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mes Turrell 제임스 터렐
‘빛의 마술사’라 불리는 미국의 미디어 아티스트 제임스 터렐. 올해는 그의 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루이 비통 전시에 이어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 휴스턴 미술관,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지난 40여 년간의 작품 세계를 조명하는 대대적인 회고전이 잇달아 열리는가 하면, 한국에서도 제임스 터렐을 만날 수 있는 대규모 전시 공간을 한솔뮤지엄에 마련해 눈길을 끌었다. 산타클로스 같은 푸근한 인상의 제임스 터렐은 마법을 부리듯 ‘빛’ 하나로 세계를 매혹시키고 그 빛을 통해 관람객 스스로 내면을 바라보게 한다.
미국 전역에서 대대적인 회고전을 열고 있는 ‘빛의 마술사’ 제임스 터렐. 세계를 ‘빛’ 하나로 매혹시키고 있다.
휴스턴 미술관, 구겐하임 미술관 등 미국 유수의 미술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회고전을 열며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한 해를 보내고 있는 제임스 터렐. 일흔을 갓 넘긴 대가는 쟁쟁한 팝아티스트들을 제치고 현재 미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핫한 작가로 손꼽히고 있다. 그 파급력이 한국에까지 미쳤다. 2008년 메디컬 리조트 ‘우리들 리조트 제주’에 예술을 통한 치료의 목적으로 그의 대표작 ‘스카이스페이스(Skyspace)’를 국내 최초로 설치한 데 이어 지난 5월 문을 연 ‘한솔뮤지엄’에 터렐의 이름을 걸고 대규모 전시 공간이 들어섰다. 8년간 공사 끝에 대중에게 공개한 한솔뮤지엄의 ‘제임스 터렐관’은 세계적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터렐의 작품에 맞춰 세심하게 공간을 설계한 것은 물론, 햇살 좋고 공기 맑은 강원도 원주의 자연환경에 터렐의 작품이 완벽하게 녹아들었다는 평을 얻고 있다.
아리조나 사막에서의 제임스 터렐
한솔뮤지엄의 백미로 손꼽히는 제임스 터렐관에 들어서는 순간 신기한 광경을 목격했다. 해 질 무렵 사람들이 빙 둘러앉아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천장에 난 구멍으로 하늘을 올려다본다. 미동도 없이 1시간을 묵묵히 바라보는데 실내 조명이 바뀌면서 하늘색도 같이 변한다. 이렇듯 대자연을 예술로 승화시킨 터렐의 작품 앞에 모두들 숨죽이고 스르르 명상에 빠져든다. 제임스 터렐의 작품은 전 세계 어느 자연과도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묘한 매력이 있다. 지역의 특성에 맞는 작품을 구상해 설치하기로 유명한 제임스 터렐에게 2013년은 특별한 해다. 일흔의 나이임에도 젊은 작가들보다 왕성하게 작품 활동을 펼치고 있는 제임스 터렐. 그가 생각하는 빛의 의미, 빛에 대한 그의 철학은 무엇일까?
지난 5월 루이 비통 라스베이거스 메종 시티 센터에 영구 설치된 제임스 터렐의 최신작 ‘아크홉’

루이 비통 샹젤리제 메종에서 선보여진 제임스 터렐의 작품 ‘Tall Glass’
“제 작품은 공간과 그 공간에 머무는 빛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관람객의 시각적 경험을 기반으로 한 작업이죠. 그리고 대부분 관람객 한 사람만을 위해 만든 작품입니다.” 터렐의 설치 작품은 관람객으로 하여금 명상에 잠기게 한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하늘을 올려다보며 내면의 자신과 깊은 대화를 나눈다. 1947년부터 그가 선보여온 ‘스카이스페이스’ 시리즈는 관람객을 명상의 세계로 인도하는 대표적 작품. 천장에 뚫린 프레임을 통해 하늘을 바라보며 자연 속에서 명상을 즐기고, 더 나아가 놀라운 빛의 신비까지 깨닫게 된다. 그냥 천장에 구멍만 뚫어놓은 것이 아니다. 구멍 주변에 인공조명을 설치, 조명 색이 수십 가지로 바뀌면서 달라지는 하늘의 빛에 주목하게 해 하늘 자체를 예술로 승화시켰다. 주변 빛에 의한 착시 효과로 시시각각 하늘색이 변하는 것인데, ‘스카이스페이스’는 일몰이나 일출 때 그 진가를 발휘한다. 그의 손을 거치면 이처럼 하늘도 작품이 된다. 그가 빛과 하늘 등 자연에 매료된 것은 과거의 무수한 경험 때문이다. 빛이 좋은 캘리포니아 LA에서 태어난 터렐은 풍족하게 누린 빛의 혜택을 고스란히 작품에 쏟아내고 있다.
퍼모나 대학교에서 심리학을 전공하고 화학, 물리학, 천문학, 지리학, 미술사학 등 다양한 분야를 연구한 제임스 터렐은 대학 졸업 후 캘리포니아 대학교와 클레어몬트 대학원에서 체계적으로 미술사를 공부했다. 캘리포니아 대학교 재학 시절, 미술 수업 중 슬라이드 프로젝터에서 나오는 빛에 주목하면서 빛과 공간에 대한 탐구를 시작했다. 1967년 패서디나 미술관에서 개최한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40여 년간 휘트니 미술관,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 등 세계적 미술관에서 전시하며 ‘빛과 공간의 예술가’라는 명성을 차곡차곡 쌓아왔다. 그의 작품은 단순히 빛을 이용한 듯 보이지만, 초월적 경험(착시 현상)을 선사하는 것은 물론 자기 내면의 소리에 집중하고 있다. 사실 터렐이 하늘에 매료된 것은 그보다 훨씬 오래전이다. 비행기 조종사인 아버지 덕에 어려서부터 항공과 천문학에 관심을 가진 터렐은 아버지에게 비행 기술을 배워 열여섯 살에 조종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그뿐 아니다. 인간의 내면적 체험을 중시하는 그의 성향은 종교적 배경과 연관이 깊다. 개인의 정신적 수련을 강조하는 퀘이커교 집안에서 엄격하게 자란 덕에 명상을 통해 자기 성찰을 이끌어내고 있다. 이렇듯 어릴 때 시작한 비행과 명상에 눈을 뜨게 해준 종교의 영향이 현재 그의 작품 세계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제임스 터렐의 대표 작품 ‘스카이스페이스(Skyspace)’. 천장에 뚫린 프레임을 통해 하늘을 바라보며 명상을 즐길 수 있다.

