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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Our Stories

LIFESTYLE

예술에서 국경이라는 말은 머지않아 화석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국경 밖 작가들이 바라보는 한국의 모습을 지금 되짚어보는 이유는 그 안에 미처 보지 못하고 놓쳐버린 우리의 과거와 현재, 미래의 모습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Part 01

1900~1940

근대의 시작에서 만난 낯선 땅
1900~1930년대 한국은 19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근대화가 빠르게 진행된 시기다. 1910년 8월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35년간 일본의 강제 지배를 받은 슬픈 역사가 포개지는 때이기도 하다. 20세기 이전에도 한국을 우연히 혹은 특수한 목적으로 찾은 외국인이 있었지만, 1876년 부산, 1880년 원산, 1883년 제물포가 잇따라 개항하면서 그 수가 급격하게 증가했다. 일본을 비롯해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에서 이 땅을 찾은 그들의 목적은 천차만별이었다. 신의 뜻에 따라 낯선 땅에서 계몽의 불빛을 비춘 선교사와 교육자가 있는가 하면, 제국주의의 이름하에 조선과 대한제국을 약탈의 대상으로 여긴 침략자도 있었다. 다만 그들에게 한국은 베일에 싸인 신비의 나라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19세기 중반 아시아 국가 대부분이 서구 열강에 문호를 개방해 근대화 과정을 겪을 때, 조선은 강력한 쇄국정책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은자의 나라’,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는 낭만적 수사가 그들이 꿈꾸던 한국을 잘 표현한다. 그들은 서구와 확연히 다른 이국적 자연환경과 건축양식, 남녀의 의상과 생활 습관을 관찰하고 사진, 회화, 판화, 글 등 다양한 방식으로 기록했다. 그 속에는 여행자의 설렘과 호기심이 가득하다.

1900년 12월 6일 자 <르 프티 주르날 (Le Petit Journal)>의 삽화(국립중앙박물관 제공)

파리에 등장한 한국
이 삽화는 당시 프랑스 파리에 등장한 대한제국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자료다. 1900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 대한제국이 참가했을 때 사람들은 ‘신선한 충격’으로 여겼다. 경복궁 근정전을 본떠 만든 전시관에는 삽화 상단에 그린 태극기를 비롯해 비단, 놋그릇, 도자기, 칠보 등 다양한 전통문화를 소개했으며, 전시관 밖은 제물포의 골목길처럼 꾸며놓고 이곳에서 조선의 기와집과 상가 등을 만들거나 길거리 곡예 같은 전통 놀이 문화를 선보였다고 한다. 대한제국은 대상 1개, 금메달 2개, 은메달 10개, 동메달 5개, 장려상 3개를 수상했다.

휴버트 보스, 서울 풍경, 캔버스에 유채, 31×88cm, 1898(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은둔의 나라’에 비춘 근대의 빛
네덜란드계 미국인 화가 휴버트 보스(Hubert Vos, 1855~1935년)가 1898년 조선을 방문해 그린 이 작품에는 ‘근대화’라는 서사가 막 시작된 서울의 풍경이 아스라이 담겼다. 저 멀리 경복궁 건물 세 채가 보인다. 근경에는 ‘백의 민족’이라는 문구를 잘 드러내듯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거닐고 있다. 휴버트 보스는 1898년부터 2년 동안 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방문해 다양한 계층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한국에서는 ‘서울 풍경’ 이외에 고종과 순종, 민상호의 초상화를 유화로 제작했다.

릴리언 메이 밀러, 달빛 속의 한국 농가, 목판화, 20.6×31.8cm, 1928(가나아트센터 제공)

밤의 서정
일본에서 태어난 미국의 여류 화가 릴리언 메이 밀러(Lilian May Miller, 1895~1943년)가 일본 목판화 기법으로 그린 밤 풍경이다. 담소를 나누는 두 남자, 담벼락에 보석처럼 박힌 돌, 바닥과 집을 비추는 달 그림자 등 평화로운 분위기가 매력적이다. 그녀는 일본 주재 미국 대사관과 서울 주재 영사관에 근무한 아버지 덕분에 양국을 자유롭게 오가며 한국의 풍경을 작품 속에 담아냈다. 어려서부터 일본 목판화 교육을 받았으며, 미국 바사 대학 미술학과에서 미술 수업을 들었다. 그녀의 작품에는 이제는 사라진 금강산의 미하연, 대동강의 황포돛대 선단, 한강 나루터 등의 풍경이 서정적 화면과 담백한 색조로 담겨 있다.

엘리자베스 키스, 평양의 동대문, 목판화, 31.4×45cm, 1925(가나아트센터 제공)

눈 덮인 평양의 동대문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영국과 일본에서 활동한 엘리자베스 키스(Elizabeth Keith, 1887~1956년)가 그린 평양의 동대문이다. 여성 작가 특유의 섬세함이 돋보이는 그녀의 작품은 관광 사진첩을 보는 듯 생생한 현장감을 전한다. 3·1운동 직후인 1919년 3월 28일 처음 한국을 방문해 6개월간 머물렀으며, 1940년까지 여러 차례 한국을 찾았다. 판화 이외에도 수채화, 동판화, 드로잉을 비롯해 결핵 퇴치 운동에 동참하는 의미로 크리스마스실 도안을 그리기도 했다. 자매지간인 엘스펫 키스 로버트슨 스콧과 함께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글과 그림으로 소개하는 <옛 한국(Old Korea)>을 출판하기도 했다.

