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ide the Room
디자이너는 매 시즌 신선하고 근사한 것을 만든다. 창조적 영감과 재능으로 가득한 그들의 공간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아트나우>가 직접 취재한 디자이너의 작업실과 그들이 작업실에서 보내는 시간을 담은 패션 다큐멘터리를 모았다.
Designer’s Studio
디자이너의 취향과 미적 감각, 시대 흐름이 담겨 있는 스튜디오에 발을 딛다.
브루노 프리소니의 책상. 벽면에 걸린 회화는 영국 출신 아티스트 루퍼트 스리브(Rupert Shrive)의 작품이다.

이네 드 라 프레상주가 브루노에게 선물한 코끼리 인형 로저와 마리 크리스토프(Marie Christophe)가 만든 메탈 소재 동물 인형, 얼룩말 카펫까지 어우러져 유쾌한 사파리를 연상시킨다.

사무실로 향하는 복도
지적인 신발을 만들다, Roger Vivier
지난 2013년 말, 팔레 드 도쿄에서 열린 로저 비비에의 회고전 < Coma, etc. >는 여성에게 최초로 스틸레토 힐을 선사하고, 콤마힐과 필그림을 포함한 아이코닉 슈즈를 남긴 메종의 저력을 재발견하는 계기였다. 당시 현장에는 신발을 단순한 패션 액세서리가 아니라 완연한 조각품으로 여긴 창립자 로저 비비에가 만든 170켤레에 달하는 작품이 있었는데, ‘네페르티티의 연꽃’, ‘힘줄을 치료하는 아킬레스’, ‘신발 장인들의 모나리자’처럼 디자이너의 인문학적 조예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는 슈즈의 시적인 이름도 흥미로웠다. 지적 호기심으로 가득한 헤리티지를 지닌 메종의 이야기는 아트 디렉터 브루노 프리소니에 의해 지금도 이어지는 중이다.
파리 포부르생토노레 29번지에 위치한 로저 비비에 플래그십 스토어. 브루노 프리소니의 디자인 스튜디오는 이곳 2층, 오른쪽 벽면을 채운 거울이 아카이브 스케치가 걸린 반대쪽 벽을 비추는 좁다란 복도 왼쪽에 자리한다. 뚱한 표정을 짓고 복도를 지키는 프렌치 불도그 인형을 지나 작업실에 들어서면, 로저라는 이름의 커다란 코끼리 인형이 놓인 새하얀 내부가 펼쳐진다. 자신만의 무질서한 방식으로 군더더기 없는 공간을 정리한다는 브루노 프리소니의 설명처럼, 그의 사무실에선 새하얀 캔버스에 물감을 겹쳐 찍는 화가의 손길이 느껴진다(재미있게도 맞은편에 위치한 그의 오랜 친구이자 메종의 홍보대사인 이네 드 라 프레상주(Ines de la Fressange)의 집무실은 이와 정반대로 사랑스러운 로즈 컬러로 도배했다). 파리 특유의 몰딩으로 장식한 창문을 등진 채 사무실의 한가운데를 차지한 하얀색 책상 위로 차곡차곡 쌓인 책과 색연필이 빽빽하게 꽂힌 필통, 필그램 버클 같은 아이템이 활기를 더하고, 역시 화이트 컬러로 꾸민 서재는 패션 브랜드의 히스토리 북과 아트 북 그리고 좋아하는 슈즈로 가득 채웠다. 굳이 다른 데서 영감의 원천을 찾는 대신 자신을 둘러싼 것에서 아이디어를 얻는다는 그는 실제로 엄청난 북 쇼퍼홀릭이다. 이는 책 속에 담긴 무한한 가능성을 읽어내는 브루노의 감수성 덕분일 터. 일례로 중앙아시아를 테마로 한 2014년 F/W 컬렉션은 우연히 책에서 발견한 사진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게 찾은 무언가에서 영감을 얻으면, 책상에 앉아 아이패드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벗 삼아 디자인을 시작한다.
카메라에 담을 순 없었지만, 브루노 프리소니의 책상을 마주한 벽면은 올해 파리 패션 위크에 공개할 2016년 S/S 컬렉션의 일러스트 보드로 가득 채웠다. 그곳에서 목격한 로저 비비에의 새로운 슈즈는 마치 그가 자신의 사무실을 꾸며놓은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디자인한 듯했다. 순백의 사무실에서 자신이 선호하는 아트 피스와 오브제로 개인적 취향을 드러냈듯, 거장 로저 비비에가 남긴 눈부신 헤리티지라는 바탕 위에 특유의 모던함을 끊임없이 불어넣고 있으니까.
현지 취재. 배우리(파리 통신원)
로저 비비에 아트 디렉터 브루노 프리소니가 직접 그린 2015년 F/W 시즌 일러스트

책상 한편에 놓인 다양한 소재의 필그림 버클과 슈즈 액세서리

사무실에 놓인 모든 슈즈는 그가 좋아하는 모델로 엄선한 것이다.