James Turrell, Above-Between-Below, The Kunsthalle in Bremen, Germany 2011
“비행 중에는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모호할 때가 있어요. 그래서 과거엔 파일럿들이 바다에 떨어져 큰 사고로 이어지기도 했죠. 제가 비행을 하면서 느낀 하늘의 빛깔, 광활한 대륙, 무한한 공간, 빛에 대한 인상 등을 작품으로 풀어냈습니다.” 그런 경험을 십분 살린 작품이 바로 한솔뮤지엄에서 선보이는 ‘간츠펠트(Ganzfeld)’. 빛이 만들어내는 시각적 착시, 즉 간츠펠트 효과를 이용한 작품으로 비행 중 구름이 몰려 있는 곳에 들어간 경험을 표현한 것이다. 큐레이터의 지시에 따라 한 발 한 발 내딛다 보면 마치 터렐의 경험처럼 안개 속에 갇힌 느낌을 받게 된다. 깊이를 가늠하기 힘든 공간에서 한 발도 내딛을 수 없을 만큼 묘한 긴장감에 사로잡힌다.
“관람객이 인식하는 ‘빛의 힘’에 집중합니다. 색감이 강한 조명에 둘러싸인 공간에서 빛이 ‘자극’으로 작용해 일종의 가벼운 ‘감각적 박탈’ 상태를 일으키는 거죠.” 세계를 빛으로 매혹시킨 제임스 터렐은 공간 속에서 사람이 빛을 지각하는 방식과 효과를 작품으로 승화시켜왔다. 일찌감치 그의 작품성을 알아보고 특유의 표현 방식에서 영감을 받은 것은 다름 아닌 세계적 명품 브랜드 루이 비통. 제임스 터렐은 루이 비통과 협업을 통해 2005년 파리 샹젤리제 플래그십 스토어에 모듈형 전등 작품을 설치하는가 하면, 2006년 파리 에스파스 루이 비통에서 트렁크를 재해석한 작품을 선보이기도 했다. 지난 5월 2일에는 라스베이거스 메종 시티 센터에서 최신작 ‘아크홉(Akhob)’을 공개해 다시 한 번 미술계는 물론 패션 피플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이 작품은 루이 비통을 위해 특별히 제작한 영구 설치물로 균일한 색의 단면을 응시하면 나타나는 시각적 착시 현상, 간츠펠트 효과를 작품에 이용했다. 특히 관람객은 색감이 강한 신비한 빛으로 둘러싸인 2개의 방에 들어가 공간을 느끼고 빛이 온몸을 감싸는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된다. 체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동시 관람 인원을 소수로 제한한 점이 인상적이다.
2006년 제임스 터렐에 의해 재해석된 루이 비통 의상 트렁크

평생을 쏟아 부어 만든 걸작 ‘로덴 분화구 프로젝트’
빛과 자연을 작품 속에 과감하게 끌어들이는 터렐의 작업은 스케일부터 남다르다. 그가 평생을 쏟아부어 야심차게 선보인 ‘로덴 분화구 프로젝트(Roden Crater Project)’가 가장 스케일이 큰 작품. 1977년 미국 애리조나 사막 한가운데 있는 지름 3.2km의 로덴 분화구를 사들여 30여 년 동안 그곳에 11개의 방과 그 방들을 잇는 터널을 만들었다. 화산 내부에선 천체의 궤도와 해, 달의 움직임에 따른 빛의 변화를 관찰할 수 있게 했다. 현재도 진행 중인 이 프로젝트는 그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하다. 이렇듯 터렐의 작품에는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그만의 색채가 담겨 있다. 심오한 천문학의 세계를 보여주는가 하면, 인간의 마음을 편안하게 이끄는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어떤 이는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고, 어떤 이는 물끄러미 턱을 괴고 앉아 명상에 잠기기도 한다. 사람들은 단순히 작품을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 속으로 깊이 빨려 들어간다. 터렐은 작가 노트에 이런 말을 남겼다. “제 작품은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관람자의 마음을 쥐락펴락하는 빛의 마술사 제임스 터렐의 다음 작품도 사람들의 감성을 깊숙이 파고들 것이다. 노장의 작품이 기대되는 이유, 바로 여기에 있다.
에디터 심민아
사진 제공 루이 비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