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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ssel_왜 도쿠멘타인가

ARTNOW

도쿠멘타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과거에 대한 반성과 자각을 바탕으로 출범했다. 여타 미술 행사와 다른 도쿠멘타의 지향점은 무엇이며 ‘도쿠멘타 14’에서 어떤 점을 주목해야 할까?

도쿠멘타의 메인 전시 장소인 프리데리차눔 외관.

독일 중부에 위치한 카셀에서는 5년마다 세계적 미술 축제 도쿠멘타가 열린다. 도시는 100일 동안 거대한 미술관이 되고, 긴박하게 움직이는 현시대 미술의 기류를 가장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현장에 전 세계 미술 애호가들의 시선이 집중된다. 정기적으로 열리는 대규모 전시는 하나의 방향성을 선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지금까지 미술사적 흐름을 정리해 보여주거나, 앞으로 어떤 미술이 도래할지 그 청사진을 제시하기도 한다. 과거 60년 동안 개최한 열세 번의 도쿠멘타에서는 이 양극단을 종합하려는 시도를 읽을 수 있었다. 올해 그리스 아테네와 카셀 두 곳에서 개최하는 ‘도쿠멘타 14’에서도 그런 경향이 나타날지 주목된다.

지난 4월 개막한 아테네 전시에서 공개한 안드레아스 안젤리다키스(Andreas Angelidakis)의 신작, ‘Unauthorized(Athinaiki Techniki)’.

과거를 딛고 현재를 말하는 예술
카셀 도쿠멘타는 카셀이라는 특정 도시의 맥락과 뗄 수 없다는 점에서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와 유사한 면이 있다. 하지만 기획 의도와 전개 과정은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인다. 도쿠멘타는 카셀 출신 미술가이자 전시 기획자 아르놀트 보데(Arnold Bode)의 구상에서 비롯했다. 1950년대의 독일은 모든 면에서 지금의 독일과는 전혀 다른 곳이었다. 두 차례 세계대전을 일으켜 전범국이라는 주홍글씨가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실패와 좌절이 독일인의 정서를 족쇄처럼 채웠고, 정치적 대립과 이념적 갈등, 강대국들의 힘겨루기가 펼쳐진 곳이 바로 독일이다.
아르놀트 보데가 도쿠멘타를 기획한 것은 미술 영역에서 일종의 과거 청산을 하기 위해서였다. 독일은 1930년대에 나치가 정권을 장악하고 미술에 대한 대대적 검열을 한 역사가 있다. 나치 치하 미술은 정치적 선동 도구로 전락했고, 순수한 미적 관념의 진보적 실천이던 아방가르드 미술은 퇴폐 미술(entartete kunst)로 낙인찍혔다. 표현주의,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같은, 지금은 미술사의 고전으로 읽히는 작품들이 위험한 미술로 규정됐다. 이런 억압의 시간 동안 단절된 현대미술의 역사를 현재로 이식하기 위해 기획한 것이 도쿠멘타다.
이처럼 기획은 야심만만했지만 대중적 관심과 참여를 끌어내야 한다는 현실적 과제는 넘기 힘든 벽이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삶의 터전을 재건하는 데 여념이 없던 시절, 생계와 직접적 관련이 없는 미술에 관심을 두는 이는 없었다. 그런데 마침 기회가 찾아왔다. 1955년 카셀에서 대규모 조경 박람회(Bundesgartenschau)가 열린 것이다. 보데는 조경 박람회 개최 기간에 맞춰 전시회를 준비했고, 전시 장소 역시 박람회장에 근접한 프리데리차눔(Fridericianum)으로 정했다. 1779년 완공한 이 건축물은 지금도 도쿠멘타의 메인 전시관으로 사용 중이다.
도쿠멘타의 첫 번째 전시에는 148명의 작가가 참여해 670여 점의 작품을 선보였다. 당시까지 독일에서 개최한 최대 규모의 전시였고, 관람객 수는 13만 명을 넘었다. 첫 행사의 성공은 도쿠멘타가 정기적 미술 축제로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유럽의 아방가르드 미술에 국한하던 참여 작품도 확장, 4년 뒤 개최한 두 번째 전시부터는 미국과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의 작가들도 초대했다. 1972년에 열린 다섯 번째 도쿠멘타까지는 4년이나 5년을 주기로 불규칙하게 열렸고, 이후 5년마다 열리는 정기 행사로 자리 잡았다. 이 시기 도쿠멘타는 규모 면에서도 비약적 성장세를 보였는데, 평균 200여 명의 미술가가 1000여 점의 작품을 소개한 것과 비교할 때, 1977년에 열린 여섯 번째 도쿠멘타에는 무려 622명의 작가가 참여했고 출품작도 2700여 점에 달했다. 이후 도쿠멘타는 최근까지 지속적인 외적 성장을 거듭해왔다.
전시 규모의 확장과 획기적 컨셉에 대한 요구는 자연스레 새로운 전시 공간에 대한 요청으로 이어졌다. 그 필요성이 설득력을 얻어 도쿠멘타 전용 전시관인 도쿠멘타-할레(Documenta-Halle)를 지으면서 1992년 아홉 번째 도쿠멘타부터는 2개의 전시관에서 작품을 선보였다. 그뿐 아니라 카셀의 미술관들도 도쿠멘타 기간에 연관 전시를 기획했고, 프리데리차눔 앞에 펼쳐진 야외 공간인 카를스플라츠(Karlsplatz)와 도심 공원인 카를스아우에(Karlsaue) 역시 전시 공간으로 활용하면서 도쿠멘타는 훨씬 풍부한 전시 콘텐츠를 담을 수 있게 됐다.

