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SLETTER

노블레스 매거진의 뉴스레터를 신청해보세요.
트렌드 뉴스와 이벤트 소식을 가장 빠르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닫기

EDITOR TASTE

MEN

남자의 사물엔 삶이 담긴다. 취향이나 성향은 물론 세상을 대하는 태도까지 보인다. 우리가 탐낸 물건은 아마 그가 가졌기에 더욱 빛났을지도 모른다.

제 꿈은요
근래 라이트 형제의 삶을 다룬 책을 읽었다. “꿈이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면, 꿈만 좇는 바보처럼 보여도 좋을 것이다.” 유명한 명언이지만 새삼 깊이 와닿았다. 책을 읽으면서 잠시나마 어린 시절 추억에 잠겼다. 누구에게나 꿈이 있듯 나 역시 그랬다. 나의 장래 희망은 축구 선수. 코 찔찔이시절 놀이터에서 공을 가지고 놀던 기억이 좋았는지, 축구공을 돌잡이로 잡아서 그런지, 어찌 됐건 나는 초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선수로서 첫 번째 출발선에 섰다. 어느 날 훈련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던 중 친구 한 명이 대뜸 휴대폰을 들이밀었다. 영상 속 인물은 차범근으로 1980년대 한국인 선수로는 최초로 독일 프로축구 리그 분데스리가를 정복한 사나이다. 그의 플레이를 보고 있자니 감탄이 절로 나오는 동시에 유독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이 있다. 아디다스 코파문디알이 그 주인공. 무척이나 갖고 싶었다. 차범근의 훌륭한 플레이가 실력의 8할이라면 이 신발의 유려함이 나머지 2할의 볼 컨트롤을 지지해주는 듯했다. 심지어 캥거루 가죽 소재다. 잔디 위를 90분 동안 종횡무진해도 아무것도 신지 않은 듯 가볍고 편할 수밖에! 결국 부모님을 조르고 졸라 축구화를 샀고, 그렇게 축구 선수가 되는 듯했으나 결국은 결승선을 넘지 못했다. 비록 지금은 새로운 길을 가고 있지만 여전히 축구화를 보면 당시 기억이 소환된다. 내 인생 가장 날쌔고 뜨거웠던 그 순간 말이다. 에디터 현국선

은발 소년의 마르지엘라
머릿속이 복잡해 비워내고 싶거나 반대로 어떤 상상을 하고 싶을 때면 류이치 사카모토의 연주를 찾아 듣는다. 그의 팬이라기보다는 가사가 없는 피아노 연주곡의 여백이 좋아서다. 그를 전혀 알지 못했던 나는 최근에야 조금 더 알게 되고 좋아하게 됐다.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라는 다큐멘터리 한 편 때문이다. 전자음악 밴드 YMO 결성과 1980년대의 미국 활동, 배우 등 그의 이력도 물론 새로웠지만, 가장 좋은 점을 꼽자면 천부적 예술가임에도 여전히 탐구심 넘치는 그의 청년 같은 아름다움. 남극에서 빙하가 녹는 소리를 채집하거나 나뭇잎을 즈려밟을 때 번지는 소리와 새의 지저귐 모두 음악이라며 미소 짓는 모습 말이다. 잘 깎은 연필을 올려둔 작은 트레이와 책장에 꽂힌 수많은 책, 적재적소에 근사한 가구와 악기가 놓인 그의 일상도 미학적이다. 그곳에서 쉬고 음악을 만드는 그의 담담한 하루를 엿볼 수 있다. 주름진 은발 소년은 비 오는 어느 날 테라스에 나가 플라스틱 통을 뒤집어쓴 채 빗소리를 들었다. 니트 카디건을 입은 등 뒤로 4개의 굵은 스티치가 눈에 띄었다. 1952년생, 살아온 삶의 방식과 내면이 겉으로 발현한다는 노년의 시기. 마르지엘라를 입은 류이치 사카모토의 시간은 거꾸로 가는 듯하다. 에디터 정유민