조지 로스가 1904년 촬영한 숭례문의 정면과 후면 풍경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
​호주의 사진작가 조지 로스(George Rose, 1861~1942년)는 청일전쟁 중에 한국을 방문했다. 그는 일본인 조수와 함께 전국 각지를 돌며 입체사진(stereography)으로 풍경을 기록했다. 2개의 렌즈가 나란히 달린 카메라로 촬영하고, 사진을 장치에 끼워 입체경으로 보면 이중 이미지 때문에 입체적 3차원 효과가 나타나는 사진 기법이다. 이런 사진은 오늘날 텔레비전처럼 대중 오락 매체의 일종으로 큰 사랑을 받았다. 조지 로스는 시골 풍경뿐 아니라 명동성당, 시민공원, 발전소 굴뚝, 전차 등 한국에 들이닥친 근대화의 상징도 포착했다. 그는 사진과 함께 당시 한국의 상황을 설명하는 글도 적어두어 그의 작업은 역사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받는다.

한국의 ‘놀라운’ 일상
한국을 찾은 이방인에게 복식, 식생활, 남녀의 역할, 전통문화 등 일상생활의 모습은 놀라움의 대상이었다. 일본을 거쳐 제물포를 통해 서울에 온 프랑스의 젊은 역사학자 장 드 팡주는 자신이 마주친 한국인을 서술할 때 의복을 큰 특징으로 꼽았다. “북아프리카의 지중해 연안 사람을 연상시키는 헐렁한 흰색 옷차림의 무사태평한 코리아 사람들.” 이어 그는 일본과 한국이 자연풍경은 유사하지만 “헐렁한 소매가 달린 흰색 면 옷”이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지적했다. 1904년부터 1930년까지 한국에 머물며 개성 여학교 교사로 활동한 미국인 엘라수 와그너가 남긴 글에도 의복에 관한 인상이 선명하다. “아름다운 깃털 달린 새처럼 밝은색 옷을 입은 아이들 옆으로는 어두운 색의 서구식 신사복을 입은 젊은이들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구식 옷을 입은 시골 사람, 농부, 적공, 노동자도 많이 보인다.” 19세기 이전에 그린 삽화 등에는 한국인의 얼굴이나 복장이 마치 상상의 산물처럼 과장되거나 현실감이 없는 표현이 많았지만, 1900년 이후 한국을 직접 방문한 이들이 많아지면서 점차 사실적으로 재현한 기록물 성격의 작업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특히 19세기 후반부터 한국에 사진이 도입되면서 인물이나 풍경을 정확한 모습으로 남겨놓을 수 있게 됐다. 그들은 낯선 이방인 앞에서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포즈를 취한 어린아이부터 논과 밭을 일구는 농부, 색색의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규수, 악사나 도공 같은 전통 장인, 굿을 하는 무당, 아이를 돌보고 장을 보거나 빨래를 하는 아낙네, 긴 담뱃대를 물고 길에 모인 사내까지, 각계각층의 사람과 자연스럽게 만났다. 애정 어린 시선으로 한국과 한국인을 기록한 그들의 작업은 우리가 지나온, 어쩌면 너무 쉽게 잊은 소중한 세월을 살펴보는 시간을 제공한다.

폴 자쿨레, 귀염둥이, 39×30cm, 목판화 1940(가나아트센터 제공)

폴 자쿨레, 한국 최고의 도예가, 39×30cm, 목판화, 1940(가나아트센터 제공)

한국, 아름다운 선을 입다
​프랑스 출신 화가 폴 자쿨레(Paul Jacoulet, 1896~1960년)는 엘리자베스 키스와 함께 한국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다색 목판화 작가 중 한 명이다. 그는 1920년 일본 주재 프랑스 대사관에 근무하면서 개인 그림 지도를 받아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어머니가 있는 서울을 오가며 한국과 한국인을 작업의 주요 소재로 삼았다. 1934년에는 현재 신세계백화점인 미쓰코시 백화점에서 <폴 자쿨레 판화전>을 개최했다. ‘귀염둥이’라 이름 붙인 작품은 한국의 모자를 서구의 성 모자상을 연상시키는 구도로 포착했으며, ‘한국 최고의 도예가’는 ‘일하는 사람’ 시리즈 중 하나로 한복을 차려입고 청자를 재현하는 도공의 모습을 표현했다. 두 작품 모두 선이 중심이 되는 목판화의 특색을 살려 한복의 유려한 선을 잘 드러내기 위해 정성을 들였다.

스텐 베리만이 촬영한 한국의 풍경(스텐 베리만 유족 제공)

탐험가의 눈으로 본 한국
한국을 찾고 그 인상을 작품으로 남긴 이들은 작가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스웨덴의 탐험가이자 동물학자인 스텐 베리만(Sten Bergman, 1895~1975년)이 대표적이다. 그는 1935년 2월 21일 스웨덴 왕립 자연사박물관에 소장할 조류 표본을 수집하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 21개월 동안 한국에 머물면서 조류 표본을 수집하는 한편, 이 땅의 풍속을 카메라에 생생하게 담았다. 그의 저서 <한국의 야생동물지(In Korean Wilds and Villages)>에는 한국의 과거와 현재는 물론 수도 경성, 혼례 풍습, 명절, 바다의 고기잡이, 동물 사냥, 창경궁 벚꽃놀이, 민간 의료, 봉산 탈춤과 기생 등 당대의 풍속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가 촬영한 사진을 모아 2011년 서울대박물관에서 <1935~1936, 스웨덴 탐험가 스텐 베리만이 만난 사람들>이란 전시가 열렸으며, 그와 한국의 인연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TV로 방영, 화제를 모았다.

엘리자베스 키스, 할아버지와 서당 아이들, 목판화, 36.5×25cm, 1919(가나아트센터 제공)

사라진 풍경을 찾아서
다양한 계층의 아이 8명이 훈장으로 보이는 노인을 따라 산비탈을 내려오고 있다. 저 멀리 눈 덮인 산이 계절이 겨울임을 알려준다. 일제강점기에도 서당은 대표적 교육기관의 역할을 수행했다. 1910년대 중반부터 높아진 교육열 때문에 전국 곳곳에서 증가하던 서당은 일본의 민족말살정책과 동화정책에 의해 점차 폐쇄됐으며, 1930년대 중반 이후에는 그 자취를 감춰버렸다.

