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anny Silhouette
주름이 깊게 파인 할머니가 즐겨 입던 낡은 니트 베스트, 흑백사진 속 젊은 어머니의 리본 장식 블라우스와 무릎 아래까지 내려온 플레어스커트. 1970년대, 아련한 추억 속 복고 패션이 쌀쌀한 바람과 함께 찾아왔다.
Paul & Joe

Gucci

Etro

Miu Miu
유행은 소비된다. 공급이 빨라진 만큼 유행의 소비 기간 또한 짧아진다. 결국 옷걸이에 걸린 채 ‘입어달라’ 외치는 듯한 옷 위에는 주인의 손길 대신 먼지만 소복하게 쌓인다. 그래서인지 옷장에 옷을 가득 쌓아두고 옷이 없다고 말하는 딸과 새 옷이 든 쇼핑백을 끼고 들어온 그녀의 모습에 한숨짓는 엄마의 싸움에서 딸을 무작정 나무랄 순 없다. 그런데 올겨울, 딸들은 백화점 대신 나이 지긋한 할머니 혹은 처녀 시절 입던 옷을 고이 간직한 엄마의 옷장으로 발걸음을 향해야 할지 모른다. 올해 트렌드의 큰 줄기 중 하나가 그래니 룩(granny look)이기 때문이다. 극도로 미래지향적(소재와 디자인 모두에서)이거나 혹은 극도로 심플한 미니멀리즘에 디자이너들이 싫증을 느낀 걸까? 몇 해 전부터 디자이너들은 1960~1970년대의 아카이브를 뒤졌다. 복고의 바람은 올해 상반기는 물론 쌀쌀해진 지금까지 고스란히 이어졌다. 대신 젊음을 상징하는 히피와 그런지, 록 시크가 아니라 손뜨개질을 즐기던 할머니의 옷차림으로 말이다.
DVF

Chanel

Marc Jacobs
런웨이를 수놓은 그래니 룩
그래니 룩을 대표하는 주자는 단연 구찌. 알레산드로 미켈레가 창조한 구찌의 모습은 충격에 가까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기존 구찌가 간직한 글래머러스하고 어찌 보면 퇴폐적인 섹시함은 온데간데없이 로맨틱한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다만 그 소녀는 솜사탕을 손에 쥔 ‘샤방한’ 모습이 아니라 할머니의 옷을 입고 호기심 많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너풀거리는 리본 장식 블라우스와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실크 소재 플레어스커트, 할머니 품에서 나는 따뜻한 내음까지 그대로 옮겨온 것 같은 퍼 코트까지. 더욱이 레드와 브라운, 카키 등 톤 다운된 컬러를 적절히 사용하며 그래니 룩을 이상적으로 그렸다. 그래니 룩을 좀 더 실험적으로 풀어낸 브랜드도 있다. 생김새만으로도 여심을 자극하는 조나단 앤더슨이 이끄는 로에베 그리고 그의 이름을 내걸고 전개하는 J.W. 앤더슨이 주인공. 이들의 런웨이에는 1990년대 후반에 보던 잡지 광고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모델이 등장했는데, 복고의 냄새가 구찌와는 다르게 다가온다. 우리가 생각하는 전형적인 할머니 옷차림은 아니지만 성글게 짠 긴 니트 베스트, 레이스 장식을 곁들인 샌드 컬러 원피스, 기하학적 패턴의 가죽 벨트와 독특한 구조의 백이 할머니가 고이 아끼던 아이템을 매치한 듯한 느낌을 선사한다. 할머니의 옷장을 뒤져 꾸민 듯한 모델을 런웨이에 내보낸 하우스는 실로 다양했다. 미우 미우는 하운즈투스 체크나 스트라이프 패턴을 이용해 복고의 느낌을 살렸다. 넓은 칼라의 블라우스에 성근 니트를 겹쳐 입거나 가슴 위를 덮은 레이스 원피스에 만개한 꽃 모티브의 주얼리를 매치해 옛 시절을 추억했다. 존 갈리아노가 이끄는 메종 마르지엘라는 오렌지 컬러 베레를 쓴 모델에게 작은 플라워 패턴 자수를 놓은 옷을 입혔고, 걸음걸이마저 구부정한 할머니를 모방했다. 플라워 패턴은 풍성한 리본 장식 화이트 컬러 블라우스에 덧입은 폴 앤 조의 베스트나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시폰 소재에 작은 꽃무늬를 촘촘히 수놓은 어덤(Erdem)의 원피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브랜드의 정체성이 그래니 룩과 잘 맞아떨어진 경우도 있다. 맥시멀리즘의 대표주자 드리스 반 노튼의 진가는 올해 유난히 도드라졌는데, 가슴이 드러난 슬리브리스 원피스에 야생화를 그대로 꺾어온 듯한 네크리스를 매치하기도 하고, 팔목 전체를 감싼 버건디 컬러 가죽 글러브로 포인트를 주었다. 하우스 고유의 에스닉한 느낌이 고스란히 그래니 룩과 연결된 경우! 에트로도 빠질 수 없다. 브랜드 고유의 페이즐리 외에도 골드빛이 완연한 플라워 패턴, 기하학적 도형 패턴 등을 패치워크 형태로 엮었다. 샤넬의 시그너처인 트위드 소재 역시 브랜드의 DNA는 물론 그래니 룩을 표현하는 데도 안성맞춤으로 가을과 겨울 시즌에 맞춰 선택한 브라운 톤 카디건과 원피스는 여유로운 파리 여인의 느낌을 자아냈다. 마크 제이콥스의 니트 베스트와 플라워 프린트의 플레어스커트는 다소 무거운 듯한 모델의 메이크업과 어우러져 고딕 무드를 더한 그래니 룩을 완성했다.
Chanel

Prada

Dries van Noten

Gucci

Michael Kors
에디터 이현상 (ryan.lee@noblesse.com)
사진 Imaxtree(컬렉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