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od Girl, Reframed
모노크롬 회화를 통해 폭발하는 지금의 감각.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젊은 회화 작가 애나 박이 고향인 대구에서 첫 한국 개인전을 연다.
애나 박 1996년 대구에서 태어난 애나 박은 목탄과 아크릴을 주요 매체로 이미지 소비, 정체성, 여성성의 담론을 시각화해왔다. 뉴욕 아카데미 오브 아트에서 학사와 석사를 마친 그녀는 2019년 KAWS의 SNS 포스팅을 계기로 국제적 주목을 받았고, 이후 하프 갤러리(뉴욕), 블룸 갤러리(도쿄), SCAD 미술관(서배너), 서호주 미술관(퍼스) 등 전 세계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이어왔다.
이상화한 여성의 웃는 얼굴, 무표정한 응시, 프레임에 잘려나간 화면 속 반복되는 여성 이미지. 리안갤러리 대구에서 6월 28일까지 열리는 개인전 〈Good Girl〉을 통해 회화 작가 애나 박이 선보이는 모노크롬 회화는 광고와 인터넷 밈(meme), 영상 스틸 같은 익숙한 시각언어를 모티브 삼아 이상화한 여성성의 외피를 해체하고, ‘착한 소녀’라는 말에 덧씌운 사회적 기대와 감정적 무게를 새로운 감각으로 드러낸다.
애나 박은 뉴욕 아카데미 오브 아트 재학 중인 2019년 아티스트 KAWS가 오픈 스튜디오에서 ‘발견’한 그녀의 작품을 SNS에 소개하며 단숨에 국제 미술계의 이목을 끌었다. 데이비드 핀처 감독의 영화 〈맹크(Mank)〉 포스터 제작에 참여하고, 빌리 아일리시가 소장한 작품이 특별판 음반의 커버로 제작되는가 하면, 올해 초 세계적 갤러리 리만머핀의 최연소 전속 작가로 합류하는 등 차세대 미술의 키워드로 떠오르고 있는 애나 박. 그녀는 외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로 대화를 시작했다.
한국, 그것도 고향인 대구에서 개인전을 여는 소감이 궁금합니다. 비현실적인 기분이죠. 18년 전 미국으로 이주한 뒤 매년 한국에 오긴 했지만, 이렇게 전시를 통해 돌아올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어요. 이번 전시는 돌아가신 외할머니께 헌정하는 의미도 있습니다. 어린 시절 외할머니의 아름다운 자수를 보며 자랐고, 직접 만들어주신 인형들도 아직 간직하고 있어요. 제 예술적 감수성은 외할머니께 물려받았거든요. 살아 계셨다면 이 전시를 정말 좋아하셨을 거예요. 한국의 첫 전시를 꼭 대구에서 열고 싶었던 이유이기도 하고요.
‘Good Girl’이라는 전시 제목에는 여러 의미가 담겨 있을 것 같습니다. 말 그대로 ‘착한 소녀’라는 뜻도 있지만, 풍자적이거나 다소 건방진 표현일 수도 있겠죠. ‘여성으로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기대는 보편적이니까요. 여성스러움에 대한 고정관념도 분명히 있고요. 관람객이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으면서도 작품을 깊이 들여다보면 또 다른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제목을 의도했어요.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은 시대착오적일 정도로 이상화되어 있거나, 수동적인 모습입니다. 지금 그런 인물을 작품에 담은 이유가 궁금합니다. 우선 시각적으로 재미있었어요. 고전적 핀업 걸(pin-up girl) 같은 이미지 말이죠. 여성의 외형은 시대에 따라 변했지만, 그 바탕에 있는 여성에 대한 이상화 자체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느꼈어요. 그런 익숙하고 반복되는 이미지 안에 존재하는 위화감을 들춰내고 싶었죠.
화면에 삽입한 프레임이나 창(window) 등의 장치를 통해 어떤 효과를 의도했나요? 우리가 정보를 소비하는 방식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해요. 인터넷이나 SNS에서 많은 정보가 팝업 광고처럼 갑자기 튀어나오잖아요. 어울리지 않는 이미지가 콜라주처럼 섞이는 시각언어의 사용 방식이 제게는 자연스러웠어요. 하나의 이미지만 있는 화면보다 촉각적이고, 부조 같은 느낌도 들고요.
작품 속에 배치한 텍스트도 인상적인데, 어떤 계기로 넣게 되었나요? 몇 년 전 MoMA에서 열린 에드 루샤(Ed Ruscha)의 대규모 회고전에서 작가가 텍스트를 사용하거나 다루는 방식이 마치 소리나 색깔과 비슷하다고 느꼈어요. 언어와 이미지가 상호작용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거죠. 광고나 그래픽 디자인 분야에서 일하는 친구들이 있는데, 그들과 텍스트의 폰트나 디자인이 소비자의 심리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자주 이야기해요. 우리 주변의 모든 것에는 의도가 담겨 있어요. 그게 제가 텍스트를 도입한 이유입니다.