콘스턴스 테일러, 옛 서울의 거리 풍경, 수채, 1894~1901년경

서울, 아름다운 그 거리
스코틀랜드 화가 콘스턴스 테일러(Constance J. Tayler, 1868~1948년)가 서울 거리의 활기찬 풍경을 수채화로 제작했다. 그녀는 1894년경부터 한국을 찾아 한국인의 모습을 수채화와 삽화 등으로 남겼으며, 1904년에는 이를 바탕으로 <코리아 앳 홈(Korea at Home)>이라는 책도 출간했다.

참고 문헌
1 <서양인이 본 근대 전환기의 한국, 한국인>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2012
2 안드레 에카르트, <조선, 지극히 아름다운 나라>, 살림, 2010
3 엘라수 와그너, <미국인 교육가 엘라수 와그너가 본 한국의 어제와 오늘 1904~1930>, 살림, 2009
4 이충렬, <그림으로 읽는 한국 근대의 풍경>, 김영사, 2011
5 장 드 팡주 외, <프랑스 역자학자의 한반도 여행기 코리아에서>, 살림, 2013
6 조지 로스, <호주 사진가의 눈을 통해 본 한국 1904>, 교보문고, 2004

Part 02

1940~1980

격동의 한국을 그린 예술
일본인 미술가와 한국전쟁 참전국의 사진가 등 1940~1970년대 한국을 찾은 많은 외국 작가에게 한국은 일제 식민지, 전쟁, 가난을 겪는 동양의 작은 나라였다. 문화 예술이 발달하기 어려운 당시의 기록은 고마운 자료가 되었지만, 여성을 우회적으로 비유하거나 전쟁의 잔혹한 장면을 자극적으로 표현한 흥미 위주의 작품은 외부의 편협한 시각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해방 이후 빼앗긴 말과 글을 되찾으면서 한동안 우표, 동전, 지폐, 교과서 등을 우리 것으로 만드는 작업에 열중했고 유학을 떠난 한국 미술가들이 귀국해 작업에 매진하며 정체성을 찾고자 심혈을 기울인 시기이기도 하다.

마쓰다 레이코, 승무, 종이에 목판, 39×27cm, 1940(주삿포로 총영사관 제공)

일본인 작가의 어떤 시선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마련한 조선미술전람회는 1944년까지 총 23회 개최했다. 기록에서 심사위원과 출품자 중 일본인을 종종 발견할 수 있고, 이후 이들을 비롯해 한국에서 활동한 일본인 미술가의 작품이 다수 등장한다. 이 전람회가 한국 근대미술의 일본화에 촉진제 역할을 했다는 평도 있다. 일본의 회화 기법인 우키요에 양식과 일본식 얼굴 표현법, 일본의 채색화 방식에 기반을 둔 여러 작품에서 한국인이 마치 일본인처럼 보이는 듯한 착각이 드는데 그런 혼돈은 나라를 빼앗긴 한국의 당시 모습을 드러낸다. 조선으로 이주한 일본인 미술가의 풍경화에서는 인왕산을 비롯한 전통적 서울의 풍경과 평범한 가정집의 모습도 볼 수 있다. 그들이 바라본 조선은 개간되지 않은 풍경을 연상시킨다. 정식 미술 교육을 받기 어려운 조선인에게 일본은 여지없는 대안이었으며, 강요당하고 저항하기를 반복하며 한국 미술도 자체 색을 갖추기 시작했다.

기지촌, 1965(눈빛출판사 제공)

결단식 후 어머니와 면회 중인 파월 용사, 1965

하천 공사장의 여성 근로자, 1968

흑백 다큐멘터리로 담은 한국
일본인 사진가 구와바라 시세이(1936년~)는 20대 후반이던 1964년 처음 한국을 찾았다. 그 이후 한국인 아내와 맺은 인연으로 100여 차례 방한하면서 한국의 반세기 역사를 카메라에 담았다. 한일회담 반대 시위, 베트남 파병, 근대화와 경제성장 등으로 경직된 한국 사회의 분위기 탓에 자신을 김씨로 속이고 셔터를 눌렀다는 그는 투철한 다큐멘터리 작가였다. 여의도 비행장에서 어머니와 면회 중인 고개 숙인 군인의 모습, 재봉틀을 붙잡고 일하는 여성, 대형 건물과 고가도로가 들어서는 건설 현장 등 작가는 한국의 중요한 산업화 과정을 차례로 기록했다. “산문이나 문예 작품, 그림으로는 언제든 과거의 이야기를 그리고 쓸 수 있지만, 그 순간이 아니면 담을 수 없는 사진 자료는 역사 기록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라고 말한 작가는 현재까지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파블로 피카소, 한국에서의 학살, 패널에 유채, 110×210cm, 1951

예술가의 날 선 무기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년)는 한국전쟁 당시 1950년 10월부터 12월까지 황해도 신천군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에 관한 보도를 접하고 ‘한국에서의 학살’을 그렸다. 캔버스 왼쪽에는 벌거벗은 여자와 어린아이가 두려움에 떠는 표정으로 서 있고, 오른쪽에는 강경한 자세로 총과 칼을 겨누는 군인이 있다. 한국을 방문한 적 없는 그가 학살자와 희생자가 명확히 대비되는 이 작품을 통해 비판하고자 한 것은 특정 전쟁이 아니다. 민간인이 무참히 희생된 참상을 그린 ‘게르니카’(1937년)에서도 엿볼 수 있는 것처럼 전쟁의 잔혹함과 무고한 이들이 희생당한 사건 그 자체에 대한 책망일 것이다. “예술가는 정치적 인물”, “회화는 적과 싸우며 공격과 수비를 행하는 하나의 전투 무기”라고 한 그의 발언은 시대에 맞서는 예술가들의 입장과 같았다.

