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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st Enough! Pierre Hardy

FASHION

조형미술을 전공했고 춤을 배웠다.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던 중 패션에 뛰어들었고 지금은 구두를 만든다. 결코 한자리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 아니다. 다양한 이력, 남들보다 풍부한 경험 덕분에 보다 창의적인 자아를 갖게 됐다는 천재, 피에르 아르디. 그가 말하는 특별함의 비결은 평범한 듯 다르다.

신세계백화점 본점 본관 2층에 오픈한 매장에서 만난 피에르 아르디

에르메스 24년, 발렌시아가 13년, 피에르 아르디 15년. 슈즈 메이커 피에르 아르디의 이력을 보고 있으면 부러움과 더불어 시샘이 난다. 패션의 정수로 불리는 유서 깊은 패션 하우스는 물론 개성 넘치는 스타일의 대명사로 꼽히는 레이블까지, 한 사람이 진행한 것치고 각각의 컬렉션에서 보이는 다양한 개성이 흥미로운 탓이다. 좀 더 솔직히 말하면 한 명의 디자이너가 여러 가지 레이블을 담당하는 경우는 있지만 모든 브랜드가 인기를 모은 사례는 드물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브랜드를 보자. 각기 다른 분위기로 모두 ‘핫’한 이름이지 않은가! 지난 2월 신세계백화점 본점에 피에르 아르디의 단독 매장이 문을 열었다. 뉴욕과 파리에 이어 전 세계 세 번째, 아시아에서는 최초로 선보이는 부티크다. 이를 기념해 3월 26일에 브랜드가 탄생한 1999년부터 지금까지 선보인 컬렉션의 상징적 디자인 스케치와 이를 통해 완성한 슈즈를 소개하는 아카이브 전시가 열렸다. 규칙적이면서 반복적인 지그재그 배열에 맞춰 나열한 디스플레이 패널부터 브랜드 특유의 그래픽적 특성을 표현한 행사에서는 디자이너 피에르 아르디가 추구하는 디자인 세계와 패션에 관한 철학을 엿볼 수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날 행사가 특별한 이유는 피에르 아르디가 <노블레스>를 위해 시간을 할애한 것!
어떤 사람일까? 실제로 만나보기 전엔 꽤 궁금했다. 어떤 이유에서든 닮을 수밖에 없는 컬렉션을 보고 예민하거나, 날카롭거나, 까다로울 것이라고 짐작했다. 사실 패션계가 그에게 보내는 찬사는 제품을 통해 보여준 오묘한 컬러의 조합과 배치, 건축적 디자인의 균형미가 섬뜩하리만큼 정확한 탓이다. 하지만 모든 예상은 빗나가기 마련. 캐주얼하지만 가볍지 않은 더블브레스트 재킷, 경쾌하게 롤업한 데님 팬츠, 걷기 편한 블랙 슬립온 슈즈를 신고 유쾌한 웃음으로 첫인사를 건네는 그를 보니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아시아 최초의 부티크를 서울에 연 이유를 묻자 웃으며 “평양에 오픈할 수는 없으니까요”라고 재치 있게 답한 그와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카이브 컬렉션 전시

아시아의 첫 매장을 서울에 오픈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많은 제안이 있었을 것 같은데요. 신세계백화점과 좋은 파트너십을 맺은 덕분이죠. 다른 나라도 그렇고 한국에서도 다양한 제안이 있었지만, 상호간의 신뢰를 중요하게 생각해 고심했죠. 신세계백화점은 제 디자인 역량을 전적으로 믿어줬어요. 그래서 더 열정적으로 인테리어 컨셉이며 디스플레이 방식 등 작은 디테일 하나까지 직접 관여했고, 머릿속으로 상상하던 공간을 현실화할 수 있었죠. 기분 좋고 만족합니다.(웃음)
작은 부분까지 직접 챙기셨다니 대단합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특별히 신경 쓴 부분이 있다면요. 딱! 딱! 딱! 보고, 사고, 나가는 방식의 매장이 싫었어요. 부티크는 물건을 파는 공간인 동시에 브랜드를 체험할 수 있는 곳이니까요. 디자인에는 기획, 말하자면 의미가 담겨 있어야 합니다. 물론 쉽지는 않죠. 새로운 매장은 공간 안에서 산책하는 컨셉을 적용했어요. 좁고 긴 산책로를 따라 걷는 느낌으로요. 그래서 제품을 보여주는 쇼케이스를 일정한 간격을 두고 층층이 놓았죠. 양옆에는 공원의 벤치처럼 앉을 수 있는 의자를 두어 지치면 쉬어갈 수 있게 했고요. 누구나 편하게 들러 쉴 수 있었으면 해요.
전 사실 미로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재미있네요. 그런데 그런 아이디어는 어디서 나오나요? 당신을 수식하는 단어 중 꽤 잦은 표현이 ‘창조’, ‘기발’ 등 번뜩이는 생각과 관련된 것이잖아요. 타고난 재능도 없지 않지만 일을 하면서 개발되는 부분이 많아요. 이를테면 근육처럼. 처음 운동을 시작하면 근육이 없어 쉽게 지치고 힘들지만 꾸준히 하면 탄력이 생기고 유연해지는 것과 같은 이치죠. 1년에 여덟 번 이상 새로운 컬렉션을 출시하지만 늘 아이디어가 넘쳐요. 물론 머릿속에 맴도는 생각을 구체화하고 현실화하는 방법, 제품으로 연결하는 과정이 까다로워 쉽지는 않지만요.
아이디어가 늘 풍부하다는 말이 인상적이에요. 어떻게 그럴 수 있죠? 혹시 아카이브를 모조리 외웠다거나 참고하는 디자인 비밀 서적이 있는 건 아니고요? 갤러리에 자주 가요. 아카이브도 보긴 하지만 거기서 디자인을 차용하지는 않아요. 과거의 것을 본 후 그 잔상이나 감흥이 머릿속에 구름처럼 막연하게 남아 있는 상태, 그 기억을 이용하는 게 좋아요. 늘 새로운 것을 만들고 싶으니까요. 새로운 프로젝트나 디자인을 할 때 가장 먼저 그림부터 그려요. 시작부터 끝까지 가장 많이 하는 일이죠. 그리는 과정을 통해 희미하던 것이 윤곽을 드러내고 마침내 신선한 ‘무엇’이 탄생합니다.
그림을 그리다 보면 만족스러울 때, 그렇지 않을 때도 있잖아요. 좋은 디자인에 대한 기준이 있나요? 덧붙일 것도, 뺄 것도 없는 디자인이요. 단순하지만 더 이상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을 때가 가장 이상적이죠. 물론 그것이 구두라면 편안함, 백이라면 기능성을 갖추었다는 전제 아래서!
본인이 선보인 컬렉션 중 그런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난 시즌이 있다면요? 2000년 F/W 시즌, 1999년 시작한 피에르 아르디의 레이블이 선보인 첫 컬렉션이죠. 심플함의 미학을 가장 잘 구현한 시즌이었어요. 개인적으로도 의미가 있고요. 그 컬렉션을 보면 사춘기가 떠오르죠. 열세 살쯤이던, 1970년대에 스타킹 브랜드 ‘DIM’이 TV 광고를 처음 시작했어요. 모델 여러 명이 검은 드레스 차림에 블랙 구두를 신고 비비드한 컬러의 스타킹으로 포인트를 준 영상이었는데 충격을 받았죠. 그때 본 컬러, 실루엣 등의 조합이 남긴 잔상이 영향을 미쳤기 때문인지 의미가 남달라요.

