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shion Talks
어느 때보다 ‘말이 많아진’ 디자이너들이 옷과 가방, 신발 곳곳에 글자를 새겨 넣었다.

스트리트 패션에 등장하던 로고와 레터링이 하이엔드 패션의 중심에서 유행을 이끌고 있다. 백 마디 말보다 단어 하나가 때론 더 큰 힘을 발휘한다는 사실을 아는 디자이너가 대중에게 메시지를 전하고자 선택한 방법이다. 디올 하우스 최초의 여성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는 첫 컬렉션에서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는 강렬한 문장을 프린트 한 티셔츠로 이슈를 낳았다. “패션은 늘 변화와 혁명을 추구합니다. 그리고 혁명은 여성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해요. 페미니스트이자 디올 하우스에 속한 여성으로서 저는 다른 방식으로 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개인적 신념을 드러내고 이에 동참할 것을 촉구하는 슬로건을 디자인에 응용한 예는 이외에도 많다. 정치적 성향을 거리낌 없이 밝히며 대선 후보를 지지하는 티셔츠를 만들고, 패션계를 비롯한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는 성차별에 문제를 제기해온 뉴욕 기반의 디자이너 프라발 구룽은 런웨이를 통해 자신의 발언권을 지키는 인물. 이번 시즌엔 여성의 인권 향상에 힘쓴 시인 에밀리 디킨슨의 작품에 등장하는 서정적 문장을 옷 위로 옮겨 이목을 끌었다.

1 바라간 2 스텔라 매카트니 3 준야 와타나베
한편 스텔라 매카트니는 ‘All is Love’, ‘No Leather’, ‘And No Fur’ 같은 짧은 구호를 그래픽적 의상 곳곳에 패턴으로 응용해 윤리적 디자이너로서의 면모를 강조했다. 지난해 9월 뉴욕 컬렉션으로 데뷔한 바라간(Barragan)은 성 소수자를 대변하는 런웨이를 펼쳤는데, 관능적인 드레스와 화려한 주얼리를 착용한 남성 모델들의 캣워크 중간에 등장한 ‘Lesbian’ 프린트 티셔츠는 디자이너의 의도를 충분히 짐작하게 한다. 사회적·정치적 견해를 밝히는 것 외에 컬렉션에 영감을 준 대상을 지칭하거나 암시하는 레터링도 눈에 띈다. 베를린을 여행하며 음악, 아트를 비롯한 유스 컬처에 깊은 인상을 받은 준야 와타나베는 그곳의 그라피티 크루와 협업한 감각적인 프린트에 독일어 단어를 버무린 펑키한 스트리트 룩을 선보였다.

구찌
각각 다른 시대, 지역, 스타일에서 영감을 얻어 이를 하나의 컬렉션으로 재해석한 구찌의 알레산드로 미켈레는 몇 시즌째 레터링에 심취해 있는 모습. ‘Blind for Love’라는 스크립트를 즐겨 사용하는 이 낭만주의자는 75벌의 룩 곳곳에 머릿속을 가득 채운 이미지와 평소 선호하는 것을 표현한 ‘Loved’, ‘Modern Future’, ‘Elton’ 같은 단어를 장식했다. 다채로운 서체와 컬러, 소재로 표현한 텍스트는 단순한 디테일을 뛰어넘어 디자인의 구심점 역할을 한다. 사카이의 치토세 아베는 팝 컬처의 상징적 인물, 이를테면 제인 버킨, 커트 코베인, 세르주 갱스부르 등의 음악과 스타일에서 영감을 가져왔는데 특히 영국의 록 뮤지션 조 스트러머가 입은 티셔츠에 새긴 문구 ‘Passion is a Fashion’을 패러디한 ‘Fashion is a Passion’ 티셔츠는 센스 넘치는 반전을 보여준다. 이처럼 도처에 등장한 레터링 룩은 자기표현의 수단이라는 패션의 속성을 떠올릴 때 가장 효과적인 옷 입기가 아닐 수 없다. “세상을 향해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다면 티셔츠에 커다란(giant) 글씨를 새기세요!” 1983년 최초로 컬렉션에서 슬로건 티셔츠를 선보인 디자이너 캐서린 햄넷의 말처럼 각종 이슈로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패션은 가장 근사한 돌파구가 되어줄 것이다.
에디터 이혜미(hmlee@nobless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