야로슬라브 코마렉, 대구시장, 1950년대(주한 체코 문화원 제공)

사진으로 남은 한국전쟁의 흔적
한국전쟁 당시 매그넘 사진가들이 종군기자로 파견됐다. <라이프>는 미국의 포토저널리즘이 만들어낸 최초의 스타 마거릿 버크 화이트와 칼 마이던스 같은 유명한 사진가에게 종군을 명해 전쟁 상황을 세계 언론에 알리게 했다. 종전 후에는 원조 관련 기구 산하의 문화 기구를 통해 문화 예술인이 다녀갔다. 그중 중립국감시위원회 소속으로 한국에 온 체코인은 개인용 카메라를 갖고 있었고 간혹 사진가도 함께했다. 사진에서는 한국에서 접한 모든 것이 신기한 그들의 다양한 시각을 느낄 수 있다. 결혼식을 비롯한 다양한 의식, 미군 기지 전경, 판문점 주변의 일상을 카메라에 담았고 개성뿐 아니라 인천, 부산, 만포, 강릉, 평양 등 여러 지역의 모습도 놓치지 않았다. 그들이 담은 기록사진 중에는 컬러사진도 다수 포함돼 있으며, 그 시절 흑백사진기조차 흔치 않던 우리나라엔 오늘날 소중한 자료로 남았다.

윌리 세일러, 묵상, 동판화, 21.5×29cm, 1960(가나아트센터 제공)

민중적 리얼리즘을 구현하다
독일 태생의 미국 화가 윌리 세일러(Willy Seiler, 1903년~?)는 제2차 세계대전 후 주일 미군 사령부에 근무하며 1956년부터 1960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한국을 방문하고 12점의 동판화를 제작했다. 그 시기 한국 화가들이 시도하지 않은 작업 방식으로 은빛의 작은 생선을 섬세하게 묘사하고, 돈을 입에 문 상인의 표정과 인물들의 몸짓을 실감 나게 표현했다. 작가의 ‘한국’ 시리즈에 등장하는 인물은 어린아이부터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다양하고 배경은 시골, 장터, 강 등 정겨운 삶의 장소가 대부분이다. 미국의 한 신문에도 연재됐지만 외국 사람 눈에 비친 한국의 이미지가 틀에 박힌 채 일반화되었다는 부정적 견해도 있다.

참고 문헌
1 이충걸, <그림으로 읽는 한국 근대의 풍경>, 김영사, 2011
2 <외국 미술 국내 전시 60년>,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2012
3 구와바라 시세이, <격동 50년>, 눈빛, 2015
4 전, 주한 체코 문화원, 2014
5 <다시 만남: 한일 근대미술가들의 눈-‘조선’에서 그리다>전 전시 자료, 2015
6 정준모, <한국 미술, 전쟁을 그리다>, 마로니에북스, 2013

Part 03

1980~2010

아이러브 코리아
1980년대부터 밀레니엄 직전까지 한국은 그야말로 격동의 시대였다.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충격적인 사건 중 하나인 민주화 운동이 발현한 시기이며, 행정적으론 야간통행금지령이 해제돼(1982년 1월) 본격적인 ‘밤 문화’가 생겨났고, 3S 정책의 일환으로 프로야구가 출범(1982년 3월), 몇 해 뒤엔 전 국민이 ‘손에 손 잡고’ 올림픽을 맞으며 유례없는 국제화 시대를 경험하기도 했다. 동북아의 작은 분단 국가에 불과한 ‘코리아’는 그 덕에 정치와 외교, 사회, 문화 등 여러 분야에 걸쳐 많은 변화를 맞았다. 이전까지만 해도 해외에서 외국인을 만나면 중국인이냐고 물어보고, 아니라고 하면 일본인이냐고 물어보고, 그것도 아니라고 하면 ‘대체 어디에서 왔느냐’는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 외국인을 만나는 게 부지기수였다. 하지만 올림픽과 OECD 가입(1996년 12월) 등으로 이 나라가 급속히 성장하고, 이어서 “아이 러브 코리아”를 외치는 세계적 스타(뉴키즈 언더블록, 마이클 잭슨, 밥 딜런 등)의 방한 러시 또한 아무렇지 않게 이어지자 한때 세계를 달군 미국 시트콤 <프렌즈>에서조차 이 땅을 “아름답고 슬픈 역사가 있고, 김씨가 많은 나라”라고 캐주얼하게 언급하며 광복 이후 사회적·문화적으로 가장 눈에 띄는 호황기를 보냈다. 2000년대에 들어서도 이 열기는 계속됐다. 월드컵(2002년 5월)이 온 나라를 물들였고, 자정이 지나서까지 놀고도 다음 날 멀쩡히 업무에 복귀해 일할 수 있는 한국인의 독특한 근성과 역동성은 60년 만에 국가 경제 규모를 약 3만 배나 늘려놓는 진기를 보이기도 했다. 그 때문인지 올림픽 이후 2000년대까지 한국을 찾은 외국 아티스트의 한국을 소재로 한 작품엔 이 땅이 심심치 않게 ‘다이내믹 코리아’로 등장했다.