영화뿐 아니라 광고나 유튜브 영상, 밈 등 인터넷상의 이미지를 수집해 콜라주하듯 작품을 구성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수집한 이미지를 어떻게 선별하고 해체, 구성하나요? 항상 온라인에서 이미지를 검색해요. 전시도 많이 보러 다니고, 가끔은 몰래 사람들을 촬영하기도 하죠.(웃음) 어느 순간 특정 이미지에 끌리곤 해요. 단순히 사진 속 손이 너무 예쁘게 보인다거나 하는 사소한 이유 때문이죠. 그럼 관련된 이미지를 모두 출력해 주변에 흩어놓고 대략적 스케치를 한 뒤 제가 ‘뼈대’라고 부르는 구조물을 만들고 느낌대로 붙여요. 그런 다음 그림 그리는 과정은 좀 더 즉흥적인 편이죠. 마치 뇌의 서로 다른 부분을 사용하는 것 같아요. 구조물을 만드는 건 수학처럼 맞거나 틀리는 것이 있는 아주 정확한 작업이지만, 그림은 끝이 없는 열린 대화 같거든요. 언제 멈춰야 할지 알 수 없다는 점에서 굉장히 답답하기도 하지만요.
일반적으로 드로잉에 쓰는 목탄과 그라파이트를 페인팅 재료로 사용하죠. 어떤 특성에 매혹된 건가요? 성격이 급한 저와 아주 잘 맞는 재료예요.(웃음) 즉흥적이고, 마르길 기다리지 않아도 되니까요. 목탄은 나무가 타서 만들어지는 유기적 재료라는 점도 마음에 들고요. 요즘은 통제할 수 없는 우연적 순간을 더하고, 새로운 시각언어를 확장하고 싶어 아크릴이나 플래시 페인트 같은 재료도 함께 활용하고 있어요.
이번 전시를 통해 선보이는 작품에선 팝아트의 영향도 짙게 느껴집니다. 광고나 미디어를 통해 이미지를 수집하다 보니 자연스레 팝아트의 영향을 받게 되었죠. 휘트니 미술관에 있는 앤디 워홀 작품 중 코 수술 받은 여성을 그린 ‘Before and After, 4’가 기억 속에 아주 강하게 남아 있어요. 로이 릭턴스타인도 좋아하고, 바버라 크루거를 팝아티스트라고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도 좋아해요. 제 작품을 통해 그들과 대화하고 싶어요.
얼마 전 리만머핀의 ‘최연소’ 전속 작가가 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어요. 그런 타이틀은 낯설고 부담스러워요. 그저 매일 스튜디오에 가서 작업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해요. 예전에는 상상도 못한 일이거든요. 지금은 ‘다음엔 뭘 만들까?’라는 생각에만 몰두하고 있어요. 작가로서 제가 유일하게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니까요.
특별한 일정 없이 작업하는 하루는 어떻게 흘러가나요? 오전 10시까지 작업실에 가려고 하지만 실제로는 11시나 정오쯤 가는 경우가 많아요.(웃음) 새벽 1시나 2시까지 거기 있죠. 계속 집중해서 그림만 그리는 건 아니에요. 멍하니 있기도 하고, 음악도 듣고, 식물에 물도 주고…. 규칙적이진 않지만, 스튜디오에 있을 때 유일하게 ‘내가 뭘 하고 있는지 아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2019년 KAWS의 인스타그램 계정에 작품이 등장하며 순식간에 유명해졌죠. 미술 관계자와 컬렉터는 물론, 아티스트에게도 굉장히 중요한 매체이자 소통 수단이 된 SNS, 어떻게 활용하나요? 인스타그램이 없었다면 지금의 제 경력은 많이 달라졌을 거라고 확신해요. 저처럼 여러 나라에서 활동하는 사람에게 인스타그램은 중요한 연결 통로예요. 그러려면 지금보다는 제 계정(@annaparkart)에 더 많이 포스팅해야겠지만요.(웃음)
그림 그리는 것 외에 가장 몰두하는 일은 무엇인가요? 친구들과 탁구를 치러 가요. 작업은 끝이 없는 질문 같은 거라 명확한 규칙이 있는 활동에 끌려요. 퍼즐을 푸는 것도 좋아하죠. 목표가 뚜렷하니까요. 그림에서 벗어나 머릿속 스위치를 끌 수 있는 일이 필요하거든요. 작업과 관련된 것이라면 조각이나 설치 작업도 하고 싶고, 언젠가는 애니메이션이나 인형극도 해보고 싶어요.
이번 〈Good Girl〉 전시를 보러 온 관람객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궁금해요. 제 그림에 공감해줬으면 좋겠고, 그냥 재미있게 봐주셔도 좋아요. 특별한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 건 아니고, 저는 그저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니까요. 제 그림을 보고 자기만의 이야기를 찾아낸다면 더할 나위 없겠죠.
이번 전시 작품 속에 숨겨둔 작가님만의 이야기를 소개해주세요. 그림에 등장하는 금발과 검은 머리 여성은 각각 외면과 내면의 자화상 같은 존재예요. 장난기 많은 금발과 다소 냉소적이지만 현실적인 검은 머리. 겉으로는 외향적인 성격으로 보이지만, 사실 저는 혼자 작업할 때 가장 행복하거든요.
에디터 정규영(ky.chung@noblesse.com)
사진 리안갤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