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igns for Reading
새롭게 디자인하고 재편집한 책이 제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감각적인 옷을 입고 소장 가치를 끌어올린 요즘 북 디자인 트렌드에 관하여.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_알록달록한 그래픽 도형을 그린 띠지를 두른 책은 열린책들 창립 30주년을 기념한 대표 작가 12인 세트 중 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 파란색 바탕에 타이포그라피가 돋보이는 책은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한 <셰익스피어 전집>, 여행지에서 모은 이미지를 이어붙인 알랭 드 보통 <여행의 기술>, 귀여운 시계 아이콘으로 포인트를 준 책은 한빛비즈에서 출간한 <미라클 모닝>, 강렬한 레드와 그린의 조화가 멋스러운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노르웨이의 숲>, 화사한 옐로 컬러 표지는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중 살만 루슈디의 <한밤의 아이들>, 웹툰 작가 s_owl이 그린 만화 같은 표지는 <미움 받을 용기>
얼마 전 책 한 권을 구입했다. 분명 책장에 꽂혀 있는 작품인데 하나 더 들였다. 다른 얼굴로 돌아온 무라카미 하루키의 대표작 <노르웨이의 숲>이다. 1987년 초판본을 재해석해 새로운 디자인의 양장본으로 5000부 한정 출간한 리미티드 에디션. 기존 책과 내용은 동일하지만 무라카미 하루키가 직접 지정했다는 강렬한 레드와 그린 컬러의 그러데이션 표지가 인상적이다. 표지만 바뀌었을 뿐인데 단숨에 인기 신간 리스트에 올라섰다.
과거에 책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주로 쓴 방법은 띠지를 교체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최근 출판계는 표지를 새롭게 디자인하거나 내용을 재편집한 특별판을 쏟아내고 있다. 출판사와 인터넷 서점의 협업을 통한 마케팅 상술이라고 비난하는 이들도 있지만 잊힌 고전이 새 옷을 입고 다시 주목받는 건 분명 긍정적인 일이다. 감각적인 디자인에, 한정 수량 인쇄해 소장 가치까지 더했다.

이집트 벽화처럼 2차원의 그림으로 표현한 <이갈리아의 딸들>
특별히 선택받아 환생한 책을 모아놓고 보니 먼저 아기자기한 스타일의 표지가 눈에 띈다. 책을 팬시 상품처럼 받아들이는 20~30대 여성의 감성을 좇아 갖고 싶을 만큼 예쁘게 디자인하는 추세. 1977년에 출간한 이후 페미니즘의 고전으로 자리 잡은 <이갈리아의 딸들>도 그 중 하나. 새 커버를 기획한 출판사 황금가지의 김다희 디자이너는 “책 내용을 함축한 상징적 이미지로 표현한 이전 표지와 달리 구체적인 묘사를 해보면 어떨까 생각했습니다. 이갈리아 나라에 사는 움과 맨움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담아내고, 실제로 존재하는 세상 같은 느낌을 주기 위해 이집트 벽화처럼 2차원의 그림으로 표현했죠. 주로 사용한 보라색, 녹색, 흰색은 영국의 여성 참정권 깃발 색을 떠올렸고요.”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과 지난해에 가장 많은 독자가 읽은 자기 계발서로 꼽힌 <미라클 모닝>도 이전보다 아기자기한 표지로 주목받았다. <여행의 기술>은 유적지의 벽, 바닥, 하늘, 풀 같은 이미지를 이어 붙이고 군데군데 파스텔 컬러를 가미해 예쁜 선물 같은 느낌이며, <미라클 모닝>은 다양한 시계 아이콘을 활용해 어둑한 새벽을 깨우는 미라클 모닝의 의지를 귀엽게 표현했다.
유명 일러스트레이터나 웹툰 작가와 손잡고 이색 컬래버레이션을 펼치기도 한다. 열린책들은 창립 30주년을 기념, 대표 작가 12명의 작품을 골라 1만 세트 한정 판매한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등이 그 주인공. 분량 때문에 여러 권으로 나뉜 책은 기념판을 위해 한 권으로 묶었고, 책마다 주제를 형상화한 원색의 그래픽적 도형을 그린 널찍한 띠지를 둘렀다. 이것을 벗기면 뒷표지에는 유명 일러스트레이터의 작품이 숨어 있다. 뉴디자인협회(Society for New Designs)에서 수여하는 최고상을 세 번 받은 스페인의 대표적 일러스트레이터 페르난도 비센테(Fernando Vicente)가 각 작가의 특징을 살려 익살스럽게 묘사했다. 역대 최장 기간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용기’ 열풍을 일으킨 <미움 받을 용기>는 4가지 다른 스타일의 표지를 선보였다. 만물상, 김경, 이은재, s_owl까지 인기 있는 웹툰 작가가 참여해 4인 4색 표지를 완성했다. 희망과 용기의 메시지를 전하는 그림을 그렸는데, 저마다 자신의 웹툰 속 한 장면을 옮겨온 듯 뚜렷한 개성이 돋보인다.
책의 아이덴티티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간결하지만 세련된 타이포그래피를 적극 활용한 케이스도 돋보인다. 문학동네에선 세계문학전집 중 <롤리타>, <한밤의 아이들>, <불안의 책>을 리커버로 출간했다. 각각 네온 핑크, 옐로, 블루 컬러로 물들인 강렬한 색감과 타이포그래피가 시선을 끈다. 타이포그래피는 바스커빌(baskerville)이라는 서체로 원서 제목을 재조합한 것. 바스커빌은 곡선이 우아하면서 정교하고 수직적인 요소로 인해 고전적 아름다움을 잘 보여준다.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한 <셰익스피어 전집>은 여러 권의 단행본으로 출간하던 전집을 한 권으로 묶어 완전히 새로운 책을 만들었다. 셰익스피어 서거 400주기를 기리며 <햄릿>, <오셀로>, <리어 왕> 등 44편에 이르는 전 작품을 1808페이지에 달하는 한 권의 책에 담았다. 표지를 디자인한 북 디자이너 박연주는 고전에 주로 쓰는 레드보다 현대적이면서 영국적 이미지가 강한 블루를 선택하고 금색을 포인트 컬러로 사용했다고 밝혔다. “컬러를 통해 현대적 느낌을 살렸다면 그래픽 요소로 패턴을 사용해 고전의 품격을 유지하려고 했어요. 표지에 들어간 타이포그래피는 캐슬론(caslon) 서체에 셰익스피어가 활동한 엘리자베스 시대의 의복을 모티브로 패턴을 만들어 결합했습니다.”엄청나게 많은 원고량 때문에 책은 두꺼워질 수밖에 없었는데, 이런 제약을 오히려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그녀는 책머리와 책배에 목차를 인쇄했다. 이 책이 국내 최초로 셰익스피어의 전 작품을 모은 기념비적 책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표지를 바꾼다고 책이 잘 팔린다는 보장은 없다. 더 많은 사람이 읽는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하지만 오랜 세월에 걸쳐 입증된 양질의 책이 현대적 감각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은 분명 독자에게 신선한 매력을 어필한다.
에디터 문지영(jymoon@noblesse.com)
사진 김흥수 모델 김희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