토마스 스트루트, 건선거 DSME(대우조선해양) 조선소, 거제도 218.8×272.5cm, 2007(갤러리현대 제공)

역동적, 그러나 조금 과한
2010년 서울에서 첫 개인전을 연 토마스 스트루트(Thomas Struth)는 서울 갤러리현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 당시 “한국인은 굉장히 부지런하고 역동적이지만 어떤 시점에선 너무 과한 것 같다”고 조심스레 말했다. 그가 거제도 대우조선소에서 찍은 사진은 큰 건축물이 극한까지 모든 공간을 채운 듯한 느낌을 준다. 그는 개인전에 앞서 3년간 한국을 이곳저곳 여행하며 주로 ‘큰 것’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러면서 ‘건축물을 만드는 건 인간인데 과연 그들이 건축과 고층에 대한 욕망을 제어할 수 있을까’라고 자문했다. 사람의 모습은 거의 볼 수 없지만 사람의 손길이 닿고, 사람이 만드는 밀도 높은 공간에 주목한 세계적 거장. 웅장한 듯, 그러나 어떤 슬픔이 느껴지는 한 장의 사진이다.

인천아트플랫폼에 전시된 줄리앙 쿠아녜의 작품 ‘Archipel’

줄리앙 쿠아녜, The continuous cities #15 SL, 폴리에스테르에 잉크 드로잉, 150x150cm, 2011

줄리앙 쿠아녜, The continuous cities 19, 폴리에스테르에 잉크 드로잉, 150x150cm, 2011

처음 겪는 모더니티
줄리앙 쿠아녜(Julien Coignet)는 지난 2007년 한국에서 열린 개인전을 계기로 발전하는 한국의 도시 문화를 경험했다. 이후 서울을 이곳저곳 둘러본 뒤 서울의 지도를 이용해 거대 데생 시리즈를 기획했다. 그렇게 그가 그려낸 서울은 파괴와 생성 사이에서 요동하며 팽창하는 도시다. 모더니티를 근간으로 한 유럽 도시와는 상이한 풍경을 보인다.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복잡하지만, 한편으론 어딘가 작은 체계가 자리 잡은 것처럼 보인다. 실제와 허상을 넘나드는 작가의 상상력은 도시민의 이동 행태, 주거지의 재조직 등 여러 가지에 관여한다. 이건 거의 조물주 수준이다. 프랑스 출신 젊은 작가에게 한국은 그리고 서울은 생전 본 적 없는 큐브 게임과 다름없다.

세자르 발다치니, 엄지손가락, 청동, 1988(소마미술관 제공)

강인한 생명력 그리고 성공
지금은 작고한 프랑스의 국보급 조각가 세자르 발다치니(Cesar Baldaccini). 서울이 세계적으로 주목받던 88 서울 올림픽 당시 그는 올림픽조각공원에 이 작품을 설치했다. 파리 라데팡스 지역에 12m 높이로 자리한 그의 대표작 ‘엄지손가락’의 동생뻘인 작품으로, 형과 마찬가지로 강인한 생명력과 생동감의 원천에 관한 정신을 나타낸다. 그의 작품을 보면 지금도 88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갈망하던 당시 한국인의 뜨거운 정서가 느껴지는 듯하다. 실제로 그 자신도 서울 올림픽의 성공을 예측하며 작품을 설치했다고 하니, 더없이 의미가 깊다.

탈루 엘엔, Genetically Modified Landscape(GM Landscape), 혼합재료, 210×205×88cm, 2010(아라리오갤러리 서울 제공)

철학적이고 환경적인 고민
인도에서 시각예술과 박물관학을 공부하고 영국 리즈 대학에서 현대미술을 전공한 후 현재 한국에 거주하며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탈루 엘엔(Tallur L.N.). 그는 그간 역사와 자본주의를 위트 있게 풍자해왔다. 이 작품도 물론 그 연장선상에 있다. 산 모양으로 쌓은 쌀을 중심으로 습기를 뿜어내는 가습기와 습기를 말리는 히터를 마치 태양과 구름처럼 배치해 작은 생태계를 이루게 했다. 분명한 건 어느 누구도 유전자 변형 농작물에 대한 경고를 이렇듯 위트 있게 풀어내진 못할 거란 점이다. 10년 가까이 한국에 살며 한국인이 다 된 인도 출신 작가의 환경적 고민이다.

마이클 케너, Pine Trees, Study 1, Wolcheon, Gangwando, South Korea, 2007(공근혜갤러리 제공)

흔해빠지지 않은 풍경
​아날로그 필름카메라만 고집하는 마이클 케너(Michael Kenna)가 2007년 강원도 삼척시 원덕읍의 한 섬을 촬영한 사진이다. 이 작품은 이미 알려졌다시피 2011년 국내 한 항공사와 복잡한 표절 스캔들에 휘말렸다(당시 한국 법정은 최종적으로 항공사의 손을 들어줬다). 당시 인터넷에선 케너의 작품을 두고 ‘흔해빠진 풍경 사진’이란 의견도 많았다. 재미난 점은 훗날 이 작품을 포함한 케너의 서울 전시명이 역설적이게도 ‘흔해빠진 풍경 사진’이었다는 것. 사실 예술 저작권에 관한 이야기보다 중요한 건 이런 거다. 적어도 이 작품으로 케너는 한국의 알려지지 않은 섬의 존재를 널리 알렸고, 이후 섬의 보존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이본 보그, Seoul, 캔버스에 유채, 122×152cm, 2003(다도화랑 제공)

내 고향처럼 푸근한 이곳
​1990년대 초반 한국을 처음 방문한 호주 출신 작가 이본 보그(Yvonne Boag)는 20여 년에 걸쳐 호주와 한국을 오가며 작가와 큐레이터, 비평가는 물론 사업가와 외교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의 한국인과 친분을 쌓았다. 사진 속 작품은 그녀가 제2의 고향인 한국에서 느낀 삶의 감정을 기반으로 단조로운 선과 면 그리고 색으로 완성한 것이다. 조그마한 돌무더기라도 그게 마음에 들면 건물보다 크게 그리고, 그 배경을 이루는 색 또한 자신의 느낌과 감정 그리고 추억을 뜻하는 색으로 칠한다는 그녀의 작업은 특히 서울 남산을 소재로 한 것이 많다.