성장의 종착지, 픽업트럭
20대 후반에 할리데이비슨 48이 갖고 싶었다. 순전히 불사의 능력과 아다만티움 클로로 악을 썰어대는 히어로 울버린 때문이었다. <엑스맨의 탄생: 울버린>에서 그는 1964년형 할리데이비슨을 탄다. 단출한 가방 하나와 가죽 재킷 한 벌로 세상을 떠돈다. 헐벗은 그의 자유는 시속 100마일로 질주하는 바이크와 절묘하게 어울렸다. 혈혈단신으로 세상과 맞서는 그 태도가 부러웠다. 울버린의 마지막 영화 <로건>에서 그는 크라이슬러 300 리무진을 몬다. 늙고 병든 찰스 자비에를 부양하기 위해 타이를 매고 운전기사를 한다. 그 모습이 주름진 휴 잭맨의 눈가보다 씁쓸했다. 언제 어디로든 떠날 수 있던 두 바퀴가 밥벌이와 부양이란 족쇄에 묶여 크롬으로 도배된 세단 운전석에 놓인 것이다. 남자의 숙명 같은 걸 지켜보는 느낌이었다. 그나마 위안을 얻은 건 로라를 만난 뒤다. 울버린은 그녀를 약속의 땅으로 데려다주기로 마음먹고 중고로 닷지의 픽업트럭 램 1500을 산다. 몬스터라 불리는 8기통 트럭은 옥수수밭을 갈아엎고 장갑차를 전복시키며 화려하게 질주한다. 청춘의 울버린이 할리데이비슨으로 대변된다면 노년의 그는 요새 같은 8기통 픽업트럭을 몬다. 자유와 스릴이 생략된 대신 누군가를 지키고 수행해야 할 의무감이 생긴 것이다. 난 그걸 남성성의 상실로 보지 않는다. 되레 이제껏 봐온 그의 모습 중 가장 용감했다고 생각한다. 내 위시리스트엔 이제 할리데이비슨 대신 닷지의 픽업트럭이 들어 있다. 내게 보호해야 할 사람과 지금보다 무거운 의무가 생긴다면 텐트와 낚시 도구를 닷지 위에 잔뜩 싣고 장기간 여행을 떠나고 싶다. 조금은 온순해진 울버린의 마음으로. 에디터 조재국

시공간을 초월한 두 디자이너의 하모니
최근 흥미롭게 읽은 일본 소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는 어느 노장 건축가에 대한 이야기다. 저 홀로 빛나는 요란한 건축물 대신 조화를 우선시한 겸손한 건축물을 지향하는 건축가. 자세히 들여다봐야 눈에 들어오는 사소한 디테일까지 섬세하게 배려하는 건축가가 국립도서관 설계 경합을 앞두고 여름 별장에서 보내는 시간의 흐름을 담은 소설에서 ‘책장’은 중요한 소재다. 건축가지만 책장의 곡선, 소재, 놓일 공간까지 사려 깊게 설계에 반영하는 까닭은 결국 도서관을 찾는 사람에게 작지만 다른 경험을 선사하기 위해서다. 숲을 보는 자가 나무 한 그루도 놓치지 않는 것. 작은 차이. 책을 읽으면서 언젠가 디자이너 오준식의 서재를 방문한 기억을 떠올렸다. 다독가로 알려진 그의 서재에서 말로만 듣던 거장 디자이너 디터 람스의 책장을 만났다. 애플 디자인의 기초가 됐을 만큼 20세기 디자인사를 떠들썩하게 한 것치고 디터 람스 디자인은 단순함의 극치다. 오준식의 서재에 들어서서 만난 검은색 책장에서 어쩐지 기운찬 힘이 느껴진 건 책을 지탱하고 있는 뼈대가 디터 람스 디자인임을 미처 깨닫기 전이었다. 벽면을 가득 채운 디터 람스 책장은 치밀한 균형감으로 공간 전체에 안정감을 부여하고 있었다. 책보다 책장이 드러나는 법이 없지만, 그렇다고 책 뒤에 숨어 있지도 않았다. 멋진 중용이었다. 거기에 아시아 문화에 관심이 많은 오준식의 취향이 담긴 책들이 적재적소에 꽂힌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오준식이 직접 디자인한 커튼의 밝은 면을 통해 살포시 스며든 빛에 반짝이던 서재. 책을 사랑하는 두 디자이너가 시공간을 초월해 만리동의 한 아파트에서 화합한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에디터 전희란

 

에디터 현국선(hks@noblesse.com), 정유민(ymjeong@noblesse.com), 조재국(jeju@noblesse.com), 전희란(ran@nobless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