좋아하는 작품을 배치할 최적의 장소를 고르는 것 역시 필립 림의 즐거움이다. 마우로 보나치나(Mauro Bonacina)의 작품은 보자마자 세일즈팀이 바라보는 벽에 걸겠다고 다짐했다.

이국적 프린트와 서정적인 그림으로 메운 필립 림의 개인 사무실. 바로 이곳에서 모던한 디자인이 탄생한다.
현대 패션을 정제하다, 3.1 Phillip Lim
뉴욕 하면 언제, 어디, 그 누구에게나 어울리는 실용성을 바탕에 둔 패션이 떠오른다. 필립 림의 의상은 여기에 완벽하게 부합한다. 클래식과 감각적인 개성을 버무린 그의 스타일이야말로 날마다 입기에 제격이니까. 중국인 부모를 둔 필립 림은 태국에서 태어났고, 미국 서부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자연스레 다양한 문화를 경험한 덕에 그의 의상은 뉴욕의 정신에 근접한 것은 물론, 수많은 컨템퍼러리 브랜드 중 독보적으로 현대적이다. 모든 존재에 이유가 있다는 것을 모토로 디자인하는 덕에 복잡함 대신 정제된 내공이 느껴져서다(2005년 그의 첫 컬렉션은 공개하자마자 무려 20개국에서 바잉했다). 이 모든 것이 탄생하는 곳은 바로 뉴욕 허드슨 거리에 위치한 스튜디오. 아트 피스와 여행지에서 공수한 오브제로 곳곳을 장식한 공간은 늘 첫 컬렉션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일한다는 그에게 영감을 주기에 손색없어 보인다. 다이어트 코크와 아이스커피를 옆에 두고 정교한 디테일과 현대적 소재를 만들기 위해 몰두하는 이곳에서 언제든 입을 수 있는 블루종과 원피스, 데일리 백과 티셔츠가 마법처럼 탄생한다.
Fashion Documentaries
개봉을 앞둔 패션 필름과 다시 찾아봐도 후회 없을 패션 다큐멘터리 시리즈.