한국적인, 오히려 더 한국적인
“한국에 대한 첫인상은 인구밀도가 높다는 겁니다. 이 인구를 수용하기 위해선 더 많은 건축물을 계속 지어야겠죠. 농담 삼아 이 건물을 다 짓기 위해선 땅이 부족할 테니 20년 후엔 꼭 통일이 돼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2007년부터 약 3년간 세 차례나 한국을 방문한 토마스 스트루트의 한국에 대한 첫인상이다. 서울의 화려한 한강 전망대와 대기업의 반도체 공장, 경기도 성남의 대규모 아파트 단지, 거제도의 대형 조선소 등 주로 크고 우람한 것을 카메라에 담은 그는 이곳에서 당연히 예의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서나 느낄 법한 어떤 청명함이나 서로 부대끼며 살아가는 한국인의 진솔한 땀냄새를 맡지 못했다. 하지만 눈을 조금만 돌려보면, 한국이란 나라는 어떤 이들에겐 여전히 북적대는 시장이었다. 갖가지 색깔과 상기된 사람들, 소음과 향기, 쉼 없이 움직이는 자전거와 오토바이, 손수레가 있다. 물건을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이 있고, 포장마차도 있다. 광란과 혼돈의 풍요가 넘실거린다. 그래서 종이와 붓, 물감으로만 그걸 그리는 게 불가능할 때도 있다. 한 예로 2005년 서울 관훈갤러리에선 한국에 거주한 경험이 있는 외국 작가가 한국을 소재로 한 작품을 모아 <코리안 아이즈드>라는 이름으로 소개했다. 당시의 전시 소식을 전한 옛 신문을 들춰보면 그들은 “한국인들이 오랜 역사와 전통문화를 가졌음에도 그걸 소홀히 하고 외국의 것만 추종하는 경향이 있다”며 오히려 토종 한국인보다 더 한국인처럼 어딘가 아쉬운 지점을 지적했다. 이를 과연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애정 어린 시선으로 또는 완전히 한국인으로 동화되어 좀 더 현실적이고 철학적인 것에 대해 고민해본 당시의 작가들은 우리가 우리 안에서 보지 못한 좀 더 본질적인 것들을 보았다.

로버트 리디코트, 한남동의 두 여인, 캔버스에 유채, 61.5×46cm, 2006

로버트 리디코트, 한국의 고추 장수, 캔버스에 유채, 44×37cm, 2007

사람 사는 냄새
​로버트 리디코트(Robert Liddicoat)는 점묘법을 이용한 유화 풍경화로 호주에선 알아주는 작가다. 딸 메리제인 리디코트가 25년 전 주한 호주 대사관 교육과학참사관으로 부임하며 한국과 인연을 맺었는데, 당시 그를 사로잡은 건 다름 아닌 한국의 재래시장이었다. 남대문시장의 커다란 파라솔 아래서 채소를 파는 아줌마, 모퉁이에 있는 자그마한 꽃 가게, 무심한 듯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는 생선 장수 등 그는 한국을 소재로 100여 점의 작품을 완성했다.

Part 04

PRESENT

보이는 것에서 점점 탈피하는 예술
2000년대를 전후로 한국을 담는 외국 작가들에게 나타나는 주요 현상은 더 이상 보이는 것만을 작품에 담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보이지 않는 것,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행위나 그 안에 깊숙이 내재된 개념 등 더 큰 관심을 갖고 매진한다. 이것은 비단 외국 작가들만의 특성은 아니나 유독 두드러져 보이는 이유는 한국이란 주제가 유형의 2차원 평면에서 벗어나 건전하고 발전적인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3차원, 4차원의 훌륭한 소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대한민국에 두 발을 딛고 이 순간을 살아가는 현재의 우리에게 적절한 지적 자극이 되고, 스스로 한발 더 나아가게 하는 촉매제가 된다.

중앙대학교 조형예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베른트 할프헤르의 안성 작업실

파노라마 안에 담긴 한국, 베른트 할프헤르 2006년부터 한국에 거주하며 현재 중앙대학교 조형예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독일의 현대미술 작가 베른트 할프헤르(Bernd Halbherr)의 집은 안성 외곽 지역에 고즈넉하게 자리 잡았다. 살림집 바로 옆에 위치한 천장 높은 작업실 안으로 범상치 않은 각도와 세기로 자연 채광이 비추는데, 역시나 박서보 선생이 서울 작업실로 이전하기 전에 사용하던 공간이라고 한다. 따스한 가을볕이 기분 좋게 내리쬐는 그의 작업실 곳곳에 지난 6월 문화역서울 284 전시에서 선보인 지구본 모양의 구형 작품이 놓여 있었다. 백남준 작가가 교수로 몸담았던 독일의 뒤셀도르프 아카데미에서 학사와 석사를 마치고 1995년 당시 유학생이던 지금의 아내를 따라 난생처음 한국을 여행한 그는 이후 알고 지내던 한국의 큐레이터가 지난 2000년 미디어 비엔날레인 ‘서울 미디어시티’에 초대하면서 다시 한국을 찾았고, 2003년에는 한국인 교수의 초대로 대학에서 강의하며 1년간 서울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2006년부터 3년간 파주의 하제마을 스튜디오에서 작업하며 독일과 한국에서 수차례 개인전과 그룹전을 개최한 그가 학생 때부터 지금껏 꾸준히 관심을 보이는 주제는 ‘주변 환경에 대한 시각적 인식을 새로운 기법과 관점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더불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고민과 한정된 시공간에서 장소성과 시간성, 운동성을 탐구하는 것이 작업의 주요 골자다.

