 5년이란 시간 동안 역량이 늘지 않으면 그때 가서 다시 생각해보더라도 지금은 일단 해보자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 5년 동안 엄청난 일들이 일어났다. <라이온 킹> 이후 <노트르담 드 파리>에서 그랭구아르 역을, <햄릿>에서 레어티스 역을 맡았다. 그리고 <모차르트!>에서 처음으로 주연을 경험해봤다.
그런 커리어가 뮤지컬계에선 결코 흔치 않은 경우라고 알고 있다. 일례로 앙상블로 갓 데뷔해 두 번째 작품에서 중요한 조연을 맡은 것만 해도 보통 일이 아닌 것 같은데? 지금 생각하면 운이 너무 좋았다. 그때만 해도 외국 뮤지컬, 예를 들어 <레미제라블>, <미스 사이공>, <오페라의 유령> 같은 작품은 외국 연출자가 국내 공연에서도 전권을 행사했다. 내 두 번째 작품 <노트르담 드 파리>도 그런 경우였다. 그들이 생각하는 전체 그림에 맞는 사람들을 오디션을 통해 뽑았는데, 이게 사실 쉬운 일은 아니다. 티켓 매출, 배우의 인지도, 뮤지컬 마니아의 반응 등 현실적 문제를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근데 당시 프랑스에서 온 연출 팀은 기존의 네임 밸류를 생각하지 않고 오디션을 진행했다. 그런 경우가 굉장히 드물었다. 나도 목소리가 미성이라 그랭구아르 역에 잘 맞는다고 생각해서 뽑힌 것 같다. 보통 뮤지컬 오디션은 마이크 없이 퍼포먼스를 하면서 노래를 부르는데 <노트르담 드 파리>는 프랑스에서 가수들이 출연한 작품이라고 마이크를 쓰라고 하더라. 나에겐 생각지 못한 행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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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 이후 수많은 작품에서 주연을 맡으며 박은태 전성시대를 열었다. <햄릿>, <황태자 루돌프>, <엘리자벳>,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지킬앤하이드>, <프랑켄슈타인> 등에 이어 지난해에도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 <벤허>를 하며 바쁘게 보냈다. 자신을 성장시킨 특정 작품에 대한 애정이 남다를 것 같은데…. 과거에는 그런 작품마다 의미 있는 타이틀을 붙이곤 했지만, 지금은 특정한 의미를 부여하는 게 큰 의미가 없다고 느낀다. 모든 작품이 힘들고 어렵다. 인고의 시간이 필요한 건 당연하고 모두 애정이 남는다. 요즘도 <닥터 지바고>를 준비하면서 느끼지만 매 작품에 임할 때마다 벽돌을 하나씩 쌓는 느낌이다. 내 마음속에 배역을 하나씩 쟁여놓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더 다양한 작품에 도전하고 싶어진다.
2월 27일에 막을 올리는 <닥터 지바고>에는 어떻게 참여하게 됐나? 솔직히 말하면 스스로에게 상을 주고 싶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작품이다. 그 전까지는 나에게 잘 맞는 작품을 선호했다. <닥터 지바고> 초연을 보지 못한 입장에서 초연에 참여한 배우들이 한결같이 너무 좋았다고 말하는 거다. 무척 행복했다고. 실제 출연 제의가 들어온 후 대본을 읽어보고 음악을 계속 들어본 뒤에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확 들었다. 특히 배우 입장에서.
배우 입장에서 재미있다는 건 무슨 뜻인가? <닥터 지바고>는 우울한 작품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아련하게 우울하다. 자극적인 요소도 없다. 외형이 강렬하거나 폭발적인 에너지를 보여주는 작품도 아니다. 게다가 주인공 유리 지바고는 갈등을 굉장히 깊게 하는 인물이다. 러시아혁명의 소용돌이가 일던 때라 분위기도 밝지 않다. 그런데 그 안에 아름다움이 존재한다. 배우로 참여하면 찌릿찌릿한 경험을 할 수 있겠다는 느낌이 왔다. 같이 출연하는 배우들도 좋아서 그들과 함께하면 행복하게 연습할 수 있겠다는 믿음도 있었고. 아니나 다를까 지금 매우 행복하게 작품을 준비하고 있다. 주인공이라고 용 쓰며 작품을 끌고 가는 게 아니라 작품 그 자체에 푹 젖을 수 있다. 그게 너무 행복하다. <닥터 지바고>는 내가 잘하지 못할 수도, 내가 잘하는 스타일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배우 입장에서는 흥미로운 작품이다. 계속 이런 작품을 기다리고 있었다.
레슨을 너무 많이 받는다.(웃음) 연기 레슨은 그렇다 쳐도 가창력에선 우리나라 톱으로 꼽히는 뮤지컬 배우가 성악 레슨을 끊임없이 받는 이유는 무엇인가? 노래는 근육 싸움이라고 생각한다. 운동을 하지 않으면 근육이 약해지고 꾸준히 하면 건강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뮤지컬은 최상의 컨디션을 계속 유지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무척 크다. 일단 시작하면 한 달이고 두 달이고 공연을 해야 한다.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 레슨을 계속 받는다.
하긴 뮤지컬 배우에겐 몸이 재산이다. 이런 삶이 불편하지 않나? 이제야 좀 익숙해졌다. 숙명으로 받아들였다. 개인적으로 감히 컨디션을 떨어뜨리는 행동을 하기가 쉽지 않다. 목소리도 미성이고 완벽주의 경향도 있어서 더 그렇다. 무대에 오르기 직전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 오는 그 불편한 느낌이 무척이나 싫다. 그런 스트레스가 마음 내키는 대로 놀 때 느끼는 행복감보다 크게 와 닿는다. 대극장에서 공연하면 VIP석은 보통 10만 원이 넘는다. 관객들은 그런 공연을 예매하고 기다렸다가 기대를 한껏 품고 공연장에 온다. 만일 배우의 컨디션이 좋지 않으면 반응이 가차없이 싸늘해진다. 그들도 내 상태를 바로 알아차린다. 그래서 매번 같은 무대에 오른다고 해도 그런 공포감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인터뷰를 하다 보니 박은태에게 뮤지컬 말고 일상생활이 있는지 궁금해진다. 뮤지컬 배우 박은태와 일상의 박은태는 어떻게 다른가? 뮤지컬 배우로서는 완벽주의 경향이 강하다. 하지만 일상의 박은태는 완전 허당이다. 청소도 잘 못하고 컴퓨터도 잘 못하고 휴대폰을 새로 사도 기능을 잘 모른다. 기계치다. 말하고 나니 할 줄 아는 게 뮤지컬밖에 없는 것 같네.(웃음) 물론 다른 일도 한다. 뮤지컬과 정반대되는 일. 추리소설을 본다든지, 가만히 멍 때리고 있는다든지.
뮤지컬 배우로서 혹시 목표가 있나? 특정 공연이나 캐릭터가 욕심나진 않는다. 다만 건강한 컨디션으로 오래도록 뮤지컬을 하고 싶다. 뮤지컬 배우로서의 지속 가능성이랄까. 요즘 공연을 시작할 때면 무탈하게 무사히 끝마치길 바란다. 최근 데뷔 10주년 행사를 했는데 20주년이 됐을 때도 큰 사고 없이 무대를 잘 지키고 싶다. 큰 역할이든 작은 역할이든 최선을 다해 임한다는 말을 듣고 싶다.
에디터 전종현(harry.jun@noblesse.com)
사진 Robin Kim 헤어 이영재 메이크업 하나 스타일링 이경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