아테네 국립현대미술관에 전시 중인 미셸 오데 (Michel Auder)의 ‘Gulf War TV War’.

열네 번째 도쿠멘타에 기대하는 것
도쿠멘타는 비교적 짧은 시간 동안 국제적으로 가장 권위 있는 미술 행사로 자리 잡았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동시대 미술 현장에서 다루는 가장 민감한 정치적·사회적·역사적 이슈를 주제로 설정할 줄 아는 역량 있는 기획자를 발굴했고, 작가들에게 절대적 창작의 자유를 줬다는 점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지식인과 미술가들이 가장 설득력 있고 전위적인 방식으로 도쿠멘타를 만들어온 것이다.
도쿠멘타의 생명력인 ‘동시대성’은 올해의 주제인 ‘아테네에서 배우기’에서도 충분히 읽을 수 있다. 고대 그리스에 문화적·정신적 뿌리를 두고, 기독교라는 보편적 정서를 공유한 유럽인은 하나의 유럽을 출범시켰다. 하지만 10여 년이 지난 지금, 국가 간 경제적 불균형을 극복하지 못해 통합이라는 이상에 빨간불이 켜졌다. 그 출발점이 된 나라가 바로 그리스이며, 그리스에 대한 최대 채권국인 독일은 직간접적으로 정치적 압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었다. 치솟는 물가와 높은 실업률에 시달리던 그리스의 사회적 긴장감은 곧장 반(反)독일 정서로 번졌다. 가장 민감한 정치적 쟁점을 도쿠멘타의 명시적 주제로 선정한 것에 대해 전략적 우위를 차지하기 위한 문화 전쟁이 아니냐는 비판적 시각도 존재한다. 과연 올해의 도쿠멘타가 혼란에 빠진 유럽 사회에 새로운 탈출구를 제시할 수 있을지, 그리고 미술을 통한 문제 제기에 독일과 유럽 사회는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다.
예술가들은 관념적으로 모호하게 떠다니는 현상의 흔적을 특유의 명민한 촉으로 미학적으로 승화시킨다. 이번 카셀 도쿠멘타가 예술사에 또 어떤 자취를 남길지 기대된다.

 

에디터 안미영
김석모(미술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