장소의 공간성과 시간성, 그 안에서 벌어지는 운동성을 표현하기 위해 구형의 프레임을 선택했다.
제주의 숲, 지름 50cm, 2010

장소의 공간성과 시간성, 그 안에서 벌어지는 운동성을 표현하기 위해 구형의 프레임을 선택했다. ​
한옥, 지름 30cm, 2010

문화역서울 284에서 열린 그룹전 <은밀하게 황홀하게: 빛에 대한 31가지 체험>에 출품한 구형 작품은 베른트 할프헤르를 대표하는 아이콘이다. “열여섯 살 때부터 개인적으로 사진을 많이 찍었는데, 그중에서도 파노라마 사진을 특히 좋아하고 작업에도 많이 사용해왔어요. 사진을 찍다 보면 애초 의도와 달리 앵글에 다 담지 못하거나 잘리는 부분이 생기는데, 그 소외된 부분을 줄이기 위해 파노라마로 찍은 다음 구형으로 제작해 이미지가 시각적으로 끝없이 펼쳐지는 것 같은 효과를 줬죠.” 독일에서부터 작업해온 이 시리즈 안의 풍경은 서양의 성당이나 축구장을 비롯해 한국에 머문 이후에는 한옥, 모텔, 공사장, 제주 동굴, 석파정, 한라산 숲, 상암 서울월드컵경기장, 지하철역 주변 등으로 확장됐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머무는 도시에 따라 그의 작업도 달라진다. 수년 전 예루살렘에 1년간 머무른 경험이 있는데, 당시 그는 파노라마가 아니라 프린트한 사진에서 얇은 사각형 프레임만 남겨놓고 나머지 부분은 모두 삭제한 사진 작품을 선보이기도 했다. “많은 나라를 돌아다니며 풍경을 찍고 그것을 재구성하는 작업을 하다 보면, 사회의 문제가 자연스럽게 작품에 반영될 수밖에 없어요.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풍경을 제 방식으로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가장자리 부분만 남겨놓고 안을 모두 파내는 것이었죠. 반대로 한국에서는 제가 미처 모르던 모텔·아줌마·아파트 문화를 접하고, 샤머니즘이 짙게 깔린 한국의 명소 등을 마주칠 때마다 그 풍경의 보이지 않는 면까지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수백 장의 사진을 파노라마처럼 보여주는 ‘대구 이야기 No.2’(2011년) 같은 작품이 나온 거죠.” 인간이 현실을 이해하는 방식에 대해 늘 근본적 의문을 던지는 그는 파노라마 구형 작품 외에도 3D 프린터를 사용한 이미지 작품(옆에서 볼 땐 불규칙한 모양이지만 위에서 바라보면 형상이 드러나는 작품), 공간 속 공간 작품(갤러리 공간을 밖에서 찍고 그것을 갤러리 안에 3D 매핑 처리해 문을 열고 들어오면 다시 갤러리 외부가 나타나는 작품), 다양한 재료를 활용한 키네틱 작업을 꾸준히 선보인다. 한국에 첫발을 내딛은 1995년의 그에 비하면 지금의 그도 변했지만 한국의 변화무쌍한 풍경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닐 터. 그의 눈에 2015년 한국은 어떤 모습일까? “저는 개인적으로 10~20년 전 한국의 복잡한 생활 방식이 참 좋았어요. 지금은 모든 면에서 너무 정형화되고 깔끔해졌죠. 한옥을 비롯한 전통문화가 사라져가는 것도 아쉬운 부분이에요. 그러나 강한 여성을 상징하는 ‘아줌마’ 캐릭터는 한국에만 존재하는 재미난 문화죠. 언젠가는 그 주제로 작업을 해보고 싶어요.

3D 프린터를 이용해 만든 설치 작품. 언뜻 보면 비정형의 설치 작품 같지만 작품에 조명을 비추고 위에서 내려다보면 군인의 모습을 형상화한 형태가 드러난다.

3D 프린터를 이용해 만든 설치 작품. 언뜻 보면 비정형의 설치 작품 같지만 작품에 조명을 비추고 위에서 내려다보면 군인의 모습을 형상화한 형태가 드러난다.

직접 촬영한 이미지를 스튜디오에서 극단적으로 분할하고 재배치해 완성한 작품
​대구 이야기 No.2, 100×100cm, 2011

철원 평화전망대로 가는 모노레일의 유리창에 철원에서 마주치는 다양한 표지판의 텍스트를 옮겨놓았다.
Reading Meaning, text on window, Installation view of REAL DMZ PROJECT, 2012
Photo by Dirk Fleischmann

디륵 플라이쉬만이 개성공단에서 직접 제작한 셔츠
Made in North Korea, Shirt produced in the Kaesong Industrial Complex, 2010 Photo by Hyejin Kim