<노블레스>를 위해 피에르 아르디가 그린
블레이크 힐 슈즈 스케치

어릴 때부터 컬러나 패션에 남다른 감각이 있었나요? 평범했어요.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것보다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지만요. 끊임없이 그려댔어요. 개념미술, 건축, 조형 디자인, 비주얼 아트 등 다양한 장르에서 얻은 아이디어를 스케치했죠. 스케치할 때는 라인(line), 선에 집중했어요. 선은 그 자체로 디자인의 힘을 발휘한다고 생각했죠. 그리고 그것이 지금 제 시그너처 디자인인 곡선미를 기본으로 한 기하학적 셰이프와 실루엣의 기반이 됐답니다.
직선과 곡선도 그렇지만 그래픽적 정육면체 큐브 패턴도 독특해요. 맞아요. 모던하지만 서로 다른 컬러 블로킹이 위트 있죠. 조형예술을 공부한 영향으로 구조나 색조에 대해 연구하는 게 좋아요. 전체적인 균형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죠.
제품은 디자이너의 또 다른 자아라고 생각해요. 백이나 슈즈에서 보이는 것처럼 생활도 완벽하게 밸런스를 이루고 있나요?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편이에요. 다른 사람들처럼 아침 7시 30분에 일어나 1시간가량 운동하고 사무실에서 오후 9시나 10시까지 하루 12시간 정도 일하죠. 특히 운동을 좋아하고 중요하게 생각해서 매일 빼놓지 않고 합니다. 이리저리 다니면서 나 자신을 만들어요. 게으르기 때문에 더 많이 하고, 집중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더 충실하려고 합니다.
아직도 무용을 하시나요? 어릴 적 무용을 배웠다고 들었어요. 춤은 더 이상 추지 않아요. 이젠 나이가 있으니까 대신 조깅과 수영을 하죠.
그래서인지 옷을 입었을 때 피트가 좋아요. 평소 패션 스타일도 궁금해지는데요. 주로 오늘처럼 입어요. 활동적이지만 스포티브하지 않고 지나치게 포멀하지 않아 부담스럽지도 않죠. 패션이란 명확한 중심도 중요하지만 다양성을 즐길 줄 알아야 세련될 수 있어요. 그래서 프라다나 일본 디자이너 브랜드같은 다른 브랜드에도 관심이 많죠.
혹시 이번 시즌 특별히 추천하는 아이템이 있나요? 토트백, 스니커즈, 하이힐 슈즈…. 뭔가 하나를 꼬집어 말하긴 어려워요. 직접 이곳에 와서 보고 본인에게 어울리는 것을 골라보세요.
새로운 매장 오픈으로 큰 산을 하나 넘은 기분일 것 같아요. 혹시 벌써부터 또 다른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가요? 하하. 당분간은 없어요. 하지만 상반기에 도쿄 이세탄 백화점에 팝업 스토어를 열 계획이고 다음 컬렉션도 준비해야죠. 아! 그리고 2014년 f/w 시즌에는 제가 앞서 언급한 2000년 F/W 컬렉션에서 선보인 블레이크 힐을 지금의 시각으로 새롭게 디자인해 소개할 예정이니 기대해주세요.

인터뷰 후, 피에르 아르디는 “제가 너무 수다스러웠나요?”라고 수줍게 물었다. 40대 후반의 나이에 이렇게 열정적이고 사랑스러운 남자가 또 있을까? 기발하지만 엄격한 기준이 있고 ‘늘 새롭고 싶다’는 창작 욕구로 습관처럼 작업에 몰두하는 사람. 남보다 뛰어난 결과물을 얻는 재주를 가진 천재 말이다.

에디터 문지영(jymoon_@noblesse.com)
사진 기성률  스타일링 이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