< Dior & I >
< Dior & I >(2014)
작년 뉴욕 트라이베카 영화제에서 공개한 다큐멘터리 <디올 앤 아이>가 지난 8월 국내에 정식 개봉했다. 디올 하우스에 입성한 라프 시몬스가 데뷔 쇼를 준비하는 7주간의 여정을 담았으며 연출은 프레데릭 청(Frederic Tcheng)이 맡았다. “저를 여러분의 가족으로 받아들여주셔서 감사합니다.” 쇼를 앞둔 전날 밤, 파리 몽테뉴 가 30번지 꼭대기 층에 자리한 아틀리에에서 재봉사들에게 건넨 라프의 말에서 눈치챌 수 있듯, <디올 앤 아이>는 라프 시몬스가 디올이라는 새로운 세계에 발을 내딛는 모습으로 채웠다. 쿠튀리에 크리스찬 디올이 유년 시절을 보낸 그랑빌로 향한 라프가 브랜드 창시자의 자서전을 읽는 내내 자신과 디올 사이에서 놀라울 정도로 유사한 평행 관계를 발견하며 책장을 쉬이 넘기지 못하는 장면처럼, 시대와 상관없이 우아하고 현대적인 여성의 비전을 끊임없이 제시하는 두 디자이너의 열정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 Jeremy Scott: The People’s Designer >
< Jeremy Scott: The People’s Designer >(2015)
첫째, 쇼가 시작되는 순간 SNS를 도배한다. 둘째, 시대를 정의하는 팝 스타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다(래퍼 A$AP 로키는 자신의 삶을 바꾼 디자이너라 평했다). 셋째, 아무도 상상한 적 없는 방식의 하이엔드를 제안한다. 제러미 스콧은 스타 디자이너라는 명칭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이 중 하나다. 패스트푸드와 군것질거리, 스폰지밥 캐릭터를 내세워 시대의 흐름을 정확하게 짚어낸 그의 첫 번째 모스키노 컬렉션은 셀레브러티와 대중을 모두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 패션 잡지에 매료되어 작은 마을의 농장에서 도시로 상경해 갈 곳 없이 지하철에서 잠을 청하던 소년에게 패션은 대체 어떤 의미였을까? “생동하고, 재미있고, 순간을 만들어내죠!” 그의 화려한 일상과 함께 하이엔드와 스트리트 사이에 다리를 놓는 디자인 과정을 담은 필름은 9월 18일 미국에서 개봉한다.
< Visionaries: Tom Ford >
< Visionaries: Tom Ford >(2011)
구찌와 입생로랑을 떠난 톰 포드가 그의 브랜드 런칭 후 2011년, 아주 오랜만에 첫 여성 컬렉션을 준비하는 과정을 소개한다. 자신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고 선보인 컬렉션은 그 어느 때보다 프라이빗했다. 비욘세, 줄리앤 무어, 스텔라 테넌트와 줄리아 로이펠트 등 그가 사랑하는 뮤즈가 파티를 즐기듯 거니는 런웨이는 그의 세계를 농축해놓은 듯 아름다웠으니까. 물론 모든 과정이 쉬웠던 것은 아니다. 런던 스튜디오에서 안경을 낀 채 옷의 작은 디테일을 두고 고민을 거듭하는 과정에선 그의 완벽주의 성향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 Norah Noh >
< Norah Noh >(2013)
윤복희에게 미니스커트를, 펄시스터즈에겐 판탈롱 팬츠를 입히는 동시에 국내 여성이 손쉽게 입을 수 있는 편안한 의상을 디자인하며 논란과 찬사, 즐거움과 의문을 한 몸에 받은 우리나라의 전설적 디자이너 노라 노. 스타일리스트 서은영과 함께 60여 년간 이끌어온 자신의 패션 아카이브를 정리하는 과정을 담아낸 필름으로 국내 패션계의 지각변동이 궁금하다면 추천한다.
< God Save My Shoes >
< God Save My Shoes >(2011)
다이아몬드가 여자들의 가장 친한 친구인 시대도 있었지만, 지금은 하이힐이 그 자리를 대신하기도 한다. <섹스 앤 더 시티>의 세라 제시카 파커부터 디타 본 티즈까지, 모두가 입을 모아 하이힐이야말로 자신감의 근원이라고 말하니까. 마놀로 블라닉과 크리스찬 루부탱, 월터 스테이저, 피에르 아르디 같은 당대의 슈즈 디자이너가 만든 슈즈를 집중 조명하며 하이힐의 매력에 푹 빠질 수 있는 다큐멘터리로, 국내에는 2013년 ‘하이힐을 신은 여자는 위험하다’라는 제목으로 개봉했다.
Loic Prigent 사진 Getty Images
루아 프리장(Loic Prigent)
런웨이에 불이 켜지기 직전까지 고민과 사건, 수많은 변수를 거치는 디자이너의 모습을 그대로 담았다. 프랑스의 다큐멘터리 디렉터 루아 프리장이 포착한 패션 세계는 우리의 예상만큼이나 다이내믹하다. 그의 작품은 모두 www.arte.tv에서 구입 후 감상 가능하다.
< La Ligne Balmain >
< La Ligne Balmain >(2014)
스물여덟이라는 젊은 나이에 70년에 이르는 역사를 지닌 발맹의 수장이 된 올리비에 루스텡. 그가 밧줄에 손을 뻗으면 여성의 실루엣을 강조하는 보디콘셔스 드레스가 완성되고, 스스로 맥시멀리스트라고 소개하는 이답게 큼직한 밀리터리 재킷과 미니스커트, 샛노란 깃털 원피스처럼 시선을 모으는 관능적인 의상을 만드는 데 탁월한 재능을 지녔다. 그 결과 완성한 밀리터리와 정글을 아우르는 2014년 F/W 컬렉션은 리애나의 총애를 받으며 무사히 막을 내렸다.
< Inside the Mothership: Fendi >
< Inside the Mothership: Fendi >(2014)
50년 가까이 한곳에서 일한다면 지겹거나 식상하지 않을까? 칼 라거펠트에겐 무의미한 질문이다. 그에게 펜디는 늘 새롭고 참신한 브랜드고, 그가 이곳에서 해야 할 일은 여전히 많다. 특히 얇은 오간자와 모피를 합치고 모피의 텍스처를 입체적으로 변형시키는 것은 오직 펜디만이 보여줄 수 있는 것으로, 이런 독보적 기술을 선보이는 과정부터 완성한 의상이 2014년 S/S 시즌 컬렉션 런웨이에 오르기까지 과정을 15분 분량으로 담아냈다.
< Le Jour d’Avant: Versace >
< Le Jour d’Avant: Versace >(2013)
가장 아찔한 이탈리아 패션을 구현하는 베르사체를 이끄는 도나텔라 베르사체의 삶은 역시나 평범하지 않다(스스로 드라마 퀸이라고 일컫는다). 드레스야말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무기라고 여기며 특유의 과감함과 섹시함에 대해 고민하는가 하면, 크리스토퍼 케인처럼 무한한 잠재력을 지닌 젊은 디자이너를 만나기도 하는 그녀의 하루를 엿볼 수 있다. 또한 위대한 쿠튀리에인 그녀의 오빠 자니 베르사체의 아파트를 찾아가 털어놓는 진솔한 이야기 역시 귀 기울여 들을 만하다.
에디터 한상은 (hanse@nobless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