한국에서 일구는 새로운 예술 교육, 디륵 플라이쉬만
청주대학교 비주얼아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디륵 플라이쉬만(Dirk Fleischmann)은 예술적 창조성과 자본의 관계를 탐구해온 개념미술가다. 그의 작업은 대체로 수익 창출을 이끌어내는 생산적 방식으로 이뤄진다. 한 예로 2004년 그는 ‘나의 태양열발전소’라는 작업으로 프랑크푸르트 예술대학 옥상에 작은 태양열발전소를 설치하고 여기서 생산한 전기를 정부에 판매하는 비즈니스를 시도하기도 했다. 예술적 창조성을 자본으로부터 독립시키는 실천적 방법론을 모색하는 것이다.
프랑크푸르트 출신인 그는 2005년 부산시립미술관에서 열린 <쾌락의 교환가치>전으로 한국과 인연을 맺었고, 이는 그의 첫 번째 글로벌 프로젝트로 자본주의의 논리에 개인적이고 감성적으로 접근한 기획전이었다. 당시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은 젊은 작가’로 소개한 그는 그 후 10년이 흐른 지금 여전히 한국에 머물고 있다. 그사이 프랑크푸르트, 베를린, 런던, 싱가포르 등 유럽과 아시아를 오가며 전시 활동을 계속했지만 주요 작업이 이루어지는 곳은 한국이다. “2005년 당시 부산에 있으면서 개성공단에 대해 읽었어요. 처음엔 경제 시스템이 전혀 다른 남북한이 하나의 자본주의적 생산방식 아래 만나는 것이 가능하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죠. 그런데 그것이 실현되는 것을 보고 국경을 넘는 경험을 하며 새로운 아트 프로젝트를 시작하고 싶었습니다. 그 결과물이 바로 ‘Made in North Korea’ 셔츠죠.” 2010년 연이 닿은 한 한국 기업과 함께 몇 달간 개성공단에 머물며 한복에서 모티브를 얻은 셔츠 500벌을 제작해 판매한 것은 그의 대표작이 됐다. 그는 이후 자신의 개성 체험기를 패션쇼 형식으로 꾸며 아르코예술극장에서 선보이기도 했다.

자신이 만든 셔츠를 입고 서울 종로의 ‘RAT School of ART’ 건물 옥상에 선 디륵 플라이쉬만

디륵 플라이쉬만은 예술로 자본을 창출하려는 시도가 기본적으로 예술계에 대한 불신에서 출발했다고 고백한다. “제가 좀 성급한 편이에요. 유명한 아티스트가 되어 작품이 잘 팔릴지 아닐지 남들이 판단할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어요. 작품을 위한 제작 자금을 곧바로 충당할 수 있길 원했죠. 그래서 대학 때부터 미술계의 제도적 틀에서 독립하는 방법을 찾았습니다.” 이후 이어온 작업의 큰 흐름은 일관되지만 각각의 작업은 놀라우리만치 참신하다. 2011년 광주디자인비엔날레에서는 ‘나의 컨셉 가게’라는 제목으로 전시장 안에 개성공단에서 만든 옷과 가상의 부동산 등을 판매하는 가게를 차렸다. 또 작년 광주미디어아트페스티벌에서는 열대우림의 토지를 구해 식물을 기르고 자체적 탄소 배출권 체계를 구축한 ‘나의 열대우림 농장’ 풍경 사진을 다양한 매체로 보여줬다. 그는 자본주의는 어디에나 있고 사람들의 마음을 점령하고 있으니 작업에 대한 아이디어 또한 현재의 시스템에서 찾는다고 말한다.
최근 그는 새로운 일에 열중하고 있다. 지난해 서울 종로에 독립 예술학교 ‘RAT School of ART’의 문을 연 것. “예술 교육이 점점 아카데믹해지고 있어요. 자유로운 사고와 창의력에 도움 될 게 없죠. 아트는 가르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작가로서 살아남고 작업을 지속할 수 있는 방법을 능동적으로 학습해야 합니다. RAT School of ART에서는 학생을 ‘멤버’라고 해요. 이 학교가 학위를 따기 위한 곳이 아니라, 사람들을 위해 만들었다는 기본적 신념과 열린 커뮤니티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죠.” 한국에 직접 세운 예술학교에서 맞은 첫 멤버들에게서 그는 희망을 본 모양이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슈테델슐레(Stadelschule) 대학, 캐나다 밴쿠버의 센터 A(Centre A)와 파트너십을 맺고 국제 교류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이미 지난 9월엔 슈테델슐레 대학에서 13명의 학생과 2명의 교수가 한국을 방문해 2주 동안 머물며 워크숍을 개최하고 서울 아트 투어를 하며 한국 작가와 교류하는 시간을 즐겼다. 그는 앞으로 이 예술학교를 통해 아시아와 유럽, 캐나다를 잇는 컬래버레이션을 추진할 계획이다.
“서울의 아트 신은 생동감이 넘쳐요. 특히 젊은 아티스트가 그들만의 기반과 채널을 만들어가는 것을 보는 게 흥미롭습니다. 한국 미술계에서 앞으로 10년간 어마어마한 결과물이 나올 거라고 확신해요. 제가 하고 싶은 것도 역동적이고 예술적인 이 도시의 잠재력을 젊은 예술가들과 이어주는 역할입니다.” 결국 그의 비전은 20여 년 전 고국에서 예술을 공부하던 시절 고민한 것과 다르지 않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미술로 영역을 확장하며, 이 세상 어디서든 예술 그 자체로 살아남을 수 있는 힘이다.

‘Made in North Korea’의 박스 패키지
Made in North Korea, Box and Package design by Sulki & Min, 2010 Photo by Dirk Fleischmann

‘Made in North Korea’의 작업과 연계된 ‘myshopwindow’
myshopwindow, Installation view, Space Hamilton, 2010 Photo by Dirk Fleischmann

탄소 배출권 거래에 주목해 필리핀의 한 농장을 기반으로 시작한 ‘나의 열대우림 농장’ 프로젝트를 삼성미술관 리움에서 전시했다.
myforestfarm(Leeum Version), Installation view, Memories of the Future at Leeum Museum, 2012 Photo by Leeum

개성 체험기를 바탕으로 아르코예술극장에서 개최한 패션쇼
myfashionshow, ARKO Theater, Seoul, Festival BOM, 2011 Photo by One Joon Che

2011년 광주디자인비엔날레에서 전시장 안에 가게를 차렸다.
myconceptstore, Installation view, Gwangju Design Biennale 2011, Photo by Dirk Fleischmann

에디터 피쳐팀
디자인 이지현