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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fts from Wonderland] ‘지금’이라는 원더랜드의 선물

FASHION

문득 지금 이 세상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원더랜드와 다름없고, 책 속의 이상한 나라도 현실의 축소판임을 알게 된다. 예상대로 진행되고 계획대로 실현하기 힘든, 소위 어른의 현실이 원더랜드가 아니고 어떤 공간이겠는가.

각종 상징과 은유, 패러디와 언어유희, 수학적 퍼즐로 넘쳐나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읽을 때마다 감탄을 자아낸다. 뼈 있는 위트에 입꼬리가 올라가기도 하고, 엉뚱하고 발랄한 궤변에 잠시 넋이 나가기도 하니. 훌륭한 동화나 우화는 다 큰 어른에게도 영향을 미치는데, 나의 리스트 첫 줄에 루이스 캐럴의 명작이 자리한 이유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경이로움 때문이다. 마시멜로 같은 말랑말랑한 언어와 당의정 같은 자세로 접근해 교화의 목적을 달성하는 옛날이야기가 아니다. 알레산드로 미켈레 뺨치는 판타지의 옷을 입고 있지만 곱씹을수록 현실감이 입안 가득 고여 번쩍 개안하게 하는 위력이 있다. 한 해의 마지막 달력을 응시하다 슬쩍 들춰본, 앨리스와 체셔 고양이의 대화가 대표적이다. 마하의 속도로 활강하는 시간 앞에 망연자실하고 있을 때 만난 이 대화는 언뜻 들으면 말장난 같다. 그러나 어느새 명의의 침처럼 혈 깊숙이 무언가를 찔러 넣었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고, 그러나 어디든 상관없다면, 그냥 계속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문득 지금 이 세상은 원더랜드와 다름없고, 책 속의 이상한 나라도 현실의 축소판임을 알게 된다. 3월의 토끼든 험프티덤프티든 정체 모를 존재가 현현히 눈앞에 나타나기도 하고, 성난 여왕의 불합리한 크로케 경기에 참여할 수밖에 없는 상황도 생긴다. 예상대로 진행되고 계획대로 실현하기 힘든, 소위 어른의 현실이 원더랜드가 아니고 어떤 공간이겠는가.
구순을 넘긴 외할머니가 그런 말씀을 하셨다. 동글동글한 인상의 호호 할머니와 달리 웃음이 적고 자세가 꼿꼿한 분이지만, 간혹 블랙유머와 지혜가 뒤섞인 농담을 선물처럼 옛다, 던지시곤 한다. “세상은 요지경이지. 너희가 좋아한 놀이공원 못지않아. 오르락내리락 혼을 빼는데, 일단은 그 탈것에 몸을 싣는 수밖에 방법이 없어. 그래도 결국 내려서 피곤하고 어질어질해도 재미있었다는 결론만 낼 수 있다면 된 거야.” 지혜로운 노인들은 100세 할머니 시인 시바타 도요처럼 용기와 상냥함을, 신경과 전문의이자 훌륭한 작가인 올리버 색스처럼 생생한 삶의 감각을 얻나 보다. 작고 좁은 어깨로 짊어졌을 당신의 굴곡진 세월을 놀이공원의 롤러코스터로 해석할 수 있다니, 그 자체로 경이로운 일 아닌가. 종종 삶에 배신당한 느낌이 들 때면 외할머니가 건네준 손목시계를 가만히 응시한다. 서랍 깊숙한 곳에서 불쑥 꺼내준 그것은 이미 고인이 되신 외할아버지에게 받은 선물이라 했다. 오래 묵은 기계식 시계가 내 손목의 움직임에 따라 째깍째깍 바늘을 움직이는 광경을 보면, ‘우화의 제왕’ 스펜서 존슨이 <선물>에 썼듯 누구에게나 주어진 ‘현재(present)’야말로 공평하고도 귀중한 ‘선물(present)’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다소 진부한 교훈이라고 코웃음 칠 수도 있지만, 1978년에 쓴 초고를 2003년에야 비로소 탈고했을 정도로 스펜서 존슨에게도 이러한 진리는 일순 깨치는 ‘돈오(頓悟)’가 아니라 점차 깨달음에 이르는 ‘점오(漸悟)’가 아니었을까.
그러니 대책 없이 흘러간 한 해를 처연히 바라보지 않기로 했다. 토끼굴에 여러 번 빠지기도 했고, 감정 역시 롤러코스터를 탄 듯 널을 뛰었지만 상관없다. ‘지금’이라는 선물, 그것을 늘 알려주는 손목시계를 나침반 삼아 걷다 보면 어디에라도 가 닿을 것이다. 겨우 남은 한 달이지만 그 시간 동안 그리핀과 유니콘이 사는 머나먼 나라로 가는 비행기 티켓을 손에 쥘 수도 있고, 붉은 여왕이나 하얀 여왕처럼 화려하게 단장하고 미친 모자 장수와 환상적인 티타임을 즐길 수도 있지 않을까. 이렇게 쓸데없는 공상을 머릿속에서 부풀리다 보니, 뻔뻔할 만큼 즐거워졌다.

 

에디터 김수진(suze@noblesse.com)
정유희(칼럼니스트 & 만화가, ‘EDITALL LAB’ 작업실 멤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